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가족과 함께
그날 서진혁과 ETC 사이에 업무 협약서가 체결되었다. 진혁이 250억을 투자하고 신주인수권부 사채를 받기로 한 것은 이미 논의됐던 내용대로였다.
황영재는 이제 그토록 원했던 원단 제작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됐다.
황영재가 공동 대표라도 등재하겠다고 했지만 진혁은 끝까지 거부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후 4시쯤 서울에 도착한 진혁은 바로 집으로 갔다.
한 달 동안 혜주를 보지 못했다.
게다가 회사로 가면 다들 자신 때문에 퇴근을 못 할 게 분명했다.
문을 열어 주는 지민의 얼굴이 왠지 지쳐 보였다. 얼른 선물을 건네주고 안으로 들어가 소리쳤다.
“혜주야, 아빠 왔다.”
“아빠, 아빠.”
“어디 보자, 우리 예쁜이. 그동안 엄마 말씀 잘 듣고 잘 놀았어?”
“응. 엄마 말 잘 들었어. 재미있었어.”
“말을 잘 듣기는. 고집 부리고 떼썼잖아?”
뒤에서 들리는 지민의 말에 짜증이 묻어났다.
“엄마 미워. 으앙!”
“괜찮아. 아빠가 엄마 혼내 줄게. 혜주야, 뚝.”
“자꾸 그렇게 오냐 오냐 하니까 애가 버릇만 나빠지잖아요.”
“왜 애한테 화를 내고 그래?”
“당신도 하루 종일 애만 봐 보세요.”
꽥, 소리치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에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결국 거실에서 놀아 주다가 혜주의 성화에 놀이터로 나왔다.
몇 번 들어가자고 꼬셔 봤지만 노는 재미에 팔린 혜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아직 아이라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혜주야!”
“할무니! 할무니.”
“아이고, 이 손 더러운 것 좀 봐. 어여 들어가서 씻자.”
“다녀왔습니다.”
“서 서방이 나와 있었네. 지민이는?”
“피곤한 것 같아서 쉬라고 뒀습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일만 하던 사람이 하루 종일 집에서 애만 보고 있으니 답답한 게지. 신랑이라고 매일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진혁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대로 집에 들어가서 혜주와 함께 욕실로 들어가 같이 씻고 나왔다.
지민이 장모님과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언제 화냈냐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참 여자는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김세동이 퇴근해 돌아오자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어 보는 집 밥이라 꿀맛이었다.
두 공기를 비우는 진혁의 모습에 김세동이 혀를 찼다.
“자네는 밥 먹으러 집에 들어오나?”
“…….”
“왜 잘 먹는 사람에게 애먼 소리를 해요. 난 예쁘기만 하고만. 많이 먹게.”
“당신이 이렇게 잘 챙겨 주니까 집 구해 나갈 생각은 안 하고 눌러 살잖아.”
“넓은 집 놔두고 왜 나가 살아요. 나도 혜주랑 혜주 엄마가 있어 적적하지 않고 좋은데. 하긴 하루 종일 밖에 나가 있는 당신이 뭘 알겠어요.”
박연심이 김세동의 입을 막고 진혁을 바라봤다.
“그냥 하는 소리이니 마음에 두지 말고 편하게 있게.”
“고맙습니다, 장모님.”
원래는 집을 구하는 동안만 있기로 했는데, 지내 보니 이게 편했다.
40평대라 넓고, 자신이 외국에라도 나가면 혼자 혜주와 있을 지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혜주의 교육에도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좋았다.
식사가 끝나고 여자들이 치우는 동안 진혁은 김세동과 차를 마셨다.
“또 나가 봐야지?”
“굳이 일찍 갈 이유가 없으니 며칠간 국내에 머물다가 건너갈 생각입니다. 그 일이 끝나면 방글라데시에도 들렀다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최대한 일찍 돌아오겠습니다.”
“가정과 일. 대한민국, 아니, 세계의 모든 가장이 평생 안고 갈 숙제지. 자네만의 고민이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일찍 올 생각 말고 확실히 마무리 짓고 와. 그때는 또 가정에 충실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아니네. 차 마시게.”
진혁은 김세동이 하다 만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집트 가스전 개발권 사업자 선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거제의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경영 상황이 어려워지자 대형 조선소가 자구 노력의 일환으로 하청을 줄이고 직영 체제로 전환했다.
