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61화 (161/307)

161화. 시작은 데님

차를 타고 가면서 박이동이 보고를 했다.

“ETC는 국내 최초로 청바지 원단의 개발 및 생산에 성공한 데님 전문 업체입니다. 의류 전문 업체였던 성창 기업의 데님 사업부를 황영재 대표가 자산 양수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습니다.”

한지철에게 전화해서 데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ETC를 추천했었다.

박이동에게 즉시 조사를 시키고 넘어오는 길이었다.

“작년까지 적자 상태였는데 올해는 매출 500억 원의 흑자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2008년부터 추진해 온 베트남 공장이 작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탓이라고 합니다. 비상장 회사로 황영재 대표와 특수 관계인이 지분의 45%가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장 설립을 추진한 연도와 생산 연도 사이가 6년으로 상당히 긴데, 이유가 뭡니까?”

“……죄송합니다만 그것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제품에 대한 시장 반응은 어떻습니까?”

“품질 기준이 까다로운 유니핏이 메인 공급처로 활용할 정도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총 생산의 90%가 미국, 유럽,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내실이 튼튼한 강소 기업이었다.

아쉬울 게 없는 상황이라 협상이 쉽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산에 위치한 본사는 외관부터가 깔끔했다. 흰색 페인트의 슬라브 건물에 테두리는 파란색으로 산뜻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변에는 잡풀이 한 포기도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권기남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음에 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황영재 대표는 50대 후반으로 약간 살이 찐 데다 이마가 벗겨진 후덕한 인상이었다.

복장도 청바지에 검은 톤의 데님 재킷을 걸치고 있어 소탈한 느낌마저 들었다.

“서진혁입니다.”

“황영재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일반 국민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진혁이라 사업가인 황영재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차가 나오자 황영재가 먼저 말했다.

“한지철 상무님과는 태후 패션에 원단을 납품하면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분의 부탁이라 약속은 잡았지만, 저는 회사를 팔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구경하시고 돌아가십시오.”

“전 회사를 인수할 생각으로 온 게 아닙니다. 하청 업체로 받아 주십사 부탁드리러 온 겁니다.”

“하청업체요?

황영재가 일부러 딱딱하게 지었던 표정을 지우자 황당함이 대신했다.

세계 곳곳에서 성장하는 알라딘 그룹의 가치는 예측이 불가했다. 진혁은 최근 이집트 가스전 발굴로 25조 원에 가까운 자산을 가진 갑부 중의 갑부였다.

게다가 대통령과 수시로 독대하며 농어촌 지원단장으로 동행 사업을 진두지휘하고 있고, 주명근 명예 회장으로부터 유일하게 인정받아서 TG 그룹의 경영자를 갈아치울 정도의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한낱 하청업체로 받아달라고 하니 놀라지 않으면 그게 이상했다.

“꼭 좀 받아 주십시오.”

“받아 주시라요.”

진혁이 고개를 숙이자, 권기남이 절박한 눈빛으로 같이 고개를 숙였는지 머리가 테이블 밑에까지 내려가 있었다.

박이동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다가 급히 따라 숙였다.

“아니, 회장님, 이러지 마십시오.”

“그만큼 절박해서 그렇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도와주시라요.”

다시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황영재가 급히 손을 저으며 말했다.

“일단 사정부터 들려주십시오.”

진혁이 가방에서 스크랩 철을 꺼내 황영재가 보기 좋게 펼쳐 보이며 말했다.

“방글라데시 남부에 로힝야족이라는 난민들이 살고 있습니다.”

진혁이 그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알려 주었다.

스크랩 철에는 조난단이 낸 기사는 물론 최근 언론 보도 통제에도 불구하고 개인 블로그를 통해 세상에 알리고 있는 용감한 기자들이 찍은 사진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희망을 심어 주려고 학교까지 세워 가르치긴 했지만 난민이라고 취업을 못 하게 합니다. 겨우 국영 방직소를 인수하는 조건으로 길을 열었는데, 건물도 오래됐고 기계도 노후화되어 도저히 고쳐 쓸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헐고 다시 지어야 하는데 어차피 도와줄 거 제대로 된 제품을 생산해서 인정받게 해 주고 싶어서 고부가가치 제품을 찾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현재 난민수가 50만인데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사장님의 결정에 그들의 목숨이 달려 있습니다.”

