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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76화 (176/307)

176화. 개성공단

“뭡니까?”

“국제건설을 제가 인수하게 해 주십시오.”

진혁의 말에 대통령 집무실이 폭격이라도 맞은 듯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국제건설은 대한민국 해외 건설의 신화를 쓴 대표적인 기업이었다. 하지만 IMF로 모그룹이 부도나면서 지금은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있었다.

연이은 공적 자금이 투입되면서 현재는 산업은행이 지분의 52%를 가진 최대 주주였다.

얼마 전에 매각 작업을 추진하다가 중단된 상태였다.

진혁이 말했다.

“매각이 중단된 이유는 첫째, 국민의 세금으로 살린 한국 대표 기업을 외국 자본에는 팔아서 안 된다는 여론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도급 순위가 낮은 기업에게 헐값 매각은 안 된다는 노조의 반대 때문이었고, 마지막으로는 국제 유가 하락에 따른 중동 산유국의 사정으로 해외 부문의 적자가 커졌다는 점이었습니다.”

“맞습니다. 여러 가지로 사정이 좋지 못했습니다.”

“국민들 중에 저를 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알라딘 그룹은 건설업은 처음 진출하는 것이니 노조도 더 이상 반대는 못 할 겁니다. 마지막으로 해외 부문은 방글라데시에 벌이는 사업으로 충분히 적자를 만회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인수하는 게 최선입니다.”

이현국과 눈을 마주친 권성일이 말했다.

“알겠네. 산업은행장에게 말해 둘 테니 잘 이야기해 보게.”

“제가 직접 나설 수 없는 건 아까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여기 정 사장님을 대리인으로 내세울까 합니다.”

“정 사장을?”

“제가 추진하는 일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능력도 있습니다. 믿고 맡기셔도 될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정 사장이 찾아가 보시오. 기대하겠습니다.”

“아, 열심히 하겠습니다.”

얼떨결에 대통령으로부터 치하를 받은 정호영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세부 사항은 이현국 비서실장과 정호영이 논의하는 것으로 하고 모두 일어나 나왔다.

이현국과 김세동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정호영이 얼른 다가왔다.

“이렇게 저한테 떠넘기고 빠지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번 일의 키는 방글라데시가 쥐고 있습니다. 전 그쪽에 집중해야 하니, 한국의 일은 정 사장님이 맡아 주셔야 합니다.”

“…….”

“다른 기업을 선정하고 태후를 배제한 것은 잘하신 결정이었습니다. 당장은 손해 같지만 나중에는 그게 더 큰 이득으로 돌아올 겁니다. 앞으로도 이번처럼 로힝야 난민 캠프 정호영의 마음으로 진행하시면 무리가 없을 겁니다.”

주저하는 정호영의 모습에 진혁이 다시 한번 힘을 실어 줬다.

“알겠습니다. 회장님을 믿고 로힝야를 위해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현재 산업은행은 지난 정권 때 떠안은 많은 부실기업 처리 문제로 시끄럽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제건설의 인수 제의를 반길 겁니다.”

“태후 그룹에도 매각 제의가 들어와서 사정은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매각 추진 당시 예정가가 2조 원이었답니다. 최대한 낮춰 보십시오. 정 사장님을 믿고 협상에 대한 전권을 드리겠습니다. 전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화가 끝났는지 김세동이 돌아섰다. 그를 따라가는 진혁의 등을 바라보며 호영의 눈빛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인영의 말이 맞았다. 진혁은 하나를 주면 두 개를 돌려주는 사내였다.

모두가 작은 이득에 집착하며 다툴 때 그는 일을 크게 키워 더 큰 이득을 얻고 있었다.

그런 자신감 때문에, 여러 번 해를 끼치려고 했던 자신에게도 이런 큰일을 맡길 수 있는 것이다.

“대단하신 분입니다. 서 회장님이 사장님을 선택한 것은 큰 행운입니다. 이 기회를 잘 살리시면 재계가 정 사장님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될 겁니다.”

다가온 이현국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그걸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원하던 기회가 온 것이었다.

아버지 정진호 회장의 말대로, 기회를 살리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 하기 나름이었다.

