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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64화 (164/307)

164화. 일어서는 로힝야

“케빈 챈들러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냥 에리에게 맡기시죠. 그래도 로열티는 받지 않습니까?”

“그건 안 돼. 겨우 그깟 푼돈만 받고 넘겨줄 수는 없어. 정제해서 받는 개발 이익 수수료도 무시 못 해.”

개발 이익 수수료는 판매 대금에서 로열티와 탐사비를 제외하고 60%를 해당 국가에 내는 세금이었다. 당연히 원재료보다 제품화된 후의 판매 대금이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요즘 가스 생산량이 줄어들어 우리도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야. 무조건 우리에게 가져와야 해.”

이집트는 ‘아랍의 봄’ 이후 지속된 정정 불안으로 천연 가스 생산량이 최대치 대비 80%로 떨어져 있었다.

잠시 시간을 두고 진혁이 말했다.

“저에게 한 가지 묘안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 뭔가?”

반색하는 압델에게 코리아 컨소시엄의 개발 방식에 대해 들려주었다.

“FGTL 방식이면 고부가 가치의 액상 석유 제품으로 정제되니 개발 이익 수수료가 극대화될 것입니다. 부족분의 일부도 가져올 수 있고요. 무엇보다 해상에 정제 시설이 있으니 불순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을 일도 없습니다. 이집트 입장에서는 1석 3조의 획기적인 방식입니다.”

진혁의 현란한 말솜씨를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어리숙한 압델이 아니었다.

코리아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을 때부터 진혁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한 공작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그대로 내보일 만큼 어리숙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됐다. 이대로 두었다가 정말 케빈 챈들러가 돌아서면 큰일이었다.

압델이 얼굴에 억지웃음을 띄고 말했다.

“그런 좋은 방법이 있었군. 그리 된다면 우린 찬성이야. 문제는 에리가 받아들이냐는 것이지.”

“받아들일 겁니다. 아니,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나온 진혁이 이번에는 바로 조반니 회장을 찾아갔다.

조반니 회장은 시내 중심가의 세미라미스 호텔 스위트룸에 머물고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진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상황이 위험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협박당하신 것이오?”

예상대로 조반니는 자신이 대통령을 만난 것을 알고 있었다.

시치미를 떼고 진혁이 심각한 표정을 유지했다.

“심사 규정을 바꾸어 동수인 경우 위원장이 표를 행사할 수 있게 하겠답니다.”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압델입니다. 국제 사회의 비난에도 피의 숙청을 멈추진 않은 그가 이집트에서 못 할 일은 없습니다.”

조반니 회장의 얼굴이 당장 흙빛으로 변했다. 이대로 끝나 버리면 자신의 자리도 날아간다.

조반니는 진혁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묘수가 한 가지 있기는 한데…….”

“뭡니까?”

진혁은 다시 FGTL 방식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에너지 기업 회장이라 바로 알아들었다.

압델과 마찬가지로 코리아 컨소시엄이라는 말에 표정이 차가워졌지만 빠르게 지워졌다.

전부 빼앗기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얻는 걸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차악이지만 최악은 아니었다.

“서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문제는 압델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냐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해 봐야지요.”

확답을 하지 않고 다시 대통령 집무실로 돌아온 진혁이 조반니 회장의 결정을 알리고 아예 판매 비율도 정했다. 기선을 제압했을 때 나중에 분란이 될 부분을 정리해 버리는 게 나았다.

생산된 액상 석유 제품은 심사 위원 수의 배분 방식에 따라 진혁이 40%, 나머지 두 곳에서 30%씩 갖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다음 날, 기자 회견실에서 조흐르 가스전 개발권은 코리아 컨소시엄으로 결정됐다는 짧은 결과만 발표하고 진혁은 긴 이집트의 여정을 끝냈다.

* * *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진혁은 나즈마 총리와 계약서를 작성했다.

진혁의 예상대로,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는데도 진혁 외에는 신청하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상황을 정리한 뒤 샤물과 함께 서둘러 다카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탔다.

콕스바자르에 내리자 밤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장장님은 공장에 계십니다.”

“와 줘서 고맙다.”

“아버지는 편하게 눈을 감으셨습니다. 모두가 회장님 덕분입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은 노선기에게 밤방을 방글라데시로 불러들이는 문제를 상의했다.

권기남의 의욕은 알지만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는 없었다. 누군가 옆에서 보조해 줘야 하는데 밤방이 가장 적임자였다.

병을 앓던 밤방의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고, 동생들도 그동안 커서 각자 앞가림을 할 수 있을 거라며 이렇게 선뜻 와 준 게 고마웠다.

함께 난민 캠프의 학교로 갔다.

소식을 듣고 김연희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진혁의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진혁은 다독거려 주고 옆에 있던 로힝야 지도자 시에드 울라에게 고개를 숙였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약속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나누고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너무 오랫동안 소식이 없어 솔직히 반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미스 김의 연락을 받고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왔습니다. 아이들에게 희망이 단순히 꿈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이제 겨우 한 걸음 떼었을 뿐입니다.”

“그게 중요한 거지요. 무엇이든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건 조금 기다려 주셔야겠습니다. 공장이나 기계나 너무 낡아서 싹 다 헐어 버리고 새로 지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카로 가서 건설 회사부터 알아보고 최대한 서두르겠습니다.”

기쁜 소식을 알리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여기로 달려왔지만 준비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때 눈치를 보던 시에드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일을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로힝야에게요?”

“이곳으로 쫓겨 오기 전에 다 생업에 종사했던 이들입니다. 건축 관련 일을 했던 이들도 많습니다. 저도 작지만 건설 회사를 운영했었습니다.”

