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77화 (177/307)

177화. 희준과 함께

“이거 말이야, 이거.”

희준이 손가락 두 개로 담배 피우는 흉내를 냈다.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이건 안 되네. 딱 한 대만 피우면 소원이 없겠다.”

“이 자식이. 끊어, 인마.”

“그게 말처럼 쉽냐?”

“난 끊었잖아. 태어날 애를 생각해서 끊어.”

“그래서 네가 독한 놈이지. 울 아부지가 담배 끊는 놈하고는 상종을 말라고 하셨는데.”

“이게.”

그때 뒤에서 째지는 소리가 들렸다.

“형부!”

지현이 어느새 뒤에 와 쌍심지를 켠 채 노려보고 있었다.

진혁이 얼른 손을 내리고 변명했다.

“처제, 그게 아니라…….”

“진혁이가 휴가 받은 김에 해외여행가자고 해서 자기랑 있기로 해서 못 간다고 했더니 저러네.”

“잘했어요, 울 자기. 형부 그렇게 안 봤는데 못됐네요.”

“헐.”

아주 쌍으로 몰아붙이니 기가 막혔다.

결국 병원에서 쫓겨난 진혁은 집에 일찍 들어가 혜주와 시간을 보냈다.

저녁을 먹고 혜주를 재우고 돌아오자 지민이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희준 씨는 내일까지 경과를 보고 문제없으면 모레는 퇴원할 수 있대요.”

“잘됐네.”

“그럼 또 떠나셔야겠네요.”

“미안해요. 하지만…….”

“알아요. 아빠에게 당신이 방글라데시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고 그게 얼마나 국익에 큰 도움이 되는지도 들었어요.”

지민의 말에 진혁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잊고 있던 고민거리가 다시 떠올랐다.

지민이 물었다.

“로힝야라고 했나요?”

“그래요. 불쌍한 민족이죠.”

진혁이 로힝야족의 기구한 운명에 대해 들려줬다.

지민은 이미 인터넷으로 찾아봐서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들었다. 이야기 내내 진혁이 그들을 얼마나 생각하는지 느껴졌다.

“난 당신을 알아요. 당신은 공단 건설만 해 주고 끝내지는 않을 거예요.”

“맞아요. 난 그들을 공장 노동자로 만들려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니오.”

“그럼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기약 없는 일이네요.”

“…….”

진혁은 답을 하지 못했다.

로힝야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동안 지민과 혜주는 희생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난민 캠프에서 자신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로힝야의 소망을 모른 체할 수도 없었다.

지민이 말했다.

“우리가 갈게요.”

“……?”

“나랑 혜주가 당신 곁으로 간다고요.”

“여보!”

“당신 곁에서 당신과 함께 그 일을 할게요. 그게 혜주에게도 좋을 것 같아요. 생각해 보니 우리 모녀가 제일 행복할 때가 제주에서 살 때였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니 도울 일은 천지일 거잖아요.”

“고맙소.”

진혁이 지민을 꽉 껴안아 줬다.

사업을 하면서도 항상 마음 한구석은 답답했다.

어렵게 회귀한 것은 가족에게 충실하지 못했던 지난 삶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리 쉽지 않았다.

지민이 자신을 위해 어렵게 내린 결정임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더 무거웠다.

* * *

다음 날, 식구들과 아침을 먹고 밖으로 나오자 검은 색 차가 다가와 섰다.

조수석 문이 열리고 내린 이는 정호영이었다.

진혁이 말했다.

“바쁘신 분을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빠도 와야지요, 공단 관련 일이라는데.”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진혁이 뒷자리에 타자 정호영이 다시 조수석에 앉았다.

차가 도착한 곳은 혜화동에 있는 기독교 총 연합회 건물이었다.

정호영이 미리 약속을 잡아 연합회장과 사무국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진혁입니다.”

“김일중이오.”

정중한 인사에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다.

김일중도 진혁은 물론 알라딘 그룹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최근 알라딘 그룹에 대해 회원들이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그들의 주 대상이 무슬림이라는 게 문제였다.

특히나 동행 센터에 기도실을 설치한 것에 대해서는 단체 행동이라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진혁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가 높고, 대통령이 직접 지시한 사업이라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진혁은 그런 분위기를 우상우에게 들었다. 일부 지역에서 그곳 교회와 마찰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직접 찾아온 것이다.

“제가 이번에 방글라데시에 대규모 공단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요?”

“교회를 지으려고 하는데 선교사를 파견해 주십사 부탁드리려고 왔습니다.”