진혁은 김세동의 사무실로 가서 차를 마셨다.

“오 서방 때문에 고민이 많네. 지현이가 무조건 사표 쓰고 집에서 쉬게 하라는데, 젊은 놈을 방에 가둬 둘 수도 없고.”

“그 문제는 제게 생각이 있으니 걱정 마시고 조금만 더 지켜봐 주십시오.”

“알겠네. 그나저나 일이 엄청나게 커지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니 좋기는 한데, 지민이나 혜주를 생각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네.”

“저도 그게 마음에 걸립니다만 그렇다고 불쌍한 이들을 외면할 수도 없고…….”

일과 가족.

균형을 맞추는 게 사업을 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 같았다.

그때 진혁의 눈에 테이블 옆에 놓인 신문이 보였다.

일면 첫 기사의 제목.

北 “개성공단 임금 인상 협상하자!” 제안

진혁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북한이 개성공단 근로자들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네. 그 문제로 지금 골치가 아파. 최저 임금 5% 인상안은 우리도 받아들일 용의가 있는데, 갑자기 ‘담보서’를 요구하는 바람에 난항에 빠졌네.”

북한 측은 최저 월급을 5.18% 올리는 것은 물론, 지급하지 않은 인상분에 대해 입주 기업들이 ‘연체료’로 납부하겠다는 일종의 각서를 내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었지만 벼랑 끝 전술에 맛을 들인 북한이 주장을 꺾지 않고 있었다.

진혁이 이마를 찌푸리고 고민하는 모습에 김세동이 말했다.

“이 일 말고도 걱정할 게 많을 테니 자네는 사업에만 집중하게. 결국 인상률을 높이기 위한 전략이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이 되겠지.”

김세동이 희망적인 전망을 내놓았지만 진혁은 아니었다.

과거에 기억에 따르면 결국 협상이 결렬되고 개성공단은 폐쇄의 길을 걷게 되어 있었다. 그로 인해 입주 기업들이 겪은 고통은 심각했었다.

대통령이 바뀌어 상황이 변할지 모르지만 그것만 믿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사정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잘 해결되겠지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출구 전략을 세워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출구 전략을?”

“북한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지 않습니까. 물건을 잔뜩 쌓아 두고 있는데 갑자기 판문점을 막아 버리면 큰일입니다. 거기에 납기를 맞추지 못하면 지체 보상금까지 물어야 하니 손실이 클 겁니다. 만일을 모르니 미리 대비책을 세워 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네. 듣고 보니 내가 너무 안일했어. 그렇게 조치하는 게 좋을 것 같네.”

* * *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눈 진혁은 청와대를 나와 알라딘 코리아로 갔다.

고용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박 실장은 방글라데시에 도착해서 조사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제가 갑자기 이곳으로 오는 바람에 서로 엇갈렸지만, 권기남 공장장님이 계시니 잘하실 겁니다.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대용량 무채혈 혈당 측정기 테크론에 대해 미국 FDA의 승인이 떨어졌다는 것 말고 다른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AA의 선 사장님으로부터 방글라데시에 벌이는 사업에 대해 들었습니다. 이곳 역시 회장님의 부재가 길어질까 걱정스럽습니다.”

고용준도 선병식과 마찬가지로 진혁의 방글라데시 사업 확장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었다.

진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제주도에 은둔해 있는 동안 다들 무리 없이 그룹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결국 제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는 고 사장님이 AK를 이끌어 가셔야 합니다. 이건 선택이 아니라 무조건입니다.”

“…….”

“그렇게 마음먹고 계획을 세워 보세요.”

진혁이 일부러 독하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간 자신의 그늘에 가려 스스로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동행 사무실로 가자 직원들에 이어 우상우가 놀란 표정을 짓다가 물었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방글라데시의 일 때문에 급하게 들어왔습니다.”

사무실에 가서 앉자마자 우상우가 그간 각 동행 센터에서 얻은 성과들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어느 센터는 수출에 성공했고 어느 센터는 새로운 납품처를 발굴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었다.

큰 사업을 펼치는 진혁에게는 지루한 이야기였지만 말리지 않고 끝까지 들어줬다. 자신에게는 소소할지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한참 떠들던 우상우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회장님 앞에서 추태를 부렸습니다.”