“살려 주시라요.”

다시 진혁과 권기남이 고개를 숙였는데 황영재가 이번에는 말리지 않았다.

아니, 다른 생각을 하느라 그러지 못했다.

간절한 시선을 받으며 한참을 생각한 황영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차라리 회장님이 회사를 인수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인수를요?”

처음과 완전히 다른 황영재의 제안에 놀라 되물었다.

“죄송합니다. 대기업들이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을 온갖 방법으로 빼앗아 가는 것을 봤기에 회장님의 뜻을 오해했습니다. 사실 회사에 자금의 여유가 없습니다.”

“사업이 잘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잘됩니다. 지금 상태로도 두 배 이상의 매출을 올릴 자신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업은 돈이 전부는 아니잖습니까. 회장님은 그 말을 이해하실 겁니다.”

황영재가 자신의 굴곡진 삶을 들려주었다.

고등학교 시절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구제 청바지를 우연히 얻어 입었던 게 그의 삶을 바꿔 버렸다.

변호사가 꿈이었던 그가 섬유공학과를 나와 성창 기업에 입사한 것은 오직 데님 때문이었다.

데님 사업부장까지 승승장구하고 올랐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회사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 투자를 해 주지 않았다.

결국 황영재는 사재를 털고 빚을 내어 데님 사업부를 인수해 지금의 회사를 세웠다.

당시는 급격히 상승한 국내 인건비 부담으로 너도 나도 해외에 공장을 세우던 시기였다.

황영재가 선택한 곳은 베트남이었다.

“투자 시작 시점인 2008년에는 국제 금융 위기가 시작된 데다 베트남의 정치 불안까지 겹쳐 공장 건설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산 기반이 없으니 매출은 줄고. 연속적인 적자에 많은 가족들이 데님을 향한 열정을 뒤로 하고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참담한 심정을 회장님은 아실 겁니다.”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는 황영재를 보면서, 박이동의 보고를 받으며 이상하게 느껴졌던 부분이 이해가 됐다.

그때 갑자기 황영재가 옆에 쌓아 놓은 데님 원단을 한 장씩 들어 보였다.

“이것은 다이어트 데님입니다. 신체의 유익한 원적외선이 림프계의 순환을 도와 셀룰라이트를 분해해 다이어트에 도움이 됩니다. 이건 아이스 데님으로 냉감은 물론 냄새와 습기를 제거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습니다.”

황영재의 설명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만큼 쌓여 있는 원단이 많았다.

비전문가가 들어 봤자 알 수 없는 내용들이라 권기남과 박이동은 이내 지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혁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듣고 있었다.

이해해서가 아니었고 설명을 듣는 것도 아니었다. 열기 가득한 얼굴로 신명나게 설명하는 황영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권기남이 기계에 미쳤다면, 그는 데님에 미친 사람이었다.

“친환경 데님은 지속 가능성과 환경을 생각한 데님으로 천연 면화를 사용해 친환경 제품입니다. 이건 자체 개발한 저오염 데님입니다. 염료를 최소만 사용해서 물 사용량 감소와 에너지의 절감, 이산화탄소 배출도 50%나 줍니다.”

긴 설명을 마친 황영재가 입이 마른지 물을 마시고 물었다.

“그런데 회장님, 이것 중에 몇 가지나 제품화되었는지 아십니까? 채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시장성이 없는 겁니까?”

“아닙니다. 업체마다 원단만 만들어 달라고 사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럴 능력이 되지 못해서 이렇게 잠자고 있습니다.”

제품은 아이디어만 가지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었다. 공장을 세우고 생산에 들어갈 자금력이 있어야 했다.

“베트남 공장이 정상 가동되고 매출이 오르자 그동안 거들떠도 보지 않던 투자 회사나 벤처 캐피탈에서 찾아와서 투자금을 내놓겠다고 합니다. 잠시만요.”

황영재가 갑자기 일어나 캐비닛에 가서 데님 원단 하나를 가지고 와 펼쳐보였다.