“방글라데시는 무슬림 국가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슬람교도가 88%에 힌두교도가 10% 정도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도는 0.3%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세우시겠다고요?”

김일중이 믿기지 않는 얼굴로 물었다.

“제가 한국인이다 보니 아무래도 한국 근로자들이 많이 근무하게 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세계적인 기업들이 들어올 거고, 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일 겁니다. 그분들의 종교를 존중해 줘야지요.”

“맞습니다. 단 한 명이 믿더라도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지요.”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고객의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보니 동행 센터에 기도실을 설치했습니다. 제가 사업가라서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럼요. 당연히 이해합니다.”

“파견 선교사를 서둘러 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교회를 짓는 것부터 자문을 구하려고 그럽니다. 부탁드립니다.”

“염려 마십시오. 아주 유능한 선교사로 준비하겠습니다.”

“세부적인 것은 여기 정 사장님이랑 상의하시면 될 겁니다. 필요한 것들은 언제든지 말씀하시면 최대한 반영하겠습니다.”

진혁의 눈짓에 정호영이 얼른 명함을 건네줬다.

처음과 달리 김일중이 직접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와 배웅을 해 줬다.

두 사람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한국 산업 단지 공단이었다.

방글라데시 공단을 생태 산업 단지(EIP)로 개발하기 위해서였다.

EIP는 산업 단지에서 발생되는 폐부산물을 자원으로 재이용하는 순환 시스템을 구축, 지속 가능한 친환경 산업 단지로 전환시키는 사업이었다.

치타공도 한국 산업 단지 공단이 컨설팅을 해서 방글라데시 사정에 익숙하다는 장점이 있었다.

진혁은 다시 한번 정호영에게 명함을 주게 하는 것으로 오전 일정을 마치고, 함께 점심을 먹으며 공단 관련 진행 사항을 들었다.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정호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 하십니다.”

“전화 오는 곳들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만나려면 모두 만나야 합니다. 이번 일이 결정될 때까지는 미뤄 주십시오.”

“아버지도 이해하실 겁니다. 잘 이야기 드리겠습니다.”

정호영은 어느새 정진호보다 진혁의 말을 우선으로 생각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오후 일정은 각자 움직이기로 해서 식당에서 헤어졌다.

* * *

다음 날 아침.

진혁과 희준은 지현의 엄청난 잔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인천 공항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너도 참 고생이 많다.”

“내 걱정을 해 주는 거잖아. 지현 씨가 얼마나 자상한데.”

“내가 말을 말아야지.”

진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카 공항에 도착하자 샤물이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다. 차를 타고 사무실로 가자 아노아르는 물론 이영석도 기다리고 있었다.

“회장님 일이라고 본사의 손기성 부장님이 서둘러 후임자를 보내 주셨습니다.”

“도움을 너무 많이 받아서 이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기도 죄송스럽네요.”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손 부장님은 오히려 회장님을 도울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보고도 잘 모시라고 여러 번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 고마움을 보답하는 길은 이곳의 일을 잘 처리하는 겁니다. 일단 직급은 부장으로 합시다. 자, 그럼 또 열심히 달려봅시다.”

힘차게 외친 진혁은 옆에 서 있는 희준을 소개해 줬다.

휴가를 받아 방글라데시 여행을 시켜 주려고 데려왔다고 했다.

샤물을 통해 희준에게 화장품 공장 구경을 시켜 주라고 하고 이영석, 아노아르에게 청와대에 들어가서 나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헉. 그럼 40억 달러가 넘는 대형 프로젝트가 된 겁니까?”

“그렇습니다. 방글라데시와 한국 정부 간의 국가적인 사업으로 규모가 커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총리 자문역을 맡고 있어 공단 건설에만 매달릴 수만은 없습니다. 이 부장님의 역할이 중요하게 됐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만…….”

“이곳 사무실은 이제 이 부장님이 책임지고 운영하셔야 합니다. 필요한 인력이 있으면 얼마든지 충원하세요. 전권을 드리겠습니다. 양국 정부의 일이나 공단 건설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알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자신을 믿고 맡겨 준다는 말에 이영석이 마침내 의지를 보였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 안정적인 직장을 박차고 나왔다. 가족까지 불러들였는데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곧 희준이 샤물과 함께 돌아오자 진혁은 다카 공항으로 갔다.

비행기 창으로 끝없이 펼쳐진 해변을 보고 희준이 감탄을 터트렸다.

