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크게, 크게
“난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내 용서를 받을 생각은 접으십시오. 단, 로힝야에 대한 당신의 마음은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
“알겠다는 것이지 받아들이겠다는 건 아닙니다. 또한 나에게 인정받으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그 마음을 로힝야에게 쓰십시오.”
“알겠습니다. 죽을 각오로 임하겠습니다.”
“그 마음 변치 마십시오. 저한테 잘못한 것은 나 하나에 국한된 일이지만, 이번 일에 혹여라도 불순한 의도가 있다면 그건 로힝야족 전체의 마지막 희망을 끊는 일이 될 겁니다. 그건 내가 아니라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정호영은 말뿐만 아니라 머리를 깊숙이 조아리는 것으로 자신의 각오를 밝혔다.
“앞으로 머리를 숙이는 것은 제가 아니라 로힝야에게 하십시오. 어쭙잖게 돕는다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그들이 당신에게 사죄할 길을 열어 준 겁니다. 그들에게 고마워하고 진심으로 함께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원하던 것이 이루어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전 총리실에 들어가 봐야 하니 세 분이서 계획을 세워 보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영석의 답변을 뒤로 하고 코트라를 나오는 진혁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실은 그 역시 정호영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의 입으로부터 그 계획을 듣게 되니 문제점이 보였다.
급히 계획을 ‘세계화’로 수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역시 한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내놓는 의견이 훨씬 나았다.
다만 그 상대가 정호영이라는 게 아쉬웠다.
* * *
나즈마 총리의 얼굴이 하루 사이에 더 핼쑥해져 있었다.
자리에 앉은 진혁이 모른 척 물었다.
“고민하시던 문제를 풀어 드렸는데 어째 얼굴이 더 안 좋으신 것 같습니다.”
“이번 건은 제가 서 회장에게 크게 당한 것 같아요.”
나즈마 총리는 말뿐만 아니라 실제 바라보는 눈빛도 차가웠다.
환경 단체와의 협상은 쉽지 않았다.
원료를 석탄에서 천연 가스로 바꿨지만 개발에 따른 자연 훼손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경제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먹히지 않았다.
결국 나즈마 총리는 그들이 요구하는 녹색 성장 정책을 약속해야 했다.
현재 전력 생산의 1% 미만인 신재생 에너지 분야의 발전 용량을 단계적으로 늘려 2020년까지는 10%까지 올리기로 했다.
더불어 현재 추진되고 있는 민간 발전소의 50%를 천연 가스로 건설한다는 안도 받아들여야 했다.
마지막으로 순다르반스 맹그로브 숲 재림 사업에 연간 100만 달러씩의 예산을 배정하겠다고도 약속해야 했다.
람팔 화력 발전소 문제는 해결했지만 앞으로 발전 용량 확보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인도 정부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그들이야 당연히 환영이지요, 발전소도 건설하고 가스도 비싸게 팔 수 있으니.”
단단히 화난 표정의 나즈마에게 진혁이 준비해 간 당근을 내놓았다.
“인도 정부의 의도대로 고가에 가스를 수입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제가 조흐르 가스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잊으신 것은 아니시지요?”
“하지만 거리가 멀잖아요? 운송 비용 때문에 단가를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국가라는 경계는 무의미합니다. 꼭 조흐르 가스전에서 채굴한 가스를 이곳에 가져올 필요는 없습니다. 최근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가스전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최대 수요국이 중국이다 보니 가격 협상이 난항이라고 들었습니다. 조흐르 가스전에서 나오는 가스를 유럽 국가에 납품해 주는 대신 이곳에 가스를 공급하게 하면 됩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나즈마 총리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다자간 중계 무역 방식에 대해 이제야 이해했다.
나즈마 총리의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자 진혁이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총리께서 제게 자문역을 맡겨 주셔서 방글라데시의 경제 발전에 대해 나름대로 고민해 봤습니다.”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나요?”
“총리께서는 방글라데시의 경제 개발 모델을 한국으로 생각하신다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곳에서도 펼쳐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랬지요. 지금은 비록 원조로 겨우 연명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한국처럼 다른 나라를 원조하는 부강한 국가로 만들고 싶어요.”
