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모아서 한 방에
진혁의 따끔한 호통에 프라부 사장이 급히 입을 닫았다. 세계적인 가스 부자 중 한 사람이 진혁이었다.
분위기가 싸늘해지자 나즈마 총리가 다시 나서야 했다.
“서 회장의 생각을 말씀해 보세요.”
“GTL유를 사용하자는 게 제 계획입니다.”
“GTL유요?”
“GTL은 ‘Gas To Liquid’의 약자입니다.”
진혁은 천연 가스의 GTL 정제 방식에 대해 들려주었다.
“……이런 GTL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 연료는 일반 원유 정제 제품과 달리 황, 중금속과 같은 대기 오염 유발 물질의 함량이 매우 낮아 청정 연료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유럽 쪽 일부 항공사에서는 환경을 고려해 항공유로 사용하기 시작할 정도입니다.”
“놀라운 방식이군요. 프라부 사장님, 그럼 문제가 해결된 건가요?”
“GTL유를 사용하면 가능할 것은 같습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건설 원가 상승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제 계산으로도 20% 정도 추가 비용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순순히 시인하는 진혁의 모습에 나즈마가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물론 그에 따른 대책도 세워져 있겠지요?”
“소나르 공단 건설의 전제 조건으로 말씀드린 100킬로와트급 발전소 건설, 교량 및 가스 저장 시절 공사, 고속도로 확장 구간 공사까지 일괄로 처리한다면 그 정도는 줄일 수 있을 겁니다.”
“……!”
8억 달러 공사가 12억 달러가 되는 순간이었다.
놀란 표정의 프라부와 달리 이번에는 나즈마 총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서 회장의 계획대로라면 람팔 발전소 건설이 해결된다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나머지 공사에 들어갈 4억 달러는 우리에게 무리예요.”
“AIIB(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에 요청한 2억 달러 차관을 승인받게 해 드리겠습니다.”
“……!”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즈마 총리도 이번만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즈마 총리는 민간 발전소의 일환으로 바실라구 볼라 섬에 220메가와트급 복합 화력 발전소를 짓기 위해 아시아 인프라 투자 은행에 차관을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그걸 진혁이 알고 있는 것도 의외였지만 승인을 약속하는 것에 더 놀랐다.
“서 회장이 그걸 어떻게 승인해 주겠다는 건가요?”
“아시아 인프라 투자은행이 이슬람개발은행(IsDB)에 공동 투자를 제안해서 결정이 늦어진 거랍니다. 볼락 섬보다는 소나르에 세우는 게 건설 비용이 적게 든다며 좋아하더군요. 남는 금액으로는 가스 송수 파이프 용량을 확대하는 데 쓰겠다고 했습니다.”
나즈마 총리는 그제야 진혁이 중동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나머지 2억 달러는 어떻게 마련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한국 정부로부터 차관을 끌어올 생각입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공사를 한국 기업에게 맡긴다는 조건을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그건 안 됩니다.”
프라부 사장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인도 화력 발전이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은 전력이 필요한 이유도 있었지만, 인도 정부가 석탄을 수출하고 건설까지 참여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진혁의 말대로 하면 그 모든 걸 한국 정부가 가져가게 된다.
진혁이 물었다.
“정부 승인이 안 날까 봐 그러십니까?”
“…….”
“제게 들은 GTL 정제 방식에 대해 말씀하시고, 인도에서도 GTL유 생산이 가능하다면 그걸 수입해서 쓰는 것으로 하겠다고 하세요. 기술이 필요하다면 적극 돕겠다는 말씀도 함께하시면 될 겁니다.”
거침없는 진혁의 답변에 프라부가 눈만 동그래진 채 더 이상 반대하지 못했다.
인도 정부는 경제 발전과 더불어 늘어나는 천연 가스 수입량을 줄이기 위해 가스전 개발에 집중 투자하고 있었다.
GTL이라는 고부가가치 정제 기술이라면 그 파급 효과가 적지 않았다.