“최근에 개발한 ‘4Way Denim’이란 겁니다. 기존 2Way에 비해 두 가닥이 더 들어가서 엄청나게 튼튼합니다. 대를 이어서 입을 수 있는 제품이지요. 돈만 밝히는 놈들이라 빨리 입고 빨리 버려야 매출 증대가 된다며 이건 생산하지 말랍니다. 친화경 제품도 무조건 원가가 많이 들어간다며 못 하게 할 겁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돈만 밝히시는 분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회사를 인수해서 키워 주십시오. 전 좋은 제품을 만들겠습니다.”

황영재가 간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진혁은 쉽게 승낙할 수 없었다. 느닷없는 제안이라 전혀 검토가 되어 있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황영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섬유 산업은 사양 산업이라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데님 원단은 쉽게 흉낼 수 없는 소재로 정경, 염색, 해사, 호부, 제직, 모소 등 전문적인 필수 공정과 다양한 선택 공정으로 진입 장벽이 높은 시장 중 하나입니다. 품질을 인정받아 우리 제품은 중국 제품에 비해 20%나 비싸게 받고 있습니다.”

“…….”

“대구의 섬유 공단은 인적이 끊긴 지 오래입니다. 저임금을 쫓아 해외로 나간 수출업자들은 중국산 저가 공세에 밀려 임금이 더 싼 나라로 이리저리 떠도는 섬유 난민이 되어 있습니다. 회장님은 어려운 농어민을 위해 동행 사업을 시작하셨잖습니까? 제발 저 같은 불쌍한 섬유업자들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간절한 심정의 황영재가 꺼낸 ‘동행’이란 단어가 진혁의 마음을 움직였다.

“자금은 얼마나 필요합니까?”

“200억이면 됩니다. 베트남 공장을 원단부터 데님 봉제, 워싱까지 아우르는 원스톱 생산 라인으로 만들면 수직 계열화된 밸류 체인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250억 투자하겠습니다. 나머지 50억은 R&D에 사용해 주십시오. 방글라데시 공장 건설은 개인적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바로 경영권 인계 작업을 진행하겠습니다.”

“아닙니다. ETC 경영은 황 사장님이 계속 맡아 주십시오. 전 방글라데시 사업에만 집중할 겁니다. 투자 방식은 신주인수권부 사채로 하고 주식수 산정은 10년 후로 합시다.”

“회장님.”

황영재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투자금을 대주면서 경영권을 인정해 주는 것도 모자라 이런 파격적인 조건을 먼저 제시하는 것에 감동했다.

신주인수권부 사채는 현재 가치를 주식수로 산정해 미래에 성장하면 이익을 공유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진혁은 미래에 대한 이익을 포기한 채 순수하게 도움을 주려고 했다.

“지금도 열심히 하시는 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죽기 살기로 하셔야 할 겁니다. 동행 사업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제주 동행이 성공한 영향이 컸습니다. 단순히 ETC가 아니라 희망을 잃어버린 난민들, 개발 도상 국가 국민들, 폐업 위기에 몰린 섬유 업자들을 생각하셔서 반드시 성공하셔야 합니다. 그게 동행을 입에 올린 사장님이 짊어져야 할 짐입니다.”

“데님만 보고 살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반드시 성공시켜서 회장님의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방글라데시 공장에서 어떤 제품을 생산할지, 어떤 기계가 필요한지 검토해 주십시오. 단, 얼마 동안 생산량은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다들 초보자들이라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진혁의 우려에 황영재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베트남 공장에서 일하시는 한국 기술자들은 최소 25년 경력을 가지신 장인 같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을 보내 지원하겠습니다.”

“그래 주시면 큰 힘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방글라데시의 공장이 얼마나 빨리 생산할 수 있느냐는 ETC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여기 박 실장님이 조만간 그룹의 유통 전문가들과 함께 와서 판매하시는 제품을 꼼꼼히 살펴볼 겁니다. 알쇼핑을 통한 판매를 지원하려고 하는 것이니 부담 갖지 마시고 대하시면 될 겁니다.”

황영재의 입이 함지박하게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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