“아닙니다. 듣는 것만으로도 다들 열심히 해 주시고 있다는 게 느껴집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저야 회장님이 지시한 대로 따랐을 뿐인데요. 참, 이유영 씨 부부가 회장님이 오시면 꼭 한번 찾아와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유영 씨 부부요?”

“지난번에 회장님이 오셨을 때 만나신 영주의 사과 농장주 부부입니다.”

“아, 사과 모듬 세트는 어떻게 됐답니까?”

“아주 대박을 터트렸답니다. SNS에 올라온 이야기를 보고 직접 찾아오는 분들 때문에 카페도 손님으로 미어터진답니다. 체험 농장까지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잘됐군요. 그런데 그게 끝입니까?”

진혁의 날카로운 질문에 우상우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동안 회장님께 혼난 게 얼마인데 이런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소식지에 시리즈로 세세하게 알렸더니 여기저기서 각종 모듬 세트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잘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됩니다.”

진혁이 크게 치하를 하자 우상우의 미소가 더 넓어졌다. 하지만 이어진 진혁의 말에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전국 귀농인 지원 센터는 어떻게 하고 있답니까?”

“……상황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관심이 동행으로 쏠리다 보니 지원금도 줄고 조합원들도 이쪽으로 많이 넘어왔을 겁니다.”

“이제 그들을 받아들이세요.”

“또 다시 쓸데없는 이념 논쟁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랑하셨듯이 동행 센터를 잘 이끄시고도 그리 말씀을 하시면 안 되지요. 친환경 생태농은 구조적으로 소규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의 동행 역량이라면 그 정도는 충분히 포용해도 됩니다.”

“…….

“과거의 기억 때문에 꺼려진다면 동행 가족들을 믿으십시오. 이제 각 지역에서 당당히 자리 잡으셨습니다. 어떠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만큼 그들이 대표님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말씀을 믿고 제의해 보겠습니다.”

우상우의 굳은 결심에 진혁은 이곳은 이제 그에게 맡겨도 되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 내 사업 전체를 둘러보고 나온 진혁의 마음은 무거웠다.

다들 잘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현재만의 이야기였다. 누구도 미래에 대한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그 일은 회귀한 자신이 처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들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진혁은 곧장 희준이 입원한 입원실로 갔다.

희준이 편하게 침대에 누워 지현이 건네준 사과를 받아먹고 있었다.

“아주 팔자가 좋다.”

“어서 와. 너도 같이 먹자.”

“됐다. 처제한테 무슨 소리를 들으라고.”

“드세요, 형부. 그리고 고마워요.”

까칠 마녀의 대명사인 지현이 눈웃음까지 치며 포크에 찍은 사과를 내밀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혁이 받아먹자 지현이 일어났다.

“의사 선생님이 보자고 해서 좀 다녀올게요.”

“어. 천천히 다녀와.”

환한 얼굴로 손까지 흔들던 희준이 지현이 나가자마자 바로 으르렁거렸다.

“너 인마, 그럴 수가 있어?”

“뭘?”

“회사에서 한 달간 휴가를 줬어. 김 부사장님이 직접 전화까지 하셨단 말이야. 그새 쪼르르 일러바치냐?”

그제야 진혁은 왜 지현이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김선혁에게 부탁한 게 아니었다. 아마 정호영이 알아서 처리한 모양이었다.

어떻든 상관없었다.

“잘됐네. 푹 쉬어라.”

“지현 씨가 연가를 내고 옆에서 간병하겠대. 너도 그 성격 알잖아?”

“알지. 나 같으면 그냥 출근한다.”

“이 자식이, 확!”

진혁의 농담에 희준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퇴근하면 나랑 해외여행이나 가자.”

“내가 너랑? 남자들끼리 뭔 재미로.”

“그럼 처제랑 붙어 지내든지.”

“진혁아, 아니, 형님. 제가 극진히 안내하겠습니다.”

희준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얼마간 이런저런 쓸데없는 농담을 하다가 희준이 주변을 둘러본 후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야, 너 그거 있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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