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복선 깔기(1)
“회장님께 더 이상 숨기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기에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태국 법인이 1천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그걸 기준으로…….”
꽝!
선병식이 벼락같이 테이블을 내리치고 말했다.
“지금 알라딘 그룹을 겨우 그딴 소매업자들과 똑같이 취급하겠다는 겁니까?”
“흥분을 가라앉히세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자신이 애써 키운 동남아 시장을 무시하는 것에 화를 냈던 선병식은 진혁이 주의를 주자 빠르게 냉정을 찾았다.
진혁이 결정을 내렸다.
“두 군데 해서 1천만 달러로 합시다.”
“그건 무리입니다.”
“그럼 알라딘 그룹은 빠지겠습니다. 다른 곳을 알아보세요.”
“일단 진정하십시오. 우선 회장님의 뜻을 저쪽에 알리고 최대한 조율해 보겠습니다.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습니다. 갑시다.”
진혁이 일어나자 다들 바로 따라 일어나 떠났다. 남아 있는 요한슨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칼자루는 진혁이 쥐고 있었다.
* * *
저녁 늦게 사무실을 나와 주차장에 들어선 티엔의 얼굴은 어둠에 휩싸인 바깥거리만큼이나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길 테니 최선을 다해 달라는 부탁은 온데간데없고, 매각이 결정되자 모그룹에서는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하루에도 열두 번 이상 그만두고 싶지만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직원들을 생각하며 겨우 버티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차로 향하던 티엔의 앞에 주차되어 있던 차에서 문이 열리고 진혁이 나왔다.
놀란 표정의 티엔에게 진혁이 말했다.
“기다리느라 식사를 못했습니다. 아직 안 드셨으면 같이 드시지요. 상의드릴 말씀도 있고요.”
“……예.”
티엔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티엔이 가르쳐 주는 길을 따라 가자 조용한 레스토랑이 나왔다.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진혁이 말했다.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는 천천히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편한 대로 하세요.”
티엔의 말에 웨이터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물었다.
“본사와 싱가포르 법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모그룹에서 일단 유지하기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보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투자 실패에 대한 비난 여론이 수그러들 때까지 시간만 끌겠다는 전략이군요.”
진혁의 정확하고 냉정한 판단에 티엔의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력을 보니까 디자인을 공부하시고 MD로 활동하시다가 파노나를 맡으셨더군요. 사업이 처음이신데도 단기간에 동남아 1위의 패션 쇼핑몰로 만드셨는데, 비결이 뭡니까?”
“투자와 사업은 모그룹에서 오신 부사장님이 맡으셔서 잘 몰라요. 전 좋은 상품을 런칭하는 역할을 했어요.”
“현재 상황을 보면 결국 파노나는 실패한 건데,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파노나만의 특색을 잃어버린 게 실패 요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역을 넓힌 것도 문제지만 패션과 전혀 상관없는 여성 용품까지 취급하는 바람에 다른 사이트와 비슷해져 버렸어요.”
“그럼 다시 물어보지요. 지역도 넓히지 않고 패션만 취급했다면 파노나가 살아남았을까요?”
“…….”
티엔이 답을 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동남아시아 1위 패션 쇼핑몰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고, 소리 소문도 없이 세계적 이커머스 강자에 먹혀 사라졌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온라인 유통 시장에서 살아남는 길은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엄청난 돈의 힘으로 경쟁자들을 다 먹어 치우면서 공룡이 되는 겁니다. 아마존이나 알리바마처럼 말입니다. 이 방법은 사장님이나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은 불가능하다는 게 단점입니다.”
“……!”
“두 번째 방법은 공룡도 어쩌지 못하는 확실한 무기를 가지고 내 영역을 공고히 하면서 차근차근 시장을 넓혀 가는 겁니다. 지루하고 힘든 싸움이지만 돈의 힘이 아니라 내 스스로 이룬 것이기에 보람은 더 큽니다.”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물었다.
“저나 알라딘 그룹에 대해 알고 계시는지요?”
“알고 있어요. 무슬림의 한 사람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편해지겠군요. 제가 오늘 여기 오기까지는 라이나 왕비님과의 인연으로부터였습니다.”
진혁은 티엔에게 로힝야에 대해 들려주었다.
어떻게 그들을 만나게 됐으며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모두 밝혔다.
마지막으로 들고 간 가방에서 나즈마 총리에게 보고하려고 만든 소나르 공단 계획서를 꺼내 보여 줬다.
“로힝야족에게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하고 겨우 허락받아 벌이는 일입니다. 이건 무조건 성공시켜야 합니다.”
“그 말씀을 지금 제게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티엔 사장님이 로힝야가 나아갈 길을 밝혀 줄 등대라는 생각에서 파노나를 인수할 생각을 한 겁니다.”
“제가요?”
“공단을 건설하고 의류 기업들을 유치해 공장을 돌리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그곳에서 로힝야도 일하겠지요. 그래 봤자 공장이란 감옥에 갇혀 지내는 노동자에 불과합니다.”
진혁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로힝야들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 주고 싶습니다. 돌아가는 공장의 부속품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까지 해서 자신들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시킬 수 있게 해 주는 게 제 목표입니다.”
진혁의 말이 끝났을 때는 공허함으로 가득 찼던 티엔의 눈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비록 한정된 역할이었지만 그녀 역시 사업가였다. 진혁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의류 제조에 유통까지 하실 생각이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먼저 갖춰져야 하겠지요. 그 일에 티엔 사장님만 한 적임자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진혁의 모습에 티엔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걸렸다.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길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같이 목례를 한 티엔이 말했다.
