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공동 프로젝트 개발 펀드
회복실로 달려가자 지현의 어깨를 안고 있던 지민이 얼른 달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급성 심근경색인데 다행히 수술이 잘돼서 위험한 고비는 넘겼대요.”
“형부. 흐흐흐흑…….”
진혁은 우는 지현을 안아 줬다.
희준이 회사에서 갑자기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길이었다.
지현을 달래며 진혁은 자책했다.
지난 삶에서 부장 진급을 앞둔 희준이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 마비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그나마 이번에는 일찍 발견되어 다행이었다. 다시는 가장 친구를 허망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중환자실이라 면회 시간이 되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지현에게 희준이 최근 들어 회사 생활을 많이 힘들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취 깰 시간을 확인하고 진혁은 수술한 의사를 찾아갔다.
“세 개의 관상동맥 중 두 개가 거의 다 막힌 상태였습니다. 스텐트 삽입술로 도관을 삽입하여 혈관을 확장시키는 수술이라 어렵지 않았습니다. 삼사 일 경과를 지켜보다가 이상 없으면 퇴원하시면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그 말씀은 회사 동료분께 하십시오. 그분들이 빨리 발견해 데려오지 않았다면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분들께는 따로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수술이 잘 끝났다고 안심하시면 안 됩니다. 회사원이시라니 아마 업무 스트레스로 음주와 흡연이 잦았을 겁니다. 더 이상 직장 생활을 하시면 안 됩니다. 무조건 안정을 취하고 편하게 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아 검사도 받으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진혁은 간단히 대답하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의사들은 참 편하게 말했다.
직장이 좋아서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먹고 살려니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고 그걸 풀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
그런데 아무런 대안도 제시해 주지 않고 무조건 쉬라면 가족들은 누가 부양하라는 말인지.
회복실에 도착하자 일반 병실로 옮겼는지 지현과 지민이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물어 입원한 병실로 갔다.
“흐흑. 이 거짓말쟁이……. 끝까지 책임지겠다며.”
“저기 여보, 사람들이…….”
“물어내. 물어내란 말이야. 이 나쁜 놈아. 으아아앙!”
지현이 희준을 붙잡고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조용해야 할 병실에서 크게 울어대니 주변 보호자들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진혁이 얼른 달려가 주위를 환기시켰다.
“처제, 여기는 병실이야.”
“형부, 나 이제 어떻게 해요? 우리 애기는요.”
“어, 너 임신했니?”
“그래. 오늘 저녁에 들어오면 기쁘게 해 주려고 파티까지 준비했단 말이야. 으앙.”
놀라 물었던 지민은 지현이 다시 울음을 터트리자 얼른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진혁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희준을 보고 말했다.
“축하한다.”
“내가 아빠가 된다니……. 기분이 이상하다.”
“나도 혜주를 가졌다는 말에 그랬어. 그래서 결단을 내렸었지. 네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한 명이 더 늘었다. 지금부터는 네 몸은 네게 아니야. 그러니 간수 잘해라.”
진혁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희준에 얼굴에도 결의가 나타났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게 다가왔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자신에게 아이가 생겼다는 기쁨이 훨씬 더 컸다.
얼마간 그 기분을 즐기던 희준이 진혁을 보고 물었다.
“넌 외국에 있었던 것 아니었어?”
“마침 들어와 있던 참이었어.”
“바쁠 텐데 뭐 하러 일부러 와.”
“네가 나였다면 어떻게 했겠냐?”
희준이 답을 못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일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치고 달려왔을 것이다.
진혁이 다시 말했다.
“다행히 빨리 발견된 데다 수술도 잘됐네. 삼사 일 정도만 입원하면 된대.”
“그렇게나 길게? 맡고 있는 중요한 프로젝트가 있어.”
“이 자식이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들은 거야. 처제 불러와?”
“아, 아니야. 그냥 조용히 누워 있을게.”
지현을 부른다는 말에 희준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혁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아파도 아프다고 못 하고 병가도 마음대로 내지 못하는 대한민국 샐러리맨의 비애였다.
