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코리아 컨소시엄
“아니야. 실적으로 쪼이기는 마찬가지지만 그건 항상 있어 왔던 일이고. 그냥 요즘 컨디션이 좀 다운된 상태라 그래. 신경 쓰지 마.”
말과는 달리 희준은 회사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진혁이 뜨면서 희준이 그와 친구라는 사실도 알려졌다. 친분을 이용해 보려고 접근해 오는 사람들, 진혁과 비교하는 이런저런 뒷소문들…….
진혁에게 부담을 줄까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한지철이 먼저 떠나고 2차를 가자는 진혁의 제안을, 희준이 집에 일이 있다며 먼저 택시를 잡아타고 떠났다.
‘처제가 심하게 쪼나?’
두주불사하는 희준의 평소 모습이 아니었다.
* * *
다음 날은 출근하지 않고 점심은 할랄 여행에서, 저녁은 이모네 집에서 먹었다.
혜주는 어딜 가나 예쁨을 받았다.
이모가 혜주에게 선물을 사 준다고 데리고 나간 사이 진혁이 말했다.
“또 나가 봐야 해. 이집트로 갔다가 방글라데시까지 다녀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나랑 혜주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혜주가 빨리 커서 제 앞가림을 할 수 있어야 당신이 좀 편할 텐데.”
“걱정 마세요. 나도 이제 하루 종일 혜주에게만 매달려 있지는 않을 거라 스트레스가 덜할 거예요.”
“……?”
“우 대표님이 전화 주셨어요. 잠깐씩 나가 도와주기로 했어요. 그때는 엄마가 봐주시기로 했고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눈치 없는 우상우가 곧이곧대로 말했나 보다.
“당신이 행복해야 혜주에게도 좋고 나도 편하게 일을 볼 수 있어.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알았어요. 적당히 할게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는 게 기뻐요. 설레기도 하고요.”
지민의 환한 미소에 진혁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 *
카이로의 특급 호텔들이 때 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조흐르 가스전 개발권 입찰 때문이었다.
개발에 참여를 희망하는 기업 관계자들이 한 달 전부터 묵으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일찍 모여든 것은 상대의 전략에 따라 입찰 단가를 조절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겨우 몇백만 달러 차이로 수십억 달러의 프로젝트를 날려 버릴 수는 없었다.
치열한 정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스전 개발 방식에는 PNG 방식과 LNG 방식이 있다.
PNG 방식은 정제 시설까지 파이프라인을 연결해 뽑아 올린 가스를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LNG 방식은 뽑아 올린 가스를 압축해 액체 상태로 만든 뒤 선박 등으로 운반해서 판매처까지 가져다주는 방식이었다.
현지 분위기는 PNG는 중국 연합 컨소시엄이, LNG는 유럽 연합 컨소시엄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두 곳 중 한 곳이 개발권을 따낼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태후 그룹 입찰팀을 이끌고 온 정인영은 홀로 바에 내려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런 현장 경험은 처음이라,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 태후 그룹의 계열사인 태후 조선이 이곳에서는 그저 그런 회사 중 하나일 뿐이었다.
PNG로는 중국과 가격 경쟁이 안 된다는 판단하에 LNG 방식을 택했다.
태후에서 세계 최초로 건조한 FLNG(부유식 LNG)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FLNG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공장에 가까웠다. 당연히 일반 LNG 방식에 비해 생산 과정, 이동성, 비용 측면에서 장점이 많았다.
그러나 꿈에 부풀었던 정인영은 유럽 연합 컨소시엄의 면면을 보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LNG 관련 원천 기술을 보유한 업체들뿐 아니라 태후 조선에 이어 FLNG를 건조한 노르웨이의 고라사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로열티 절감에 따른 가격 경쟁력에 기술력까지 갖췄으니 태후 조선은 상대가 되지 않았다.
‘크…….’
입안에 털어 넣은 술이 썼다.
앞뒤로 꽉 막혀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스페이스 워커’ 첫 광고가 나가고 그룹 안팎으로 비난을 받았을 때 이후로 처음으로 느껴 보는 무력감이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얼굴이 있었다.
서진혁.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이곳까지 찾아와서 만났었는데.
