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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60화 (160/307)

160화. 권기남의 합류

“방글라데시에는 콕스바자라라고 세계에서 제일 긴 해변이 있습니다. 길이만도 150킬로입니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거리인데 아주 경치가 끝내줍니다.”

“진짜지?”

“그럼요.”

두 사람은 그날 같이 한국 식당 ‘대장금’으로 가서 간단하게 한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호텔에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권기남이 피곤하기도 했고, 또 내일 멀리 다녀와야 했다.

* * *

다음 날, 권기남의 차림은 관광객의 표본이었다.

화려한 남방에 찢어진 반바지, 신발은 샌들이고 머리에는 선글라스가 올려져 있었다.

그에 반해 진혁과 샤물은 양복 차림이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권기남이 바로 물었다.

“관광이 아니라 일하러 가는 기가?”

“아닙니다. 그쪽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요. 여기 편한 옷 가져가지 않습니까?”

샤물이 캐리어를 끌고 있었다.

“이번에도 거짓부렁이면 다시는 안 볼 끼다.”

“이번에는 진짜입니다. 비행장에 내리시기도 전에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가량 지나서 도착 안내 방송이 나오자 창밖을 내다봤다.

하늘에서 바라본 해변인데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진짜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한 시간을 해변만 보고 달리니 이제 그것도 지겨울 때쯤 택시가 도시로 들어갔다.

내비게이션이 없는 곳이라 샤물이 물어물어 외곽에 있는 공장을 찾을 수 있었다.

저 멀리 바다도 보였다.

부지가 붙어 있어 4만 평의 너른 땅에 건물은 만 평도 차지하고 있지 않아 휑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가동은 안 하지만 국영 방직소라 관리인들이 관리를 하고 있어 그리 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곳 책임자 모니입니다. 본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진혁이 따라가자 권기남이 얼른 어깨를 낚아채며 물었다.

“이기 뭐 하는 기가?”

“근처에 매물로 나온 공장이 있다고 해서 지나가는 김에 둘러보려고요. 귀찮으시면 잠시 여기 계세요. 얼른 둘러보고 올게요.”

“중고 기계는 대충 보고 사면 안 된다. 잘못 사면 고치느라 배보다 배꼽이 더 커.”

기계라면 사족을 못 쓰는 권기남이 그냥 있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맞았다.

그는 제일 앞서 모니를 따라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권기남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나마 제2공장은 나았다.

제1공장은 반도 보지 않았는데 바로 손을 저었다.

“더 볼 필요도 없다. 이런 쓰레기를 팔겠다는 놈이 어떤 놈이냐? 그런 사기꾼 놈들은 아주 싸대기를 갈겨 버려야 하는 기다.”

“그래도 좀 더 자세히 봐주십시오.”

“볼 필요 없다니까. 기계도 기계지만 이 건물이 지금까지 버티고 서 있는 게 용하다. 다시 기계를 돌리면 얼마 못 가 무너진다. 사람이 깔려 죽는단 말이다, 이놈아.”

아무리 좋은 기계라 하더라도 미세한 진동은 발생하기 마련이었다. 그게 건물에 영향을 미쳐 균열을 일으킨다.

그나마 계속 기계가 돌아가면 내성이 생겨 덜하지만, 멈췄다가 다시 돌리면 그 충격은 몇 배로 커진다.

권기남이 극렬히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더 보지 못하고 나와 택시를 타고 난민 캠프로 향했다.

갑자기 검문소가 나오고 군인들이 보이자 권기남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했다.

“어디로 끌고 가는 기가?”

“저 앞에 난민 캠프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요.”

“난민 캠프?”

“가 보시면 압니다.”

택시 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에 권기남의 표정이 심각하다 못해 입을 아예 닫았다.

학교 앞에 도착하자 마침 하교 시간인지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김연희가 그들에게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다가 택시에 내리는 진혁 일행을 보고 얼른 달려왔다.

그들은 지금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하교하던 아이들이 일제히 달려와서 손을 내밀며 짧은 한국말과 영어로 돈과 먹을 것을 요구했다.

“선생님 손님이야. 어서 가.”

김연희가 겨우 그들을 밀어내고 진혁 일행을 구해 줬다.