얼마 후 늦게 연락받고 장인, 장모님까지 오셔서 한동안 분주했다.
밤이 되어 그날 면회 시간이 끝나자 모두 김세동의 집으로 갔다.
지현이 병원 의자에서 밤을 새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배 속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그럼 안 된다는 장모님의 설득에 뜻을 굽혔다.
* * *
다음 날 아침, 식탁에 지현은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병원으로 갔다고 했다.
진혁은 알라딘 코리아와 동행 사무실을 들를 생각으로 출근하는 김세동과 함께 집을 나섰다.
“청와대에 들렸다 가게.”
“……?”
“정호영 사장이 얼마 전에 다녀갔어. 아마 그 일 때문에 찾으시는 것 같아. 어제 부르시려던 것을 사정을 듣고 미루신 거네.”
“알겠습니다. 가시지요.”
청와대로 가자 이현국 비서실장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호영도 함께 있었다. 그도 아침에 호출 받고 나온 모양이었다.
함께 집무실로 가자 권성일 대통령이 반색을 하고 맞았다.
“서 회장은 올 때마다 큰 선물 보따리를 가져와서 언제나 기대가 큽니다.”
“제 사업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그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자리에 앉자 권성일이 방글라데시의 일에 대해 물었다. 이미 정호영에게 이야기를 들었지만 본인의 입으로 듣고 싶어서였다.
진혁은 최대한 간략하게 나즈마 총리와 협의한 내용을 들려줬다.
“대단하네요. 나즈마 총리가 자문역을 맡긴 이유를 알겠습니다.”
“로힝야를 위한 공단을 수락받기 위해 어쩔 수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고 일국의 지도자가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을 그 자리에 앉혔겠습니까? 앞으로도 기대가 큽니다.”
권성일의 과도한 칭찬이 더 이어질 것 같아 진혁이 눈짓을 하자 정호영이 가져간 서류를 펼치고 말했다.
“그간 회장님의 계획에 따라 주관사를 정했습니다. 발전소는 오양 그룹이 주도하는 컴소시엄이, 고속도로는 TG 그룹, 항만은 제일 그룹이 맡아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2억 달러 차관은 ODA 형식으로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연락이 오면 즉시 산자부 장관이 경제 사절단을 이끌고 방문할 계획입니다.”
이현국이 추가로 그간 정부 내에서 결정된 사항에 대해 들려주었다.
당연히 수고했다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진혁이 침묵하자 갑자기 대화가 끊겨 버렸다.
진혁은 오히려 정호영을 마뜩찮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흠, 흠.”
김세동의 헛기침 소리에 진혁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권성일에게 시선을 돌렸다.
“방글라데시는 200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높은 경제 성장을 해 오고 있습니다. 비록 천연 자원은 부족하지만 거대한 인구로 노동력도 풍부합니다. 이런 잠재력을 인정받아 BRICs를 이을 NEXT 11의 차세대 신흥 경제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
“탈중국화에 따른 대체 시장으로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인도네시아, 베트남, 미얀마. 세계적 기업들이 속속들이 들어가면서 그곳 역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임금이 급격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남들을 따라가면 뒤집니다. 한발 앞서 신 시장을 개척해야 합니다.”
“방글라데시에 더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말이오?”
“그렇습니다. 지금은 비록 최빈국으로 여러 가지 여건이 좋지 않지만 그게 오히려 우리에게는 기회입니다. 나즈마 총리는 ‘비전 2021’이라는 국가 장기 개발 계획을 발표하고 대규모 SOC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겨우 공단 하나 건설하자는 게 아닙니다.”
결국 답답함을 참지 못한 진혁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김세동이 허벅지를 누르며 그를 진정시켰다.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진정시킨 진혁이 말을 이었다.