솔직히 인영은 개발 위원장인 진혁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했었다. 하지만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
술병으로 향하는 인영의 손을 막는 이가 있었다.
“화난다고 막 먹으면 취합니다.”
방금 욕했던 바로 그놈.
서진혁이었다.
반가웠지만 속이 뒤틀려 있어 말이 반대로 튀어나왔다.
“남이사 취하든 말든.”
“결전이 코앞인데 취하면 안 되지요.”
“어차피 중국 연합이나 유럽 연합 컨소시엄 중에 하나로 갈 거잖아요? 의미 없어요.”
다시 술병으로 향하는 인영의 손목을 진혁이 꽉 잡았다.
“이러고도 당신이 태후 그룹 후계자입니까?”
“……!”
“당신이 포기하면 거제에 있는 태후 조선 직원들은? 그보다 더 많은 협력 업체 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어쩌라고요.”
“안 되는 걸 어떻게 해요?”
인영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녀도 안다. 지금 그들이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자신이 개발권을 따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는지.
작년에 이어 지금까지 수주한 게 없어 내년이면 작업할 물량이 없다.
잠시 노려보던 진혁이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와요.”
진혁이 데려간 곳은 VIP 룸이었다.
룸 안에는 머리가 벗겨진 중년 사내가 먼저 와 있었다.
“TG 중공업의 안태현입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넘어오느라 방금 도착했습니다.”
“서진혁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태후 그룹의 정인영 기획실장입니다.”
안태현과 정인영 모두 상대의 신분에 놀랐다.
경쟁 회사 인물이었다.
자리에 앉고서도 서로 눈치만 보는 모습에 진혁이 입맛을 다시며 안태현에게 물었다.
“현재 이집트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들으셨지요?”
“조흐르 가스전 개발 업체 입찰이 진행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서 회장님께 직접 들으라고 했습니다.”
“태후 조선에서 FLNG 방식을 준비했나 본데, 유럽 연합 컨소시엄의 면면에 놀라 중도 포기할 태세입니다.”
“진혁 씨!”
인영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아무리 사실이라도 경쟁사 사람에게 밝히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안 전무님께서 지금 하시는 일에 대해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우즈베키스탄 카쉬카다르야 지역에서 GTL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GTL이란 말에 인영의 눈이 커졌다.
‘Gas To Liquid’의 약자.
천연 가스를 그대로 냉각, 액화시키는 LNG 기술과 달리 GTL은 천연 가스의 단순 정제를 넘어 고부가 가치의 액상 석유 제품으로 변환시키는 진일보한 기술이었다.
진혁이 말했다.
“난 FLNG에 GTL을 올리면 좋겠어요. 그럼 FGTL이라고 해야 하나. 기발한 생각 아닙니까?”
기가 막힌 아이디어인데도 두 사람 모두 반응이 없었다.
“왜 그럽니까?”
“전화 좀 하고 올게요.”
“저도.”
인영에 이어 안태현도 핸드폰을 들고 나갔다.
극비인 독자 기술이라 경쟁사와 컨소시엄에 사용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 모습에 진혁이 혀를 찼다.
“쯔쯧……. 다른 데는 나라끼리도 뭉치는 판에 우리는 회사끼리 저러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들어왔다.
“아빠, 아니, 회장님이 허락하셨어요.”
“명예 회장님께서 적극 협조하라고 하셨습니다.”
“기술적으로는 문제없는 거지요?”
“상관없어요.”
“저희도 문제없습니다.”
안태현 답변에 제일 반색한 것은 인영이었다.
이제 해볼 만하다는 의욕이 생겼다.
“그럼 안 전무님이랑 상의해서 그렇게 수정할게요.”
“잠깐 기다려요. 한 사람 더 와야 합니다.”
진혁이 서두르려는 인영을 막았다.
얼마 후, 노크 소리와 함께 양복 차림의 사내가 얼굴에 땀이 가득한 채 들어왔다.
“헉헉……. 갑자기 연락받아서 늦었습니다. 오양 중공업에서 왔습니다.”
오양 중공업은 한국의 빅3 조선업체 중 마지막 남은 한 곳이었다.