갑자기 일감을 받지 못한 협력 업체 사장이 결국 부도를 맞고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크레인에 올라간 노동자 대표들이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청와대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었다.
김세동이 그 일을 언급하려다가 부담을 줄까 봐 말을 멈춘 것이 분명했다.
동화책을 읽어 주며 혜주를 재운 진혁이 침실로 들어가자 지민이 누워서 책을 읽고 있다가 덮었다.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는데 화부터 내서 미안해요.”
“고생 많아. 내가 좀 더 신경 써야 했어.”
“당신이 나가서 무슨 일을 하고 다니는지 다 아는데요. 결혼 전에 이야기했듯이 속 좁은 여자 아니니까 걱정 말고 소신껏 하고 오세요. 혜주랑 기다리고 있을게요.”
“고마워. 며칠간 있을 테니 혜주랑 같이 강릉도 다녀오고, 할랄 여행도 들릅시다. 이모님한테도 같이 가고.”
“정말요?”
“오전에 사무실에 들러 잠깐 보고만 받고 나면 특별한 계획은 없으니 오후에 출발합시다.”
“고마워요.”
진혁은 다가오는 지민을 안아 줬다. 혜주도 중요하지만 지민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 * *
다음 날 동행 사무실부터 들렀다.
진혁의 예상대로 텅 비어 있던 공간들이 하나씩 채워져 있었다.
사무실과 상담실, 그리고 전시실에는 각 동행 센터에서 만든 제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곳도 시식은 가능하지만 판매는 하지 않았다.
거기다 기도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우상우와 마주앉자 물었다.
“할랄 인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각 센터별 주력 농산물은 인증을 마쳤고 추가 인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잘되고 있군요.”
“그리고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
우상우가 자랑하듯 말했다.
“강화 동행 센터에서 몇 개 센터와 연합해서 동양 항공 기내식 납품 업체인 새로미 푸드 서비스와 도시락 공급 계약을 맺었답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발 빠르게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잘됐군요. 사업은 타이밍의 싸움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들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외국인 학교 쪽 납품 계약을 따내려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나쁜 방법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분위기에 쓸려 이리저리 몰려다니면 득보다 실이 많습니다. 경쟁이 치열하면 가격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어렵습니다. 선의의 경쟁은 좋지만 자칫 동행 센터끼리 얼굴 붉히는 일도 발생할 수 있고요. 세상은 넓고 팔 곳은 많습니다.”
우상우가 침울한 얼굴로 답했다.
“사업가인 회장님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농사만 짓던 사람들이라 그걸 알면서도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내가 능력을 키워서 해결하는 방법, 그리고 능력이 있는 사람을 이용해서 답을 구하는 방법. 전자가 안 되면 얼른 후자의 방법을 찾아봐야지요. 무슬림 관광객을 겨냥한 한류 관광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 혜주 엄마입니다.”
“……!”
“처음에는 기도실과 할랄 식당의 부족으로 인해 크게 확대시키지 못했지요. 기도실은 제가 만들었고 도시락은 강화 동행 센터에서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어디까지 진행됐고 어떤 계획까지 세웠었는지 알면 다른 동행 센터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을까요? 이번 기회에 대표님과 여기 동행 사무실의 존재 이유를 확인시켜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대표 직함을 맡긴 했는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나 고민만 많았는데 말씀을 들으니 감이 옵니다.”
우상우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진혁의 존재가 너무 강력했기에 스스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것은 그의 기를 살려 주면서 지민을 위하는 일이기도 했다.
“지킴이들은 잘하고 있습니까?”
“젊은 세대들이라 아이디어가 톡톡 튀어나옵니다. 무주 동행의 지킴이가 ‘촌집’이라는 카페를 개설했는데, 회원 수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답니다.”
“촌집요?”
“시골 빈집 정보를 공유한다고 합니다. 시골이라 변변한 중개업소도 없고, 서울서 먼 길을 달려갔더니 전화로 한 이야기와 달라서 실망했다는 불만이 많았습니다. 한때 지자체에서 시도를 했는데 관리 인력의 부족으로 유명무실해진 상황이었습니다.”
“그랬었군요.”
“지킴이들이 농가를 방문하다가 빈집 정보를 들으면 최대한 자세히 알아보고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촬영해서 올려놓는다고 합니다. 과도하게 인정비를 요구하는 나쁜 관행이 사라질 거라는 성급한 칭찬도 듣고 있답니다.”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정부 주도의 사업의 문제점은 참여자들의 적극성이 결여된다는 점이었다.
