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치밀한 안배
“그럼 공장장님은 쉬십시오. 이제 밤방이 있으니 충분합니다.”
“이놈이! 어디서 나를 그런 핏덩어리랑 비교를 해. 내래 눈을 감기 전까지는 니 공장의 기계는 내 손으로 설치할 테니 걱정마라.”
“이번에는 덩치가 커서 힘드실 텐데요?”
“신소리 마라우. 내래 권기남이야.”
큰소리치느라 권기남이 진혁의 입가에 걸린 싸늘한 미소를 보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 되었다.
“공장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고 맡기겠습니다.”
“고럼. 당연히 그래야지. 그래, 이번에는 몇 동이나 지을 끼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않았는데 부지가 좀 넓습니다.”
“얼마나 넓은데?”
“저기서부터 저기까지입니다.”
진혁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렸던 권기남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네래 지금 농담하는 기가?”
“진짠데요.”
“눈에 보이는 곳 전부에 공장을 세우겠다는 말을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거냐?”
“200헥타르면 60만 평이니까 그 정도 넓이는 되지 않겠습니까.”
“헐……. 네놈이 드디어 미쳤구나. 저길 다……. 아이고, 죽었네.”
뜨악한 표정을 지은 것은 권기남만이 아니었다.
최원섭과 시에라 모두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진혁은 그들에게 소나르 공단 건설에 대해 나즈마 총리와 합의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먼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최원섭에게 말했다.
“소나르 공단 계획이 발표되면 서로 앞다퉈 들어오려고 할 겁니다. 그 전에 우리 공장 부지부터 확보해 두어야 합니다. 공장장님은 한국으로 가서 황 사장님께 이곳의 계획을 알리고 거기에 맞는 공장 증설과 생산 계획을 세워 달라고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흥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시에라에게 말했다.
“나즈마 총리와 로힝야족이 이곳까지 이동하고 임대 주택을 지어 거주하는 것까지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공단 부지의 절반은 주거지와 상업 지구, 각종 편의 시설들로 채워질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시에라에게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로 기뻐하시면 안 됩니다. 어떻게 개발하느냐에 따라 로힝야의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지금은 냉정해야 할 때입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잠시 흥분했습니다.”
“난민 캠프에 돌아가시면 조사를 해 주십시오. 아파트는 얼마나 지어야 할지, 병원에는 어떤 진료 과목이 필요한지, 어느 수준의 학교를 원하는지, 그곳에 일할 수 있는 로힝야족들은 얼마나 되는지, 또 편의 시설은 무엇이 필요한지 등등. 원하는 것은 뭐든지 의견을 들어 오십시오. 전부를 수용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든 로힝야가 회장님께 크게 감사할 겁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번 일에 로힝야의 미래가 걸려 있습니다. 계획 단계부터 철저히 준비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는 시에라의 행동에 진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시에라 씨는 개인이 아니라 로힝야의 대표십니다. 언제 어디서건 누구에게나 당당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길을 열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걷는 것은 로힝야 스스로 하셔야 합니다. 그들이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는 시에라 씨가 하기 나름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김 소장님이나 여기 두 분에게 당당히 물으십시오.”
“고럼, 고럼. 대장은 함부로 고개를 숙이는 게 아니다. 내래 아는 것은 없지만 언제든지 물어보라우. 그게 불쌍한 아들을 위하는 길이다.”
“저도 곁에서 돕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시에라는 벌게진 눈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나머지 두 사람에게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진혁이 마땅치 않은 시선을 보냈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고 샤물과 함께 다카로 돌아가겠다고 하고 공장을 나섰다.
두 사람은 바로 공항으로 가지 않고 콕스바자르의 한 리조트 내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중년 남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방글라데시 환경 연합을 이끌고 있는 스잘입니다. 이쪽은 치타공 주 지부장인 사비르입니다.”
“서진혁입니다.”