오양 중공업이 건조하는 선박은 자체 개발한 공기 윤활 시스템과 세어핀 기술로, 공기와 물의 저항을 줄여 연료가 10% 이상 적게 소비되어 인기가 높았다.
진혁이 세 사람을 보고 말했다.
“3사가 합심해서 코리아 컴소시엄의 제안서를 만들어 제출하도록 하세요. 책임자는 정인영 실장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들 하세요.”
인영은 일어나는 진혁을 따라가서 못 다 마신 술을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이 일이 더 중요했다.
* * *
마감일이 지나 심사 위원들이 각자 신청 서류를 검토한 후 첫 회의가 열렸다.
원형 테이블에 위원장인 진혁을 중심으로 우측은 이집트 정부, 좌측은 에리, 전면은 외부 심사 위원들이 자리했다.
진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각자 검토하신 결과를 말씀해 주십시오.”
“중국 연합 컨소시엄의 PNG 방식이 가장 적합한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유럽 연합 컨소시엄의 LNG 방식이 더 뛰어납니다.”
파흐미 석유부 장관의 말에 에리 측 인사가 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이후 양측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는데, 장단점이 극명한 방식이라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진혁이 다수결로 정하자는 의견에 각자 의사를 펴 이집트 정부와 에리는 각각 중국 연합과 유럽 연합으로 결정했다.
외부 인사는 의견이 갈렸다.
말렉 회장은 이집트 정부 편을, 앤서니와 크리스는 에리의 의견에 동조했다.
이집트 정부와 에리의 표가 4:5가 됐다.
에리 측은 희색이 만면한 반면 이집트 정부 인사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아직 케빈 챈들러가 남았지만 애널리스트라 에리의 의견에 동조할 것은 자명했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자, 케빈 챈들러가 진혁을 한번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PNG 방식의 중국 연합 컨소시엄을 선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봐, 케빈, 그건 아니지. LNG 방식이 경제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이잖아?”
예상치 못하는 말에 평소 친분이 있는 크리스가 당장 따지고 들었다.
“물론 단순 가스 사업만 보면 그렇지만, 이집트 정부의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것까지 따지면 파이프라인을 이용해 여기로 가져오는 게 효과가 더 커.”
“조흐르 가스전 개발자 선정에 왜 이집트 산업 발전 이야기가 나와?”
“중동의 많은 유전들이 해당국의 내부 불안으로 멈춘 것을 모르나? 당장의 수익성도 중요하지만 미래의 위험 손실도 고려해서 판단하는 게 맞아.”
두 사람의 의견이 맞서자 다른 이들까지 합세해서 자신들의 주장만 하니 결론이 나지 않았다.
분위기가 격해지자, 결국 진혁이 정회를 선언한 뒤 오후에 다시 모이기로 하고 정리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에도, 다음 날 오전에도 역시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집트 정부나 에리 모두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기존의 주장을 고수했다. 자신들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양보할 수 없었다.
외부 인사들은 상대적으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지만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진혁이 다시 나서야 했다.
“각자 식사를 하시고 3시에 다시 모이는 것으로 합시다. 내일이 발표일임을 아실 겁니다. 무조건 오후에는 결론을 내야 합니다.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강구해 오세요.”
회의장을 나온 진혁은 압델 대통령을 찾아갔다.
“아이고, 죽겠습니다.”
“어떻게 결론이 났나?”
“나긴요. 계속 같은 주장만 되풀이합니다. 오후에 다시 만나면 무조건 끝장을 봐야 한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심사 위원 선정을 잘했어야지.”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에리가 처음 주장한 심사 위원 수가 5:5였습니다. 제가 이집트 정부를 넣어야 한다고 해서 지금의 구도가 된 겁니다.”
“…….”
“말렉 회장을 넣은 것도 모자라 어렵게 케빈 챈들러를 설득해 5:5 동수라도 만든 겁니다. 그동안 이집트 정부는 뭘 한 겁니까? 어떻게 한 명도 포섭을 못 할 수가 있습니까?”
압델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계획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조반니 회장이 에리 측 심사 위원을 심사 당일이 되어서야 이집트로 들어오게 한 데다 한 방에 묵게 해서 접촉할 틈이 없었다.
진혁이 눈치를 보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