나즈마 총리의 목소리에는 굳은 의지가 묻어 있었다.
“한국의 경제 발전은 경부 고속도로 건설로부터 시작됩니다. 비록 그 과정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어떻든 국토를 관통하는 도로망을 갖추면서 한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제가 다카와 치타공까지의 고속도로를 서둘러 확장하려는 거예요.”
“그 걸로는 부족합니다. 치타공도 이미 포화 상태입니다. 겨우 지금 시급한 문제를 처리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전 그 구간을 이번 기회에 소나르까지 확대했으면 합니다.”
“소나르는 너무 외지지 않았나요?”
“지금은 외졌지만 앞으로는 크게 발전할 겁니다.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면 전국에서 실업자들이 몰려들 겁니다. 공장에서 받은 임금을 그곳에서 소비할 테니 관련 산업도 빠르게 늘어날 겁니다. 거기에 방글라데시 최대 관광지 콕스바자르가 바로 지척에 있습니다.”
“……!”
“한국의 제2도시 ‘부산’이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현재의 치타공은 공단도시 이미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다카에 필적한 만한 도시가 나와 줘야 합니다. 그럼 그 중간의 도시들도 덩달아 발전하게 될 겁니다.”
나즈마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감정 표현이 익숙하지 않아 흥분된 마음이 그렇게 나타났다.
얼마 동안 생각하던 나즈마 총리가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결국 다시 로힝야 문제가 나오는군요.”
“공단이 본격화되면 계속해서 출퇴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현재 난민 캠프의 상황도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닙니다. 그들 역시 임금을 받아 소비하는 경제 주체입니다.”
“알아요. 하지만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에요.”
“소나르의 현재 인구로는 로힝야 없이 공단을 돌리기도 버겁습니다. 더 많은 인구가 유입되기 위해서는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나즈마가 왜 그걸 모를까.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듣기만 했다.
“아시겠지만 제가 운영하는 공장의 임금은 다른 입주 기업들과 달리 법정 임금을 준수하고 있어 높습니다. 이번 공단이 성공하면 다른 기업들도 덩달아 임금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에 따른 방글라데시의 세금 수입도 높아집니다.”
“…….”
“당장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임대 주택을 지어 따로 모여 살게 하겠습니다. 난민 캠프의 경계를 소나르까지만 넓혀 주십시오. 부지를 더 매입해서 경제 특구의 넓이를 두 배로 늘리겠습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공단으로 키우겠습니다.”
진혁의 마지막 제안에 나즈마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 정도 각오를 가지고 있다면 해볼 만했다.
하지만 국민들을 설득하기에는 뭔가 부족했다.
고심하던 나즈마 총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서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어요.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이 있어요.”
“말씀하십시오.”
“임대 주택은 국가 소유로 해 주세요. 이건은 우리 정부가 로힝야 난민을 위해 먼저 제시한 정책입니다. 그 점을 명확히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발표도 총리께서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진혁은 순순히 응했다.
나즈마 총리는 명분이 필요한 거였다. 진혁 자신은 실리가 필요하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즈마 총리가 말을 이었다.
“계획이 변경되면서 이 일은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아야 할 일이 됐습니다. 이전까지 합의된 내용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에 우선권을 주겠지만, 늘어난 부지의 개발이나 입주 기업에 대해서는 세계 모든 기업에게 동등한 기회를 줘야 합니다.”
“그 점은 걱정 마십시오. 총리 자문역으로 방글라데시 국익에 도움이 되게 하겠습니다. 그게 제가 여러 나라에 걸쳐 사업하면서도 그곳 국가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과거의 일 때문에 난 그간 누구도 믿지 않았어요. 처음으로 서 회장을 믿고 하는 일입니다.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 주세요.”
“그 믿음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런 의미로 자그마한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진혁이 기분 좋게 마지막 당근을 꺼내놓았다.
“부족한 가스 공급을 해결하시려고 해상 광구에 대해 2차 입찰까지 실시했지만 많은 곳이 여전히 미계약 상태인 것으로 압니다. 그중 DS-10, DS-11, DS-12, 세 개의 광구 탐사권을 제가 매입하겠습니다.”
