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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74화 (174/307)

174화. 복선 깔기(2)

요한슨이 수정된 제안에 대해 협의하기 위해 나갔다.

그런데 30분 만에 돌아온 요한슨의 얼굴이 그새 핼쑥해져 있었다.

“일시불로 입금한다는 조건으로 겨우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후 일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JK모건 싱가포르 지점이 위임권을 가지고 있어 AA 대표를 맡고 있는 선병식의 사인만 들어가면 됐다.

진혁은 바로 입금해 줬다.

원래는 실사 단계를 거치는데 생략했다. 스미스가 보내 준 JK모건 내부 보고서로도 충분했다.

* * *

파노나 본사 사장실에 다들 모였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병식과 티엔의 인사를 받고 진혁이 한상국에게 말했다.

“한 사장님은 빠른 시간 안에 파노나에 대해 파악하셔서 알쇼핑과의 접목 방안에 대해 계획을 세워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선 사장님은 파노나 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티엔 사장님과 협의해서 인수 작업을 무리 없이 진행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티엔 사장님은 어제 말씀 나눈 것을 토대로 무슬림 패션 활성화 대책을 세워주십시오.”

“반드시 만족하실 만한 대책을 내놓겠습니다.”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고 진혁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한 식구가 됐습니다. 그간 서로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했기에 의견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또한 알라딘 그룹을 위하는 일이니, 서로의 의견을 존중해서 가장 최적의 방안을 찾아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필요하다면 티엔 사장님은 물론 직원들이 알라딘 그룹 어디건 방문할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해 주십시오. 그럼 수고해 주시고, 전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진혁은 선병식에게 공항까지 배웅해달라고 부탁했다.

그에게 따로 지시할 일이 있어서였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공항 라운지의 카페에 마주앉자 진혁이 용건을 꺼냈다.

“제가 애초의 계획과 달리 파노나 사업 전체를 인수한 것은 이제 자포라로부터 독립할 시기가 됐다고 판단해서 입니다.”

“헉. 따로 가시게요?”

“사업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는 말은 선 사장님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들이 언제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돕는 척하며 묶어 두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저 역시 최근에 그런 점이 느껴져서 조금 답답한 느낌을 받긴 했습니다.”

“일단은 파노나부터 제대로 파악하시는 게 우선입니다. 철저히 준비한 다음에 전격적으로 빠져나와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제외한 나머지는 한류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방향으로 검토해 주십시오. 알쇼핑이 진출하지 못했던 홍콩과 대만은 메이왕 그룹을 이용하는 쪽으로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거침없는 진혁의 말에 선병식은 이미 그가 오래전부터 자포라에서 나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아쉬움이 생겼다.

“회장님이 방글라데시에 너무 묶이시는 게 아닌가 걱정입니다. 공단 건설에 정부 요직까지 맡으셨으니…….”

“앞으로 동남아시아 시장은 선 사장님이 주도적으로 처리한다고 생각하셔야 할 겁니다.”

“회장님의 믿음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심려 마시고 다녀오십시오.”

활짝 핀 얼굴로 인사하는 선병식의 모습에 진혁도 마주보고 웃으며 일어났다.

탑승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 * *

진혁은 이영석을 데리고 파키스탄과 인도를 차례로 들렀다.

TCS의 아완 회장과 다부다 인도 그룹의 아먼 의장에게 이영석을 소개시키고 협조를 당부한 뒤, 아먼 의장이 마련해 준 호텔의 바에서 이영석과 술을 마셨다.

이슬람 국가가 아니어서 이건 편했다.

진혁이 물었다.

“나와 보시니 어떻습니까?”

“단 며칠이라 다 알 수는 없지만 회장님이 얼마나 역동적으로 일하시는지 조금은 느꼈습니다.”

“시장은 넓습니다. 서남아시아만도 아프가니스탄, 부탄, 몰디브, 네팔, 스리랑카는 발도 디디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는 아예 손도 못 대고 있습니다.”

“제가 그쪽 시장의 진출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신 시장 개척도 중요하지만 기존 시장의 확대가 먼저입니다. 이곳 인도만 해도 우리가 끌어안지 못한 힌두교도들이 10억 명 가까이 됩니다. AA가 한류로 한 단계 변신을 준비하듯이 그들을 잡을 방법을 우선 찾아보십시오.”