“이런.”

진혁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이주가 모두 끝나 이곳의 난민 수가 60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그들 중에 건축 관련 일을 했던 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데,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시에라가 말을 이었다.

“장비하고 기계만 구해 주시면 됩니다. 자식들을 위하는 일이니 다들 나서서 도와줄 겁니다.”

“돕는다는 정신으로 오는 거라면 일을 맡길 수 없습니다.”

“예?”

예상치 못한 거절이라 시에라의 표정이 당장 당황스럽게 변했다.

“노동은 신성한 겁니다. 그에 따른 대가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대신 대가를 받으면 그만큼 일도 확실히 해야 합니다. 자식을 위하는 마음은 제대로 된 공장을 지어 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희망은 아이들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어쩌면 어른들이 더 필요한지도 모르지요.”

이번에는 시에라가 스스로를 질책했다.

진혁의 말이 맞았다.

자신들도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아이들에게만 맡긴 채 포기하고 주저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진혁이 말했다.

“설계사도 있으시겠지요?”

“당연히 있습니다.”

“새로 짓는 공장에서는 데님이란 의류 원단을 생산할 겁니다. 그쪽 관련해서 일을 했던 이들도 모아 주십시오. 참, 버스 운전이 가능한 분도 알아봐 주십시오. 그리고 공장 관리를 했던 분도 필요하고. 이거 갑자기 일이 엄청 커져 버린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하.”

진혁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웃고 있었다.

단순히 아이들만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에라가 스스로의 길을 찾았다는 게 고무적이었다.

로힝야는 그에게 맡기고 자신은 계획에만 집중하면 될 것 같았다.

시에라와 김연희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진혁은 공장으로 갔다.

권기남이 웬 사내와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ETC 베트남 공장 최원섭 부장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둘러보니 어떻습니까?”

“기계나 건물은 고쳐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다 허물고 새로 지을 작정이니 그에 맞춰 준비해 주십시오.”

“공장장님께 그렇게 말씀 들었습니다만…….”

최원섭이 말끝을 흐리며 진혁의 눈치를 봤다.

일반적으로 상사나 오너는 자신의 생각에 반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은 아니었다.

“더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부담 갖지 말고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최 부장님이 전문가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일하실 분들이 무경험자들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부분 그렇습니다. 의류 공장에서 일한 경력자들을 모으고 있는데, 얼마나 모일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공장을 지을 때는 한 번에 짓는 게 효율적이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오히려 그게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데님 생산 기계는 상당히 고가입니다. 그전에 모든 기계는 굉장히 예민합니다. 초보자들이 함부로 사용했다가는 금방 망가집니다. 처음부터 제대로 다뤄야 합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숙련공을 데려온다면 그건 이 일을 시작한 취지와 어긋나게 된다.

고심하는 진혁에게 최원섭이 말했다.

“회장님이 왜 이 일을 하시려고 하는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가지 방도를 생각해 봤습니다.”

“뭡니까?”

“제2공장 건물은 상대적으로 양호합니다. 물론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임시로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단 거기에 기계를 들여서 저희 기술자가 기술 전수를 하는 사이 제1공장을 지었으면 합니다. 그곳이 완공되면 기술을 익힌 이들이 건너가서 기계를 맡으면 됩니다. 그때 가서 제2공장 건물은 기계를 이설하고 창고로 쓰면 됩니다. 경비가 조금 더 들겠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최선인 것 같습니다.”

진혁이 듣기에도 합리적인 방법 같았다.

그래도 확인은 필요했다.

“공장장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나도 그게 좋을 것 같다. 일이 조금 힘들고 번거롭겠지만 불상한 애들을 위해 하는 일 아니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좋습니다. 그렇게 하기로 하고 계획을 세워 주십시오.”

진혁의 허락이 떨어지자 최원섭과 권기남이 본격적인 실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숙소는 시내에 집을 하나 임대해서 이용하기로 했다.

이후에는 때때로 난민 캠프로 건너가 시에라, 김연희와 함께 각자 준비한 내용을 토대로 서로의 계획을 맞춰 보기도 했다.

* * *

어느 날 공장으로 의외의 인물이 찾아왔는데 정인영이었다.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당신 때문에 고생한 사람이 찾아왔으면 최소한 먼저 앉으라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땅바닥인데 앉을 수 있겠어요?”

주변은 허허벌판이었다. 차라도 마시려면 시내까지 나가야 했다.

정인영이 투덜거렸다.

“인터뷰에 질려서 도망쳐 왔어요.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지금 한국 언론은 정인영에 대한 기사로 도배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흐르 가스전의 개발 위원장이 진혁이기에 실낱같은 기대를 가졌던 국민들은 중국 연합과 유럽 연합의 등장에 크게 낙담했다.

그런데 정인영이 경쟁사를 설득해 코리안 컨소시엄을 구성하고 개발권을 따내자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속보까지 내보내며 열광했다.

일부에서는 진혁이 도와준 게 아니냐는 설이 있었지만, 인영은 시종일관 자신의 생각이었고 진혁의 개입은 없었다며 부인했다.

진혁의 당부 때문이었다.

개발 위원장이 특정 업체를 지원한 게 알려지면 문제가 커진다.

덕분에 인영은 ‘조선업계의 유관순’이라는 찬사까지 받고 있었다. 언론 인터뷰가 쇄도한 것은 당연했다.

“좀 잠잠해져서 바로 건너온 거예요.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닙니다. 많은 국민들의 생계가 달린 일이니 최선을 다해 주세요.”

“치. 알았어요. 그런데 여기서 또 사업을 일으키려는 거예요?”

진혁이 굳어진 표정으로 정인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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