“이야, 해변이 아주 끝없이 이어지네.”

“150킬로가 넘어.”

“아주 죽인다, 죽여. 쭉쭉빵빵도 많겠지?”

희희낙락하는 희준의 모습에 진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권기남도 처음 이곳에 올 때 그런 꿈에 부풀어 있었다.

공항 밖으로 나오자 밤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함께 공장으로 갔다.

제2공장까지 완공이 되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서 원단들이 만들어져 나오고 있었다.

밤방에게 안내하라고 희준을 보내고 나자 박이동이 얼른 다가와 보고했다.

“회장님 예상이 맞았습니다. 해안가 땅값이 하루가 다르게 뛰고 있습니다. 공단 건설 계획이 사전에 유출된 게 틀림없습니다.”

“더러운 놈들.”

진혁이 이를 갈았다.

박이동을 급히 이곳으로 보낸 것은 공단 예정 부지 땅값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는 한국도 정부 개발 계획의 사전 유출 문제가 심심치 않게 거론되고 있는데, 부정부패가 만연한 방글라데시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대책은 강구해 보셨습니까?”

“그게 쉽지 않습니다. 해안 쪽이 안 되면 수로를 따라 건설해야 하는데, 자이라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확장이 어렵습니다.”

“지도부터 봅시다.”

박이동이 위성 지도를 펼쳐보였다.

소나르 서쪽은 벵갈 만에 접해 있고 북쪽은 레주 수로가 흐르고 있었다.

박이동의 말대로 해안과 내륙이 자이라 산자락에 가로막히고 있어 도로도 터널을 뚫어 연결되어 있었다.

박이동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소나르 만부터 도로 위쪽은 국유지라 불하받는데 문제가 없는데, 항만 부지를 제외하면 최대로 잡아도 100헥타르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

“일단 그 정도만 공단 조성을 하고 나머지는 상황을 봐 가면서…….”

“그건 안 됩니다.”

진혁이 단박에 말을 막았다.

200헥타르의 공단을 조성하기로 하고 겨우 로힝야의 거주지를 이곳까지 확장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부지를 반으로 줄인다면 나즈마 총리는 가차 없이 그 일을 없던 것으로 할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되면 공단을 조성하는 의미가 없어진다.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진혁에게 박이동이 우려의 말을 했다.

“혹여라도 자이라산을 깎으시겠다는 생각은 마십시오. 토목 공사비가 엄청나게 들어갈 겁니다. 배보다 배꼽이 커집니다.”

그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듣던 진혁이 수로를 따라 길에 띠 모양을 하고 있는 회색의 땅을 보고 물었다.

“이건 뭡니까?”

“하천 부지입니다. 제방이 없으니 우기에는 수로가 넘쳐서 늪으로 변하는 쓸모없는 땅들입니다.”

“이건 누구 소유인가요?”

“보통은 하천 부지는 국가 소유이긴 한데……. 맞습니다. 국토부 땅입니다.”

박이동이 서류를 보고 확인시켜 줬다.

“국가 소유란 말이지요?”

진혁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그때 산통 깨는 소리가 들렸다.

“야, 밥 먹고 하자.”

공장 구경을 끝낸 희준이 다가오고 있었다.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너, 이씨.”

“우리 여보야가 약 먹어야 한다고 밥 제때 꼭 챙겨 먹으라고 했단 말이야.”

“아주 꼴값을 떨어라.”

핀잔을 하던 진혁의 눈에 일단의 차량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밥 차가 오는 모습에 진혁이 서둘러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저도 다양한 각도로 고민을 해 볼 테니 박 실장님도 더 생각해 보십시오.”

“며칠째 고민해 봤는데 도저히…….”

“무조건 200헥타르 이상을 확보해야 합니다. 돈을 더 주고 구입하는 한이 있더라도. 무조건입니다.”

“알겠습니다.”

워낙 강하게 말하니 박이동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하고서 진혁은 샤물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희준과 함께 난민캠프를 방문했다.

관광을 온 것이라 생각하고 있던 희준이 내내 웃고 떠들더니 검문소를 지날수록 얼굴이 굳어지며 말이 줄어들었다.

난민 캠프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방글라데시 정부 서기인 파브가 작업모를 쓰고 있는 사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진혁을 알아보고 얼른 달려왔다.

“어쩐 일이십니까?”

“시에라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비번이라 댁에서 쉬고 있다고 해서요.”

“안에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계획이 있으시면 미리 말씀 좀 해 주시지, 괜한 고생을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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