“회장님의 도움으로 그간 우리가 줄기차게 요구했던 일들을 드디어 이루게 되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진혁은 방글라데시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환경 단체와의 유대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다.
샤물을 은밀하게 이들에게 보내 람팔 화력소로 궁지에 몰린 나즈마 총리의 사정을 알리고 최대한 요구를 관철시키게 했다.
진혁이 말했다.
“겨우 약속을 받아냈을 뿐입니다. 그게 얼마나 지켜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두 사람 모두 답을 하지 못했다.
그간 정치인들은 많은 약속을 했지만 제대로 지켜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강하게 요구할 수 없는 게, 국가 재정은 열악하고 궁핍한 국민들에게 환경이란 이슈는 크게 다가가지 못해 호응을 끌어내지 못했다.
이번은 보좌관의 망발로 유네스코가 알게 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끈 데다 진혁의 적절한 도움이 있어 가능한 특수한 경우였다.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약속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방글라데시의 경제 발전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건 우리의 이념과 배치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방글라데시의 삼림은 매년 2% 이상씩 감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국가 재정이 열악해 조림 사업은 지지부진합니다. 그로 인해 우기에는 산사태와 저지대의 침수로 국민들이 많은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경제 논리에 의한 삼림 파괴는 막아야 합니다.”
“맞습니다. 무분별한 삼림 파괴는 막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미 파괴된 삼림을 복원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결국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귀결됩니다.”
“뫼비우스의 띠같이 끝이 없는 논쟁입니다. 삼림 보호와 경제 개발은 영원히 공존할 수 없는 평행선입니다. 감사 인사를 드리러 온 자리이니 이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냈으면 싶습니다.”
스잘이 대화를 중단하려고 했다. 하지만 진혁은 그럴 수 없었다. 아직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급히 입을 열었다.
“삼림 보호와 경제 개발이 공존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들 처음에는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자신의 욕심만 채우고 파괴된 환경을 남긴 채 무책임하게 떠나는 모습을 본 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길은 없습니다.”
“제가 소나르에 200헥타르의 공단을 건설하기로 나즈마 총리와 합의를 했습니다.”
“……!”
“이번 공단 건설로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함께 확인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함께요?”
“그렇습니다. 계획 단계부터 실행, 그리고 결과 확인까지 모두 함께 가 보는 겁니다. 사업가인 저와 환경 단체인 여러분이 말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스잘이 사비르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좋습니다. 회장님의 계획을 들어 보겠습니다.”
진혁은 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두 사람은 물론 샤물의 눈도 커져만 갔다. 그만큼 엄청난 계획이었다.
진혁의 말이 끝났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스잘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가능하게 해야지요. 전 이번 프로젝트에 저의 전부를 걸 작정입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시작은 여러분과 하지만 종래는 방글라데시의 많은 뜻 있는 인사들이 함께해야 할 일입니다. 전부를 원하다가는 전부를 잃습니다. 열악한 이곳 사정에서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이라도 택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어떤 답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조만간 소나르 공단 건설 계획이 발표될 겁니다. 그 때 행동으로 보여 주십시오. 설혹 제 뜻과 다른 결정을 내리시더라도 원망은 하지 않겠습니다. 전 반드시 이뤄낼 거니까요. 귀중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은 정중히 인사하고 샤물과 함께 그곳을 나왔다.
다카로 돌아온 진혁은 이영석이 만들어 놓은 초안을 가지고 함께 수정해서 나즈마 총리에게 가져다주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이영석의 얼굴이 어두워 보였다.
“어디 불편하신 데 있습니까?”
“아닙니다.”
부인했지만 진혁의 그의 마음이 편치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역 관련 일을 하다가 전혀 상관없는 공단 건설 관련 업무만 하고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AK 업무 때문에 싱가포르를 다녀오려고 하는데 같이 가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얼른 준비해서 오겠습니다.”
진혁의 예상이 맞는지 이영석은 바로 활기찬 목소리로 답하고 부리나케 나갔다.