거기에 비록 석탄을 수출하지는 못했지만 GTL유의 판로를 미리 확보하는 것이니 오히려 이득이었다.
장관은 무조건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상황이 정리된 모습에 나즈마 총리가 말했다.
“프라부 사장님은 다시 계획을 세워 주세요.”
“알겠습니다.”
“히비불 청장님도 소나르 경제 특구 승인에 따른 준비를 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내 두 사람을 내보낸 나즈마 총리가 진혁을 보고 말했다.
“우리끼리 해결할 일이 남았지요?”
“전 전부 다 말씀드렸는데요?”
“저는 처음부터 로힝야 고용은 별개의 문제라는 뜻을 분명히 했었어요.”
“……압니다만 진짜 더 내놓을 게 없습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 주시지요.”
진혁이 솔직히 사정했다.
그도 나즈마가 로힝야를 걸고넘어질 거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나즈마 총리의 결단에 따른 일이라 자신이 뭐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게다가 계속해서 한 가지씩 더 요구하는 나즈마의 행태에도 질려 있었다.
나즈마가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를 지어 보이고 말했다.
“이번에는 그렇게 무리한 부탁이 아니니 걱정 마세요.”
“말씀해 보십시오.”
“이번 일을 서 회장이 맡아서 추진해 주세요.”
“예?”
“서 회장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이잖아요. 한국과 로힝야의 문제도 관여되어 있고요. 서 회장만 한 적임자가 없습니다.”
“인도 정부와 인도 화력 발전은 어떻게 하시고요? 그건 일개 사업가인 제가 나서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코 꿰이기 싫어서 진혁이 얼른 반대했다.
그렇다고 물러날 나즈마가 아니었다.
“자리를 맡으시면 되잖아요. 마침 지난번 일로 에너지 보조관 자리가 비어 있어요. 총리 자문 역이 좋을 것 같네요.”
“아시다시피 제가 여기 말고도 벌여놓은 일이 많습니다.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계속 내 옆에 있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여기에 와 있으면서도 한국의 농어촌 지원단장, 이집트의 조흐르 가스전 개발 위원장을 맡고 계시잖아요?”
“…….”
“로힝야 문제는 하루아침에 끝날 일이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맡겠습니다.”
로힝야라는 말에 진혁은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 정치에는 나즈마 총리가 한 수 위였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낭패한 표정으로 총리실을 나선 진혁의 입가에 어느새 미소가 걸려 있는 것을.
총리실은 나온 진혁의 얼굴은 핼쑥해져 있었다. 그만큼 며칠간 심력 소모가 대단했다.
샤물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좀 쉬면 낫겠지.”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그전에 코트라부터 들르자.”
코트라로 가자 이영석이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일단은 어제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번 일을 맡아 달라는 나즈마 총리의 부탁으로 자문역을 수락했습니다. 그 때문에 소장님께 드릴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의 시간은 필요 없습니다. 회장님을 도와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빠른 이영석의 결정에 오히려 진혁이 당황했다.
“아니, 이렇게 급하게 결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여기저기 물어봐도 하나같이 회장님을 따라가라고 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허락을 받으셔야지요.”
“집사람이 제일 기뻐했습니다. 이곳에 와서 같이 살기로 했습니다. 그동안은 언제 또 어디로 옮길지 몰라서 오라고 할 수도 없었거든요.”
조직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 해외 주재원의 비애였다.
그런 사정은 상사원이었던 진혁이 잘 알고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열심히 할 테니 잘 가르쳐 주십시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 샤물이 환하게 웃었다.
자신에게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이들과 함께 일한다는 게 너무 기쁘고 설렜다.
진혁은 이후 나즈마 총리와 나눈 대화를 세세하게 들려주었다.
다 듣고 난 이영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만 진행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일이 커지면서 한국 정부까지 개입되어 있어서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겁습니다.”