“현재 국내 건설사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국제 유가 하락에 따른 중동 산유국들의 신규 개발 사업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방글라데시는 약 800개에 달하는 하천을 이용한 내륙 수운이 발달해 내륙 운송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요 운송수단인 소형 선박들이 대부분 노후하여 최근 안전에 문제 제기가 있었습니다. 이는 거제의 중소 조선소에게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
“방글라데시의 이동 통신망은 이제 겨우 3G를 시작할 정도로 열악합니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5G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기존장비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거기에 철도는 KTX의 빠른 전환으로 기존 선로와 차량이 창고에 쌓여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진출할 방법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크고 넓게 보시길 바랍니다.”
진혁이 말을 마쳤지만 다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건 일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다들 진혁이 한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입을 떼지 못하자 진혁이 어쩔 수없이 다시 말했다.
“나즈마 총리께서는 방글라데시 경제 개발의 모델로 한국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제게 ‘한강의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하셨습니다.”
“서 회장님의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만 저희도 검토를 안 한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재정이 너무 열악하다는 겁니다. 정부가 발표한 대부분이 민간이나 외국인 투자를 전제로 한 PPP(민관 합작 투자 사업) 방식이라 지지부진한 것으로 압니다.”
이현국도 그간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닌 듯 정확히 핵심을 찔러 왔다.
진혁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걸렸다. 그 역시 재원 마련이 제일 걱정이라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었다.
그 모습에 권성일 물었다.
“복안이 있는 겁니까?”
“2011년 방글라데시 정부는 수도 다카의 남쪽을 흐르는 파드마 강의 남과 북을 6.15킬로의 교량으로 연결하는 최대 국책 사업을 발표했습니다. 총 공사비는 30억 달러로 세계은행 차관을 받아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그 사업은 중단된 것으로 아는데요?”
“맞습니다. 세계은행이 컨설팅사 선정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정부 고위관료들의 부패 의혹이 있다며 일방적으로 차관을 철회했습니다. 나즈마 총리는 이를 비난하고 자체 예산으로 진행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재정이 열악해서 지지부진한 상황입니다. 아마 후회하고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걸 풀자는 말이오?”
“나즈마 총리는 불우한 시절을 겪어 자존심이 강하고 아무도 믿지 않는 외골수적인 성격입니다. 그래서 먼저 세계은행에 머리를 숙이지 못할 뿐, 누군가가 나서만 준다면 대환영일 겁니다. 그리고 세계은행이 남입니까?”
진혁의 농담에 다들 웃음을 지었다.
현재 세계은행 총재는 한국인이 맡고 있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무조건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이미 계획했던 사업이었다. 거기다 한국 정부가 보증을 서고 투명한 사업 진행을 약속한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대통령 집무실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파나마 대교 건설사업 자금이 해결되면 방글라데시가 잡아 놓은 자체 예산을 다른 SOC에 돌릴 수 있으니 진혁이 세운 계획의 자금 조달이 가능하게 된다.
권성일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말했다.
“이거 일이 엄청나게 커지는군요.”
“바쁘시겠지만 대통령께서 직접 방글라데시를 방문하셨으면 합니다.”
“암요. 가야지요. 아무리 바빠도 당연히 가야 할 일입니다.”
“가신 김에 한 가지 더 준비해 주셨으면 합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나즈마 총리께 공동 프로젝트 개발 펀드를 제안하십시오.”
“공동 프로젝트 개발 펀드요?”
“경제 용어로 PDF라고 부릅니다. 양국이 정부 간 협력을 강화하여 공동사업을 적극 발굴하고 추진하는 겁니다. 일본이 인도와, 중국은 아프리카 연합과 맺어 그 지역 사업의 주도권을 선점하고 있습니다.”
권성일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바로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방글라데시 경제 협력 방안을 마련하겠습니다. 서 회장님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건 안 됩니다.”
진혁이 대통령의 청을 단칼에 거절하자 분위기가 일순간에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전 나즈마 총리의 자문역으로 방글라데시의 국익을 위해 한국 정부의 제안을 냉정하게 판단할 겁니다.”
“하지만…….”
“그래서 제가 한 가지 방안을 마련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