자신도 상사원 시절 오더라면 열 일 제쳐두고 뛰어갔었다.
그 모습에 진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 * *
싱가포르 창이공항에 도착하자 선병식, 한상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은 방글라데시아 사무소의 이영석 부장입니다. 앞으로 서남아시아 시장을 맡아서 관리하게 될 겁니다.”
“이영석입니다.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서로 인사를 나눴는데 선병식이 제일 반가워했다.
동남아시아의 일이 계속 커지는 반면 서남아시아에 대한 걱정도 컸었는데, 그 짐을 덜 수 있게 된 게 기뻤다.
차 안에서 선병식이 빠르게 보고했다.
“파노나는 유럽의 패션 유통 그룹이 2012년 동남아시아에 전자 상거래 플랫폼이 없다는 점에 주목해 세운 회사입니다. 서비스 지역을 8개국으로 넓혀 가면서 동남아시아 패션 쇼핑몰 1위까지 올랐습니다.”
“매각하는 이유는요?”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현재 동남아시아 온라인 유통 시장은 세계적인 이커머스 강자들의 각축장이 되어 있습니다. 패션몰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성장이 정체되고 수익이 악화되자 사업 철수를 결정한 것 같습니다.”
선병식의 답변이 끝나자 한상국이 이어 보고했다.
“그동안 은밀히 알리바마와 인수 협상을 벌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알리바마가 자포라를 인수하며 발을 빼자 난관에 봉착해 우리에게까지 연락해 온 듯합니다. 다들 반응이 없자 결국 일괄 매각을 포기하고 JK모건에 의뢰해 가격을 낮춰 개별적으로 매각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현재 어디까지 진행되고 있습니까?”
“필리핀, 태국, 베트남은 현지 소매 유통 그룹을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해서 조만간 양해각서를 체결한다고 합니다. 홍콩과 대만은 중국 기업과 거의 인수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정보입니다.”
“결국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만 남은 거군요.”
“그렇습니다. 그중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를 우리에게 인수 의뢰한 겁니다.”
진혁이 생각하는 사이 차가 JK모건 싱가포르 지점에 도착했다.
로비에서 기다리는 비서를 따라 지점장실로 가자 요한슨 지점장이 어색한 표정으로 맞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그간 강녕하셨지요?”
진혁이 뼈 있는 인사를 했다.
자신의 자포라 인수를 막고 알리바마로 넘어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였으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비즈니스를 위해 만난 자리였다. 개인 감정을 앞세워 사업을 망칠 수는 없었다.
요한슨이 히잡을 쓴 중년 여성을 소개했다.
“이쪽은 티엔 마게스와리 본사 사장님이십니다. 싱가포르 현지 법인장도 겸하고 계십니다.”
“서진혁입니다.”
진혁은 선병식과 한상국, 이영석을 차례로 소개했다.
요한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검토는 해 보셨습니까?”
“파노나 그룹 전체라면 모르지만 일부는 알쇼핑 입장에서는 큰 매력이 없습니다.”
“다른 국가들은 계약 협상이 마무리 단계라 어쩔 수 없습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알쇼핑 강세 지역이니 파노나를 인수하시면 시너지 효과가 상당하실 겁니다.”
“그 말씀을 뒤집어 보면 이미 알쇼핑이 선점한 시장인데 우리가 굳이 파노나를 인수할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됩니다. 알라딘 그룹이 쓰레기 처리반도 아니고.”
진혁의 냉정한 말에 요한슨이 입맛을 다셨다.
사정을 다 알고 온 듯한 태도에 오늘 협상이 쉽지 않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요한슨의 마음은 티엔 사장에 비하면 약과였다.
자신이 혼신의 힘을 다해 키운 파노나가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도 모자라 쓰레기 취급을 받고 있으니 심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진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일단 매각 금액을 들어 보지요. 어느 정도를 생각하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