“오실 거면 미리 연락을 주시지요.”

“근처에 볼일이 있어 잠시 들른 겁니다.”

“들어가세요.”

“그럽시다.”

따라가던 진혁은 권기남이 멍한 시선으로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불렀다.

“뭐 하세요? 어서 오세요.”

“어, 그러자.”

허둥대며 다가온 권기남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김연희가 데려간 곳은 방금 나간 학생들의 교실인 듯 어지럽혀져 있었다.

“다른 반은 아직 수업 중인데 가 보실래요?”

“아닙니다. 택시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바로 돌아가야 해서요.”

“알겠어요. 금방 커피 타 올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얼마 후 김연희가 커피를 내놓고 앉자 진혁이 그간의 일들을 들려주었다.

“어머, 어머, 그럼 우리 아이들이 드디어 일을 할 수 있게 된 거네요?”

“아직 확정된 게 아닙니다. 그리고 공장 상황이 그리 좋지도 못하고요.”

“여기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은 없어요. 그냥 난민 캠프 밖에 나가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에게는 희망이고 기쁨이에요. 이제 아이들 보는 게 더 이상 미안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기뻐요.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흐으윽…….”

김연희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에게 공장 상황을 낱낱이 알려 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주의는 줘야 했다.

“나즈마 총리가 어렵게 결단을 내려 후속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섣불리 알려지면 난민들이 동요하게 되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발표가 날 때까지 나만 알고 있을게요.”

“그래도 미리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하니 졸업생들 명단을 만들어 두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도 파악해 주세요.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다는 아니지만 희망을 향해 한발 나아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기다릴게요. 기도하며 기다릴게요.”

김연희에게 다시 한번 비밀로 해야 한다는 당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어 진혁은 이곳에 도착한 이후로 권기남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철저한 검문을 받고 난민 캠프를 빠져나온 택시가 콕스바자르 해변가에 위치한 사이예먼 비치 리조트에 내려줬다.

수영을 하고 돌아오는 관광객들 몇몇이 보였다.

무심코 따라가던 권기남이 물었다.

“여긴 뭐꼬?”

“리조트요. 장시간 비행에 또 여기까지 오느라 힘드실 텐데 여기서 식사하고 쉬었다가 내일 출발하게요.”

“이기 미친놈 아니가.”

“예?”

“저기 애들을 보고서도 여기 밥이 넘어가고 침대에서 잠이 오냐? 날래 돌아가자.”

딱딱하게 굳은 권기남의 표정에 진혁은 두말없이 샤물에게 물었다.

“지금 가면 비행기가 있겠냐?”

“마지막 비행기는 탈 수 있습니다.”

“택시 잡아라.”

허겁지겁 택시를 잡아타고 서둘러 마지막 비행기에 올라타 디카 공항에 도착하자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다시 한국 식당 ‘대장금’으로 가서 김치찌개와 함께 소주를 마셨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소주잔을 비우던 권기남이 말했다.

“내래 피난 와서 어린 시절을 양키들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보냈는기라. 그놈들이 던져 주는 초콜릿이며 사탕 받아먹으려고 말이야.”

“……!”

“서 회장.”

“예, 공장장님.”

“내래 앞으로는 니가 시키는 것은 뭐든지 다 할 끼다. 죽으라면 죽은 시늉도 하마. 그러니 제발 저 불쌍한 새끼들 살게 해 주라. 넌 할 수 있지 않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꼭 행복을 찾아 주겠습니다.”

대취한 권기남 때문에 이번에는 진혁이 고생을 했다.

“아이구, 머리야…….”

“무슨 술을 죽기 살기로 드십니까?”

“머리 울리니 끼니 시끄럽게 떠들지 마라우.”

“얼른 일어나서 씻으세요. 전 요르단에 들렀다가 한국으로 갈 테니 공장장님은 먼저 돌아가 계세요.”

권기남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난 안 간다. 저 새끼들을 두고 그냥 갈 수는 없다.”

“우리 마음대로 시작할 일이 아니에요. 이곳 정부의 절차를 따라야 하니 아직 시간이 더 지나야 해요.”

“그럼 여기서 공장 일을 도와주며 기다릴 테니 너는 일 보고 와라.”