“매장 가능성을 높게 보시는 건가요?”
“자원 개발 투자는 그 성공 확률이 극히 희박합니다. 총리께서 제 제안을 받아 주신 보답으로 투자하는 것뿐입니다.”
진혁이 말을 아꼈지만 나즈마 총리가 그걸 곧이곧대로 들을 리가 없었다.
그가 언급한 세 개의 광구 모두 미얀마와 국경인 남부에 위치한 광구였다.
개발이 난해한 심해에 있는 데다 미얀마와 국경 분쟁이 이제 막 해결된 상태라 관심을 끌지 못해 이곳에 응찰한 국제 석유 기업이 없었다.
나즈마 총리의 고심이 깊어지자,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마십시오. 아시겠지만 인근 미얀마 해상에서 한국의 기업이 AD-1 광구에서 대형 가스전을 발견해 생산에 들어갔습니다. 인근 AD-7 광구의 탐사권을 매입하고 싶었지만 그건 이미 팔렸더군요.”
“맞아요.”
“그래서 아쉬운 대로 인접한 방글라데시의 영역에 있는 세 개의 광구를 택한 것뿐입니다. 가스가 나오든 안 나오든 개발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니 방글라데시 정부로서는 나쁠 게 없습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씀이네요. 어차피 유찰된 것이어서 수의계약을 해도 상관없으니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오늘 나온 이야기까지 모두 담아서 계획서를 만들어 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총리실을 나서는 진혁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원하는 바를 대부분 얻어냈지만 한계도 봤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나즈마 총리와 밀고 당기는 식의 거래를 할 수만은 없었다.
자신의 꿈은 훨씬 더 원대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
* * *
코트라 사무실로 가자 이영석과 정호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연희는 학교 수업 때문에 돌아갔다고 했다.
진혁이 나즈마 총리와 결정한 사항에 대해 들려주었다.
“헉, 공단 부지가 두 배로 늘어났다고요?”
이영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금도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넓은데 그 배가 됐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정호영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두 사람에게 진혁이 말했다.
“부지가 두 배로 늘어도 공장 용지는 그대로입니다. 늘어난 부지는 주거와 상업, 기타 편의 시설들이 들어갈 겁니다.”
“휴……. 다행입니다.”
진혁은 안도하는 이영석을 놔두고 정호영에게 말했다.
“정 사장님은 한국에 다녀와 주십시오. 이곳 일을 청와대에 알리고 한국기업들이 준비하게 해 주십시오.”
“제가 말입니까?”
“이곳에서 제 신분은 총리 자문역입니다. 그런 제가 한국의 일을 주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은 정 사장님이 맡아 주셔야 합니다.”
“…….”
“태후의 정호영이 아니라 로힝야 난민 캠프 정호영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행동하시면 됩니다. 쿠투팔롱의 많은 난민들이 정 사장님이 가져올 선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기억하시면 될 겁니다. 이현국 비서실장님께는 미리 전화 드려 놓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로힝야를 위해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내겠습니다.”
정호영이 나가자 진혁이 이영석에게 말했다.
“저는 소나르 공장에 잠시 다녀와야 합니다. 그동안 소장님은 총리께 보고드릴 계획서 초안을 만들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온 진혁은 샤물을 데리고 소나르로 넘어갔다. 그사이 제2공장의 건설도 거의 마무리되고 있었다.
진혁은 최원섭 공장장은 물론 시에라와 권기남까지 불렀다.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한쪽에서는 원단을 생산하고 다른 쪽에서는 공장을 짓는다고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새 끝나 있네요. 보람도 있고 시원섭섭하기도 합니다.”
시에라의 말에 진혁이 웃으며 최원섭에게 물었다.
“제2공장에서 나오는 원단도 선주문을 받았다고요?”
“사장님에게 HEXA의 요구가 거세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유니핏으로부터 항의를 받으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공장을 늘리기로 했습니다.”
“아, 좀 쉬자우. 여기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늘릴 궁리부터 하냐.”
듣고 있던 권기남이 바로 투덜거리는 모습에 진혁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