어차피 선발되면 열심히 한다고 돈이 더 나오는 것이 아니니 적당히 하게 된다.
그러다 정부 지원금이 끊기면 결국 촌을 떠나 다시 서울로 올라갈 게 불을 보듯 뻔했다.
이런 식의 적극적인 시도가 시골에 뿌리내리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몇몇 뜻이 맞는 지킴이끼리 퇴근 후나 주말을 이용해 혼자 사는 독거노인의 집을 수리해 주거나 일손을 돕는 봉사 활동도 하고 있답니다. 벽화그리기 사업을 하는 곳도 있고요.”
“그런 사회 활동은 지킴이에게만 맡기지 말고 동행 센터에서도 적극적으로 물품을 지원하고, 참여가 가능한 직원도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신임 농협 회장님이 찾아뵙겠다는 뜻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농협 회장이 바뀌었습니까?”
“아, 외국에 계셔서 모르셨겠군요. 농림식품부에서 농협에 대한 대대적인 감사를 실시했는데, 글쎄 농협 마트에서 외국산 농수산물을 5년간 1억 원어치나 팔았답니다. 그 책임을 지고 회장이 물러나 새로 임명되었습니다.”
“허참.”
“회장님처럼 기사를 본 농민들의 분노가 대단했습니다. 농민들을 위하겠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농협 조합원 탈퇴 운동까지 벌어질 판이었습니다. 신임 회장이 외국산 농산물을 추방하겠다고 강력하게 천명해서 겨우 진정되었습니다.”
우상우는 착각하고 있었다.
진혁이 탄식을 터트린 것은 농협의 행태에 분노해서가 아니었다. 재빨리 농협 회장을 잘라 책임을 피해 간 위정근 장관의 치졸함 때문이었다.
“외국산 농산물이 빠져나간 자리를 동행이 맡았으면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럼 정식으로 공고를 내라고 하세요. 동행은 절차에 따른 심사 과정을 통해 당당하게 납품할 겁니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면담 날짜는 언제로 잡을까요?”
묻는 우상우를 바라보는 진혁의 눈이 차가웠다.
“농어촌 지원단장은 장관급 인사입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은 농림식품부 장관입니다. 그 사람이 임명한 농협 회장까지 제가 상대하면 우 대표님의 상대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직원들은요. 동행의 위상이 그것밖에 안 됩니까?”
“……!”
“제가 자리는 드렸지만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우 대표님이 하시기 나름입니다.”
“큰 실수를 할 뻔했습니다. 제가 만나서 동행이 어떤 조직인지 똑똑히 알려 주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수고하세요. 참.”
일어나려던 진혁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각 동행 센터에 연락해서 지역 출신 연예인에 대해 조사하라고 하세요.”
“연예인을요?”
“동행 제품 홍보에 필요합니다.”
선동식에게 보고받은 내용을 들려주었다.
“할랄 인증에만 집중하다 보니 한류를 간과했습니다. 채린 씨만큼은 아니더라도 효과가 적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이후 진혁은 동행 사무실을 나와 알쇼핑으로 간 뒤 고용준에게 보고를 받고 노선기를 만났다.
그러고 집에 가자 지민이 이미 혜주를 예쁘게 단장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신이 난 것은 혜주였다.
“빨리 가, 빨리. 할부지 보고 싶어.”
* * *
강릉으로 가서 부모님에서 이틀을 보내고 돌아와 저녁에는 한지철과 희준을 만났다.
“고맙습니다, 선배님.”
“우리끼리 그런 말은 하지 말자. 지금 내 자리도 네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ETC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려는 진혁을 입을 막은 한지철이 말을 이었다.
“정 실장님은 한 달 전부터 카이로에서 지낸다는데 넌 여기 있구나.”
“저도 조만간 넘어가야 합니다. 때가 됐으니까요. 하시는 일은 어떻습니까?”
민감한 문제라 진혁이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주가 폭락 후 중국의 경기가 말이 아니다. 그 때문에 우리도 고전하고 있다.”
“주가는 경기를 선행하는 지표입니다. 중국은 더 이상 매력적인 시장이 아닙니다. 새로운 곳에 눈을 돌리셔야 합니다.”
“아는데 그게 참 말처럼 쉽지 않다.”
입맛을 다시는 한지철의 모습에 진혁은 오늘따라 말이 없는 희준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회사에 무슨 일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