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65화 (165/307)

165화. 정호영의 사정

“사업이라고 생각하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난민들을 돕는 겁니다.”

진혁은 로힝야족의 기구한 역사에 대해 들려주었다.

“안타까운 민족이네요. 그런데 60만이나 된다면서 딸랑 이 공장 하나로 되겠어요? 돌아가면 이곳에 공장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해 볼게요.”

“돈이 있다고 세울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 하나 받는데도 엄청 고생했어요.”

이번에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로힝야족에 대한 정책과 이 공장을 매입하는 데까지 고생한 일에 대해 들려주었다.

“어차피 놀고 있는 인력, 공장까지 세워주고 경제 활동을 하게 해 주겠다는데 왜 막아요?”

“여기 국민들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난리입니다. 공장 건설을 허가해 주는 것과 로힝야에게 일자리를 허락해 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나즈마 총리도 그런 국민들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어요.”

“어렵네요. 그럼 여기 공장 건설에 들어가는 비용이라도 대게 해 주세요.”

“이 일은 나 혼자서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인영 씨는 가서 조흐르 가스전 개발에 집중해 주세요. 그제 절 돕는 일입니다.”

진혁이 냉정하게 거절했지만 인영은 전혀 굴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에 대해 잘 알아 처음부터 거절당할 줄 알았다.

“당신을 돕겠다는 게 아니에요. 혼자서만 좋은 일 하지 말고 나도 난민들을 돕게 해 주세요.”

“…….”

“앞으로 더 늘어날 거라면서요. 혼자서 감당할 수 있어요?”

진혁은 답을 하지 못했다.

맞는 지적이었다. 혼자서는 감당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덥석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인영은 야심이 큰 여자였다. 지금 그녀를 받아들이면 당장은 도움이 되겠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짐이 될 게 분명했다. 그건 자신만이 아니라 로힝야에게도 좋지 않았다.

진혁이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인영이 타협안을 내놓았다.

“우리 그룹에서도 매년 사회 공헌 기금을 기탁하고 있어요. 이왕이면 보람된 일에 쓸 수 있게 해 주세요.”

“한 가지 필요한 게 있습니다.”

“말해 줘요.”

“태후 자동차에서도 버스를 생산하지요?”

“버스가 필요해요?”

“여기서 일하는 것은 허락받았지만 난민 캠프를 떠나 사는 것은 안 됩니다. 난민 캠프와 공장을 오고 가는 교통편이 필요해요.”

“알았어요. 돌아가면 최우선적으로 처리해 줄게요. 바쁜 것 같으니 그만 가 볼게요. 한국에 오면 연락 주세요.”

진혁이 돌아가려는 인영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천진홍 씨한테 알라딘 코리아의 고용준 사장을 만나 보라고 하세요.”

“무슨 일 있어요?”

“함께 준비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연락은 해 놓을게요. 자세한 것은 만나 보면 알 겁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돌아서 가는 인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

진혁은 하나를 주면 두 개로 돌려주는 사람이었다.

* * *

한국으로 돌아온 정인영은 정진호부터 찾아갔다.

“어서 와라. 여행은 즐거웠냐?”

반갑게 맞는 정진호의 안색은 그 어느 때보다 좋았다.

정인영에 대한 찬사는 그룹 회장 입장에서도, 아버지로서도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정호영을 내치고 그녀를 후계자로 낙점한 자신의 판단에 맞았다는 점도 기분이 상승하는 데 한몫했다.

“유익한 여행이었어요.”

“다행이다. 어디를 다녀온 거냐?”

“방글라데시였어요.”

“방글라데시? 거길 간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진혁 씨가 그곳에 있어서요.”

“……그놈이 그곳에서 뭘 하고 있더냐?”

“로힝야 난민들을 돕고 있었어요.”

인영은 로힝야족과 진혁이 하는 일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놈 참……. 진짜 알다가도 모를 놈이다. 여기저기 벌여 놓은 일이 얼마인데 한가하게 난민들을 돕고 있다는 말이냐?”

인영은 다시 한번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정진호도 진혁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태산 같아 보였던 그가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애써 생각을 떨친 인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항상 저희에게 사람 관리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세계의 모든 영웅들에게는 반드시 뛰어난 책사가 있다는 공통점도 말하셨고요.”