“알겠습니다만…… 그렇게 되면 공단 건설에 공백이 발생합니다.”

“당분간만 양쪽을 병행해 주십시오. 제가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그 정도로 마무리하는 게 최선이었다.

* * *

이영석을 방글라데시로 돌려보내고 요르단 왕궁으로 가자 라이나 왕비가 수잔나 마리아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그 이야기부터 듣고 싶어요.”

자리에 앉자마자 라이나 왕비가 로힝야에 대해 물었다. 그들을 걱정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나즈마 총리와 합의한 내용을 들려주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엄청난 일을 해내셨군요.”

“로힝야에 최적화된 방법을 찾아가다 보니 일이 생각보다 커졌습니다.”

“개발 비용만도 엄청나겠는데요?”

“공단 조성 비용으로 10억 달러를 책정했습니다. 로힝야를 위한 편의시설까지 생각하면 15억 달러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기부 펀드가 5억 달러 정도 된다고 하셨는데, 나머지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기부 펀드는 많은 분들이 모아 주신 소중한 돈이어서 제 사업과 관련한 일에 쓰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제가 자금은 따로 마련했으니 걱정 마십시오.”

진혁은 적당히 답했다. 비트코인 투자를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었다.

그게 오히려 라이나 왕비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제가 서 회장님에게 너무 큰 부담을 드린 것 같아요.”

“아닙니다. 왕비님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이런 좋은 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니 오히려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감사해요. 저도 제 나름대로 도울 방법을 찾아볼게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마리아 씨는 어쩐 일로 같이 보자고 하신 겁니까?”

라이나 왕비의 물음에 진혁이 마리아에게 시선을 두고 말했다.

“지난번 데님 생산을 조언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까칠함이 잔뜩 묻어 있는 답변이었지만 이미 한번 경험한 터라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번 공단 건설로 로힝야가 인간답게 살아가는데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은 맞지만 아직 완전히 그 꿈을 이룬 것은 아닙니다. 난 단순히 원단 직조에 머물지 않고 의류 제작과 유통까지 할 작정입니다.”

“제 도움이 필요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유통 관련해서는 동남아시아의 파노나라는 패션 전문 쇼핑몰을 인수했습니다. 티엔 사장님에게 무슬림 패션 시장의 성장세에 대해 들었습니다. 마리아 씨가 유명한 히자비 스타라고 하시더군요. 도와주십시오.”

고개를 숙이는 진혁을 잠시 바라보던 마리아가 입을 열었다.

“지금 왕비님이 입고 계신 옷은 만 달러가 넘어요. 이런 옷을 만들어서 얼마나 많이 파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전 의류 전문가가 아니라 옷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좋은 옷도 좋지만 편한 옷이 더 좋습니다. 멋진 옷을 만들어 왕비님 같은 분이 입어 주시는 것도 보람이겠지만, 편한 옷을 만들어 많은 사람이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는 것도 보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편한 옷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무슬림 여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히잡을 착용합니다. 부유한 무슬림보다는 어려운 무슬림이 더 많습니다. 빈곤한 그들은 중국산 저질 원단으로 아무렇게나 만든 쓰레기를 뒤집어쓰고 다니고 있습니다. 전 같은 가격에 최고의 원단으로 최고의 디자이너가 만든 의류를 선보이고 싶습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저 혼자서는 못 합니다. 마리아 씨가 만들어 주시고, 마르와와 왕비님께서 홍보해 주시면 제가 온라인 판매로 원가를 최대한으로 낮춰야 가능합니다. 이는 비단 그 제품을 사서 입는 이뿐만이 아니라 그걸 만들고 유통하는 이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는 일입니다. 나아가 세계인에게 무슬림 패션의 우수성을 알려, 테러 집단이라고 오해 받고 있는 무슬림인의 긍지를 높이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진혁의 원대한 포부에 라이나 여왕은 박수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마리아가 자의로 승낙해야 할 일이라 부담을 줄 수는 없어 참아야 했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마리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요. 당신 일을 돕겠어요.”

“고맙습니다.”

“제가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은 오랫동안 지켜봐 온 왕비님의 선택을 믿어서예요.”

“왕비님의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성공시켜 보이겠습니다.”

“회장님의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해요.”