“한참 전에 파노나에서 회장님을 뵙고 싶다는 연락이 왔었다는 보고는 받으셨지요?”
“그랬습니다. 그때는 일이 이런 식으로 커질지 몰라 무시했었습니다.”
“그 연락은 제가 했어요. 모그룹의 지시와는 상관없이.”
“……!”
“회장님에 대한 기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겨 봤어요. 제가 감히 판단하기에 회장님은 이곳 동남아시아에 가장 적합한 분이시라고 판단했어요.”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무슬림과 한류, 이곳을 양분하는 두 개의 큰 흐름을 회장님은 다 가지고 계세요. 회장님이라면 파노나가 살아남을 해법을 찾아내실 것이라 생각했었어요.”
“일찍 연락드릴 걸 그랬나 봅니다.”
“아니요. 그간 많이 힘들었지만 덕분에 이런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좋아요. 제 역량이 회장님이 원하시는 만큼 될지 모르겠지만, 이끌어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자 미뤘던 음식을 시켰다.
음식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식사가 끝나자 티엔이 물었다.
“회장님은 파노나를 어떤 식으로 활용하실 생각이세요?”
진혁이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말했다.
“그건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질문입니다. 파노나는 알라딘 그룹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겁니까?”
“…….”
“답을 하실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알라딘 그룹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지 실체를 모르실 테니까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파노나의 실체를 모르는 제가 이러쿵저러쿵 하는 건 맞지 않지요.”
사장이지만 모그룹의 방침에 따라 움직였던 티엔에게 진혁의 말은 신선하게 들렸다.
“JK모건에서 봤던 선 사장님은 동남아 알라딘 그룹을 이끌고 계시는 분입니다. 한 사장님은 지금의 알쇼핑을 만드신 분이고요. 함께 상의하면서 사장님의 역할을 찾아보세요. 시간이 되시면 한국이나 중동의 알라딘 그룹을 직접 방문해서 보는 것도 도움이 되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전에 제가 의류 사업을 본격적으로 해 보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를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로힝야를 돕기 위해 낡은 국영 방직소를 매입해서 데님을 생산하게 됐다는 것은 기억하시지요?”
“네. 비전문가가 어떻게 그런 탁월한 선택을 했는지 궁금했었어요.”
“라이나 왕비님의 전속 디자이너 수잔나 마리아 씨가 조언해 줬습니다.”
“수잔나 마리아!”
“역시 유명한 분이라 아시네요. 전 그쪽에 문외한이라 당시는 몰랐습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갑자기 예뻐져 보인 마르와도 그분의 작품을 입고 있다고 했었던 것 같고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무심코 보고 넘겼던 히잡도 패션이 될 수 있구나 하고요.”
티엔이 신기한 듯 쳐다봤다.
“비무슬림이고 비전문가인 회장님이 몇몇 디자인 전문가들끼리만 통하는 그런 말씀을 하실지는 몰랐습니다.”
“제가 이래봬도 알-아즈하르 대사원이 인정하는 명예 신도입니다.”
진혁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는 모습에 티엔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2013년 전 세계 무슬림 패션 시장은 2천 660억 달러를 기록했어요. 2019년에는 두 배가 될 거라고 해요. ‘무슬림 패션’이 전 세계 패션의 ‘트렌드’로 자리 잡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크군요.”
“히잡을 쓴 패셔니스타라는 뜻의 ‘히자비 스타’라는 신조어까지 생겼을 정도로 반응이 뜨거워요. 그중 제일 유명하신 분이 수잔나 마리아 씨고요. 그분의 도움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이건 무조건 성공하는 사업입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라이나 왕비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계획을 가지고 계시면서 왜 그동안 파노나에는 무슬림 패션이 많지 않았던 겁니까?”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은 무슬림의 비중이 더 낮아요. 모그룹에서 우려를 나타내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걱정 말고 맘껏 그 꿈을 펼쳐 보십시오. 알쇼핑은 무슬림 비중이 높은 나라에는 모두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힘껏 돕겠습니다.”
두 사람은 마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각자 자신의 원하는 최상의 결과를 얻은 날이었다.
* * *
다음 날 진혁은 JK모건 싱가포르 지점장실에서 요한슨과 배석자 없이 단둘이 만났다.
요한슨이 난색을 표하며 말했다.
“1,500만 달러 이하로는 어렵다고 합니다.”
“…….”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고 했는데도 저쪽에서는 매각과 동시에 부채를 갚아야 해서 받아들이기 힘든 모양입니다.”
듣고만 있던 진혁은 요한슨의 말이 끝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새로운 제안을 하지요. 파노나 사업 전체를 1억 달러에 인수하겠습니다.”
“1억 달러요?”
요한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 그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단, 전체여야 합니다. 일부만이라면 다른 기업을 알아보겠습니다.”
요한슨은 입맛을 다셨다. 사업 전체에 대한 매각 금액으로 많이 받아야 7천만 달러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혁에게 먼저 연락할 것을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다른 지역은 이미 계약을 위한 작업들이 진행 중에 있습니다.”
“기업 간 거래는 계약서에 사인하고도 언제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합의만 되면 바로 전액을 입금하지요.”
“다른 곳은 무슬림 비중이 높지 않은데 왜 전체를……?”
“대신 한류가 있지요. 제 제안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는 지점장님의 역량에 달렸습니다.”
고민하던 요한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3천만 달러가 걸린 일이다. 되든 안 되든 일단 부딪쳐 봐야 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