“그랬지.”

“이번 이집트에서 개발권을 따내는 것보다 더 큰 걸 얻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태후의 한계를 봤어요.”

“……!”

“세계 곳곳에 태후보다 훨씬 더 뛰어난 기업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그걸 인정하자 우리가 영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요.”

“흐음.”

정진호가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다른 이들이 자신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면 당장 호통을 쳐서 내쫓았을 것이다.

아프지만 사실이었다.

대한민국에서야 인정받지만 세계에 나가면 그저 그런 기업 중에 하나일 뿐이었다.

인영이 말을 이었다.

“태후 그룹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니 길이 보였어요. 영웅이 될 수 없다면 영웅을 좇는 것도 방법이겠구나 하고요.”

“……?”

“진혁 씨는 이제 영웅이 되었어요. 우리가 감히 넘볼 수 없을 만큼 컸어요. 이제 그걸 인정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태후는 지금의 자리도 유지하기 힘들어요. 이번 일만 해도 그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태후 조선의 정리 절차를 밟고 있었을 거예요.”

“…….”

“코리아 컨소시엄에 참여한 TG와 오양은 진혁 씨가 연락을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스스럼없이 머리를 조아렸어요. 우리도 이제 전략을 바꿔서 그를 항상 지켜보다가 필요한 순간에 먼저 다가가 우리를 끼워 달라고 부탁해야 해요. 그게 그룹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정인영의 굳은 표정을 보는 정진호는 대견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아팠다.

딸은 그룹을 진정으로 위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때 배우자로 생각했던 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고 말하는 딸의 인생이 기구함에 가슴이 쓰렸다.

정진호가 입을 열었다.

“네 의견에 동의한다. 하지만 너나 내가 그 일에 전념할 수는 없다.”

“적임자가 있어요.”

“누구냐?”

답을 하는 대신 정인영은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쭈뼛거리는 모습으로 들어온 것은 태후 자동차 중국법인 사장으로 가 있던 정호영이었다.

“아니, 네놈이 감히 여길……!”

“제가 불렀어요.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인영의 말에 정진호가 입을 닫자 정호영이 인사를 하고 와서 앉았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중국에 있으면서 많이 깨달았습니다. 제가 얼마나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태후와 제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도 느끼고 왔습니다. 태후의 성장을 돕게 해 주십시오.”

고개를 깊이 숙이는 정호영을 바라보는 정진호의 눈빛에는 애잔함이 담겨 있었다. 그 역시 왜 정호영을 불러들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인영이 말했다.

“오빠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요.”

“무엇이든 말해라. 뭐든 하마.”

“진혁 씨를 맡아 주세요.”

“서진혁을?”

정호영의 눈이 커졌다. 인영이 들어오라고만 했지,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지 않았었다.

서진혁이라면 자신과 여러 번의 악연으로 얽힌 최악의 상대였다. 처음에는 그저 발가락의 때만도 못한 미천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가 얼마나 큰 인물이 되었는지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정호영이 시선을 내렸다.

“미안하다. 서 회장은 이제 내가 감히…….”

“오빠가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 그를 상대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대한민국에서 진혁 씨를 상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의 환심을 사 달라는 거예요.”

“하지만 나는…….”

“중국에서 오빠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끼셨다면서요. 그들이 오빠에 대해 관심이나 있던가요? 진혁 씨도 마찬가지예요. 과거의 일에 연연할 정도로 좁은 사람이었다면 오늘같이 크지도 못 했을 거예요. 그리고 이집트의 일도 도와주지 않았을 거고요.”

“…….”

“물론 오빠를 좋게 보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 정도도 이겨낼 수 없다면, 미안하지만 오빠의 도움은 필요 없어요. 그냥 중국으로 돌아가세요.”

인영의 싸늘한 말에 정호영은 물론 지켜보는 정진호도 안색이 굳어졌다.

하지만 말리지는 않았다. 스스로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정호영이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알겠다. 그 일을 맡으마.”

“진혁 씨는 지금 방글라데시에서 로힝야 난민들을 돕고 있어요. 거기로 가 주세요.”

인영은 지금 진혁이 하는 일에 대해 들려주었다.