“그냥 돌아가서 쉬시라는 게 아닙니다. 여기 상황을 보셨으니 대책을 세워야 할 것 아닙니까? 한국에 가서 이것저것 고민하고 기계도 알아봐 주세요. 저도 저 나름대로 알아보고 한국에 갈 테니 그때 상의해서 결정하고 같이 넘어오세요.”

권기남이 답을 하지 않자 진혁이 결국 역정을 냈다.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잖아요?”

“한 가지만 약속해 주라. 꼭 데리고 돌아오겠다고.”

“안 오신다고 해도 묶어서라도 데리고 올 테니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또 공장장님 부려 먹는 데는 일가견이 있잖습니까?”

“자랑이다.”

핀잔을 하면서도 얼굴이 펴진 권기남이 씻으러 갔다.

* * *

마르와의 약혼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요르단에 도착하자 모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이집트에서는 카심과 소마야가 왔다.

핫산은 일 때문에 남아 있다고 했다.

두바이에서는 갈리, 하마드, 아자데와 마르와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도 축하해 주러 먼 길까지 와 줬다.

진혁은 갈리에게 모든 경비를 회사에서 지원해 주라고 지시했다.

왕궁에 도착한 진혁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하게 준비된 약혼식이라 간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웬만한 결혼식보다 더 성대해 보였다.

축하객들을 위해 왕궁을 개방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휴우, 대단하네요.”

“명색이 왕가의 약혼식이지 않습니까. 마르와에게 가 보셔야지요.”

“먼저 가 계십시오. 전 들를 곳이 있어서요.”

갈리와 헤어진 진혁은 라이나 왕비를 찾아갔다.

평상복 차림을 즐기는 라이나였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이 궁중 예복을 입어야 해서 치장하느라 바빠 보였다.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괜찮으니 들어오세요.”

예복을 손질 받고 있어서 서서 대화를 나눠야 했다.

“식이 끝나면 시리아 난민 문제로 바로 국왕 폐하를 따라 외국에 나가야 해서 지금밖에 시간이 없어요. 로힝야 난민들을 위한 공장 매입 건은 잘 처리됐나요?”

“매입 신청서를 제출하고 왔습니다. 특별한 사정만 없다면 제가 받게 될 겁니다.”

“그럼 이제 한시름 놓은 건가요?”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진혁의 모습에 라이나 왕비가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매입 자금이 부족하면 제가 어떻게든 구해 볼게요.”

“돈이 아니라 매입할 방직소가 문제입니다. 황마라는 제일 싼 원단을 생산하던 곳이라 도저히 채산이 맞지 않습니다. 게다가 기계고 건물이고 다 낡았습니다. 고쳐 써야 할지 다 허물고 새로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허물고 새로 시작하세요.”

“……?”

낯선 목소리에 진혁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라이나 왕비가 예복을 손질하는 이를 소개했다.

“수잔나 마리아 디자이너세요. 이쪽 계통에서는 유명하신 분이에요.”

“서진혁입니다.”

“전 다른 부분은 몰라요. 하지만 황마는 아니에요. 그건 원단이라고 부르기도 창피한 물건이에요.”

“저도 압니다. 그렇다고 어떤 제품을 생산할지도 정하지…….”

“데님으로 하세요. 앞으로는 그게 대세예요. 됐습니다. 전 디나 공주님께 가 볼게요.”

“수고하셨어요.”

자기 말만 하고 떠나는 마리아의 모습에 진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불쾌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예술인들이 원래 괴팍하잖아요.”

“압니다만 좀 당황스럽네요.”

“원래 자신의 일 외에는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인데 난민을 돕는다고 해서 그나마 말해 준 것 같아요. 실력 있는 디자이너라 허투루 한 말은 아닐 거니 고려해 보세요. 나도 림 공주에게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저도 마르와에게 가 봐야 합니다. 축하드리고 나중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라이나 왕비와 헤어진 진혁은 핸드폰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데님에 대해 조사해 줄 적당한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 차갑게 대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 정도는 서로 이해해 줄 사이였다.

* * *

부산 김해 공항에 도착하자 박이동이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가방부터 받았다.

“약속은 잡았습니까?”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공장장님은 그쪽으로 바로 오신다고 했습니다.”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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