“정치적인 일은 제가 처리할 테니 이 소장님은 이곳에서 벌어질 일에만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공단 건설이나 입주 기업 모집에 대해서는 어떤 복안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오늘 일을 처리하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터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제부터 고민해 봐야지요.”
“이해합니다. 저도 고민해 보겠습니다.”
이후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진혁은 졸리는 눈이 감당이 되지 않아 이영석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호텔로 갔다.
* * *
만 하루 동안 내내 잤다.
배만 고프지 않았다면 더 잤을 것이다.
룸서비스를 시켜 먹고 씻고 나와 샤물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코트라로 향했다.
이영석을 찾아 사무실로 들어서던 진혁의 몸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사무실에는 이영석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난민 캠프에 있어야 할 김연희가 와 있었다.
그리고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정호영도 있었다.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회장님도 들으셔야 할 이야기 같습니다.”
돌아서서 나가려는 진혁을 이영석이 막고 말을 이었다.
“이번 일과 관련해서 여러 아이디어를 가져오셨는데 상당히 효율적입니다. 이대로만 된다면 경비를 상당히 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이 소장님이 제게 상담차 전화하셔서 정 선생님께 그 말을 전해 드렸더니 밤새 고민해서 생각해 내신 아이디어예요. 말씀이라도 들어 주세요.”
김연희의 말에 두 사람이 왜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결국 진혁이 자리에 앉았다.
정호영이 입을 열었다.
“오양 엔지니어링이 이곳 아쉬간지 지역에 250메가와트 급 복합 화력 발전소 및 부대시설 공사를 올 초에 완공하여 현재 가동 운영 중에 있습니다. 또한 TG 건설이 인근 인도에서 고속도로 확장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조만간 완공되는 것으로 압니다. 태후 건설은 태국 램차방 항구 확장공사 사업에 참여사로 선정되어 준비하고 있습니다.”
“바로 인근 지역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으니 그들을 이용한다면 사업 준비 기간과 장비 이동에 따른 비용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겁니다.”
이영석의 보충 설명이 없더라도 진혁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정호영이 준비해 내민 서류는 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정호영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진혁이 이미 이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정말 맞았다.
그때 김연희가 끼어들었다.
“공단 건설에 대한 계획도 말씀드리세요.”
“현재 방글라데시에는 한국계 기업 법인이 228개 들어와 있습니다. 그중 의류 관련 법인은 백 개 정도인데 대부분 다카공이나 치타공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 역시 진혁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현재 그 기업들이 싼 임금 때문에 주문량이 늘어 공장을 증설해야 하는데, 여유 부지가 없어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을 대상으로 미리 공단을 분양해서 건설 비용을 충당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단 이름도 ‘코리아’라는 명칭을 넣는 게 더 효과가 있을 겁니다.”
이후 정호영이 이런저런 소소한 아이디어를 내놨는데 대부분 진혁이 생각했던 내용들이라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이 일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는지 느껴졌다.
자신의 말을 듣고도 여전히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진혁의 모습에 정호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께 용서를 바랄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돕고 싶은 적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이 일이 로힝야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찾아온 겁니다. 말씀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고 힘없이 일어나는 정호영을 김연희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진혁이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중국의 급격한 인건비 상승과 자국기업을 보호하기 위한 과도한 규제로 세계적인 기업들 사이에는 ‘탈중국화’가 하나의 대세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공단만 제대로 건설해 놓으면 들어올 기업은 차고도 넘칩니다. 로힝야 문제는 방글라데시 내부에서는 절대 풀 수 없습니다. 세계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입니다. 한국 기업끼리만 뭉친다면 오히려 독이 될 겁니다.”
“……!”
“공단 건설이 로힝야에게 당장의 탈출구가 될 수는 있겠지만 그게 언제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때를 대비해 세계적인 우군들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게 진정으로 그들을 위하는 일입니다.”
정호영뿐만 아니라 김연희와 이영석마저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진혁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진혁이 엉거주춤 일어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정호영을 직시하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