다 듣고 난 정호영이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거기에 공장 짓는 것을 도우면서 환심을 사고, 그 일을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갈 때 따라가는 말이냐?”

“오빠가 공장이 지어지는 그 짧은 기간에 진혁 씨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진혁 씨가 움직인다고 해도 오빠는 그냥 거기서 계속 로힝야족을 돕고 계시면 돼요.”

“계속?”

“네, 계속. 진혁 씨는 반드시 돌아올 거예요, 거기로.”

정인영의 단호한 음성에 정호영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정진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물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있느냐?”

“진혁 씨가 걸어온 길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우리가 포기한 카이로 지사를 이용해 이집트 시장을 장악하더니 중동의 무슬림 시장을 개척했어요. 그리고 그걸 이용해서 동남아시아의 무슬림 시장까지 영역을 넓혔고요. 동행사업을 봐도 마찬가지예요. 처음에는 사정이 딱한 제주 양배추 농가를 돕기 위해 시작했던 일이 얼마나 커졌는지 보면 알 수 있어요.”

“……!”

“진혁 씨가 사업을 넓혀 가는 데는 일정한 방식이 있어요.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지만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키워 가요. 지금은 비록 방글라데시 정부의 반대로 공장 하나로 시작했지만 분명 여기서 멈추지 않을 겁니다. 60만 명 이상의 로힝야 난민들이 거기에 있는 한 진혁 씨는 분명 돌아올 거예요. 그리고 그때마다 사업은 커질 거예요.”

인영이 말을 마쳤을 때는 정진호와 정호영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분석이 맞았다.

일반인들은 한계에 부딪히면 포기하거나 인정하고 안주한다. 하지만 진혁은 기발한 방식으로 한계를 극복해 가며 끝끝내 뜻을 이루고 말았다.

그가 로힝야 난민을 돕기로 결정했다면 이번에도 그들이 안정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영이 정호영을 보고 말했다.

“내게 진혁 씨 곁에 있는 것과 태후 그룹을 선택하라면 난 주저 없이 진혁 씨 곁을 선택하겠어요. 오빠가 그룹을 맡을 수만 있었다면 난 이미 방글라데시로 가 있었을 거예요.”

“……!”

“그를 돕는다는 둥 어설픈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는 오빠의 도움 없이도 잘해 나갈 사람이에요. 가서 직접 보세요. 진혁 씨가 왜 성공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는지. 배우고 또 배워 오세요. 오빠가 돌아오면 언제든지 제 자리를 내어 드릴게요.”

정호영의 눈가가 벌겋게 붉어져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없는 사이 인영이 성장하는 모습에 질투와 시기하는 마음이 있었다. 헌데 오해였다. 인영은 진심으로 자신이 성장해서 그룹을 맡아 주길 원하고 있었다.

정호영의 꽉 다문 입술이 그의 의지를 나타내고 있었다.

* * *

로힝야 난민들이 모두 나와 있었다.

남녀노소는 물론 갓난아이까지 엄마의 품에 안겨 눈을 반짝이며 도열해 있는 최신형 리무진 버스를 구경했다.

인영은 통 크게 최고급 버스를 열 대나 보내 줬다.

“희망 버스입니다. 로힝야의 희망을 싣고 난민 캠프 밖의 세상으로 함께 나아갑시다. 여러분의 세상을 여러분 손으로 일구시는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그날까지 저도 힘껏 돕겠습니다.”

“로힝야 만세!”

“서진혁 만세!”

난민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난민 캠프에 막 도착한 정호영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가슴이 찌릿한 느낌을 받았다.

벵골어를 모르기에 정확한 뜻을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내용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60만 명의 난민들이 내지르는 함성에는 절박함과 간절함에 담겨 있었다.

그들은 혼신을 다해 연단 위에 선 서진혁을 연호하고 있었다.

인영의 판단이 옳았다. 서진혁은 거인이었다. 쓰러트려야 할 상대가 아니라 보고 배워야 할 대상이었다.

50명씩 선발대를 태운 버스가 위세도 당당하게 난민 캠프를 벗어났다. 물론 운전도 로힝야 기사가 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떨렸다.

선두 차량에 탄 진혁의 눈빛도 깊어졌다.

‘어쩌면 이제 시작일지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