“무엇이든 말씀해 주십시오. 필요한 것은 모두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진혁의 확답에 마리아가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물질적인 유형의 지원을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우리 같은 탑 클래스의 디자이너에게도 고충이 있어요. 회장님의 말처럼 누구나 입을 수 있는 편한 옷을 왜 만들지 않고 싶겠어요? 하지만 그걸 내보이면 오히려 저급이라 비판하니 디자인해 놓고도 내놓지 못했어요. 뜻이 같은 디자이너들 것만 모아도 몇 년간은 충분히 만들고 남을 겁니다.”

“그럼?”

“내가 아는 디자이너들은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동남아시아 최고의 히자비 스타는 말레이시아의 배우인 리사 아마니예요. 그녀를 합류시킬 수 있다면 회장님의 계획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겁니다.”

“리사 아마니. 알겠습니다. 반드시 설득하겠습니다.”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눈 진혁은 방글라데시의 일을 결정짓고 다시 오겠다고 하고 왕궁을 나왔다.

* * *

인천공항에 도착한 진혁은 바로 알라딘 코리아 사무실로 갔다.

황영재가 먼저 와서 기다렸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조금 일찍 왔습니다.”

“제가 찾아뵀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최 부장을 통해 방글라데시 공단 조성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런 큰일을 하시는데 당연히 제가 찾아와야지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발주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원단 수급만 보장된다면 유니핏에서는 인도 공장을 증설하겠다고 하고, HEXA에서는 철수했던 방글라데시 공장의 재설치를 추진하겠다며 공단 부지 확보까지 부탁하더군요. 다른 업체들도 물량을 추가 주문하겠다고 했습니다.”

황영재의 목소리가 잔뜩 흥분되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발주처의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진혁이 그런 황영재의 기분에 찬물을 끼얹었다.

“전 의류 제작과 유통까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계속해서 주문을 넣어 주겠습니까?”

“…….”

황영재가 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는 ETC가 세계적인 기업들로 꾸준히 주문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품질도 있었지만 원단 생산에만 집중하며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체적으로 의류를 제작하는 것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텐데, 유통까지 한다면 그 즉시 경쟁업체가 되는 것이다.

그럼 전쟁이었다.

적군에게 주문을 넣는 멍청한 장수는 없었다.

황영재가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이걸 계획하신 거군요. 그래서 공동 대표도 거절하신 거고요.”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언제까지 납품업체에 머물 수만은 없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자체적으로 생산과 유통을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끌려 다닐 수밖에 없으니까요.”

“…….”

황영재가 대화를 잇지 못하고 침묵하자 진혁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투 트랙으로 가기로 하지요.”

“……?”

“기존 ETC의 사업은 황 사장님이 맡아서 진행하시고, 신규로 하는 의류 제작과 유통은 알라딘 이름으로 하겠습니다.”

“……도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새로 짓는 공장에는 ‘4Way Denim’을 꼭 넣어주십시오.”

“‘4Way Denim’을요?”

황영재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투자자나 발주처 모두 고개를 젓는 비운의 신제품이었다.

하지만 진혁의 생각은 확고했다.

“남들을 따라가서는 집니다. 알라딘에서 데님류는 4Way를 주력으로 가져갈 작정입니다.”

“제품으로 만들어만 주신다면 최고의 원단을 생산할 수 있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말씀드린 ‘섬유 난민’을 모으는 일도 부탁드립니다. 능력 있는 섬유업자분들이 공단에 입주하실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십시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중국 공장을 옮기려고 문의해 오는 이들이 많습니다. 제가 소나르 공단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겠습니다.”

함께 하지도 못한 미안함 때문인지 황영재는 최선을 다해서 돕겠다는 뜻을 게 여러 번 비치고 돌아갔다.

진혁은 입 안이 썼다. 기술자 출신 사업가들의 한계였다.

하지만 그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정은 각자의 선택이니 존중해주는 게 맞았다.

황영재를 보내고 고용준으로부터 간략한 업무 보고를 받은 뒤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 탔다. 고용준이 데려다 주겠다고 했지만 말렸다.

핸드폰이 울려서 보니 지민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전화를 받았던 진혁이 급히 운전수에게 말했다.

“강남 서울 병원으로 갑시다. 빨리!”

갑작스런 지시에 놀라긴 했지만 노련한 운전기사인지 급히 핸들을 돌리고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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