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마지막 안배
“갑시다.”
진혁이 군인을 따라 헬기에 오르자 바로 다시 날아올랐다.
멀어지는 헬기를 바라보는 희준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들의 묻어 있었다.
총리실로 가자 나즈마 총리가 낯선 사내와 함께 정호영과 면담 중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
“한국 대통령의 뜻을 전달하러 오신 것 아닌가요?”
급히 일어나 인사하려던 정호영이 진혁의 지적에 얼른 입을 닫았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은 권성일 대통령의 명을 받아 사전 협의를 위해 온 신분이었다.
그에 반해 진혁은 나즈마 총리 자문역이었다.
지금은 공적인 논의를 하는 자리였다.
“산업부 장관이에요.”
“피주르 쵸두리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서진혁입니다.”
자리에 앉자 나즈마 총리가 말했다.
“한국 정부에서 공동 프로젝트 개발 펀드를 제안해 왔어요. 기존 논의된 사업 외에 파드마 대교 건설의 중단된 세계은행 차관을 풀어 주고 다른 민관 합작 투자 사업도 함께 진행하자는 계획도 세워 왔어요.”
“공동 프로젝트 개발 펀드는 긍정적으로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각 개별 사안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사료됩니다.”
“서 회장이 구상한 계획 아닌가요?”
“한국 청와대에서의 일입니다. 여기는 방글라데시 총리실이고요.”
진혁의 단호한 태도에 나즈마 총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마음에 든다는 표현이었다.
진혁이 정호영에게 말했다.
“한국 정부의 안을 봅시다.”
“여기 있습니다.”
정호영이 가져온 자료를 내밀자 진혁이 꼼꼼히 검토했다.
자신이 들려준 계획에 기초해서 작성된 것이라 파악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자료를 내려놓으며 진혁이 말했다.
“훌륭한 계획입니다만 너무 일방적으로 한국 정부에 유리하게 계획된 것 같습니다.”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우선 파드마 대교 건설 관련해서, 이 계획대로라면 이건 한국에서 하는 건설 사업 같습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파드마 대교 건설은 방글라데시 정부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한국 정부는 세계은행의 차관을 푸는 역할입니다. 그걸 확대 해석하시면 곤란합니다.”
“방글라데시 정부 사업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업에서 핵심은 세계은행 차관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는 길은 한국 정부가 주도적으로 사업 진행을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그 부분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것은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차관 수여자는 엄연히 방글라데시 정부입니다. 문제가 된 컨설팅사 선정이나 사업 관련 조언은 듣겠지만, 사업 진행은 방글라데시 정부가 해야 합니다. 그게 무시된다면 이번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진혁의 완고한 태도에 정호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방글라데시의 자문역으로 행동하겠다고는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잠시 당황했지만 정호영도 태후 그룹의 황태자였다. 심호흡으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물었다.
“좋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하기를 원하십니까?”
“양국이 참여하는 파드마 대교 건설 위원회 구성을 제안합니다. 위원회는 양측이 동수로 구성하고, 의장은 방글라데시 정부가 맡는 것으로 하지요.”
“대표를 방글라데시 정부가 맡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기 전에 세계은행과 협의를 했는데, 방글라데시 정부 주도 방식이라면 입장 변화가 어렵다는 뜻을 전달받았습니다.”
진혁의 시선을 받은 나즈마 총리가 고개를 저었다.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현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혁이 말했다.
“의장은 총리께서 임명하시고 한국은 부의장을 맡는 것으로 합시다.”
“그건 아까 말씀드렸…….”
“총리께서 임명하신 의장님이 연세가 많으십니다. 입원이라도 하시면 즉시 부의장에게 그 권한이 인계됩니다.”
“그렇다면 저희 쪽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절묘한 계책에 탄복한 정호영에게 진혁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파드마 대교 건설 위원회의 실질적인 운영 주체가 한국 정부가 되었으니, 추가적으로 사업비 확보에 대해서도 맡아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
“세계은행이 약속한 차관은 12억 달러입니다. 나머지는 ADB(아시아개발은행), JICA(일본국제협력기구) 등이 제공하기로 했다가 보류된 것이니 그 부분에 대한 처리도 해 주셔야겠습니다.”
“……그 건에 대해서는 제가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기 곤란합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지금까지의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어차피 정호영은 매파라 결정권이 없었다. 이쪽의 의견을 듣고 방글라데시의 말을 청와대에 전달하는 역할이었다.
이후에도 진혁은 철저하게 방글라데시 총리 자문역으로 행동했다. 덕분에 정호영은 여러 번 곤란한 상황에 처해 땀을 흘려야 했다.
어느 정도 논의가 마무리되자 나즈마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국가 장기 개발 계획, ‘Vision 2021’을 차질 없이 수행할 겁니다. 오늘은 비록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앞으로 양국이 협력할 기회는 많습니다. 나는 한국 정부가 제일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을 잊지 않을 겁니다. 대통령께 이 말씀을 꼭 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총리님의 마음에 감사하실 겁니다.”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정호영이 빠르게 나갔다. 오늘 논의된 내용을 청와대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야했다.
나즈마 총리가 진혁을 보고 말했다.
“서 회장의 능력을 믿고 자문역을 맡겼는데 이렇게 잘해 줄 줄은 몰랐어요.”
“제가 왜 최선을 다하는지는 총리께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소나르 공단 건설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인가요?”
“건설 계획이 유출되어 예정 부지의 땅값이 크게 올랐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지요?”
쵸두리 국토부 장관이 뜨끔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저희 쪽은 아닙니다.”
“당장 알아보고 근원지를 파악해서 보고하세요.”
쵸두리가 서둘러 나가자 나즈마가 말했다.
“어떤 상황인지 조사하면 밝혀질 겁니다.”
“발설자를 색출한다고 해도 이미 올라 버린 땅값을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안을 가져왔습니다.”
“뭔가요?”
진혁이 박이동에게 받은 위성 지도를 펼쳐 놓고 말했다.
“소나르만 일대 100헥타르의 땅은 국유지라 불하해 주시면 됩니다. 문제는 나머지 100헥타르를 해안가를 따라 건설하려고 했는데 어렵게 됐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수로 쪽 하천 부지를 이용해 건설할까 합니다.”
“내가 도와줄 일이 뭔가요?”
“보시다시피 자리아 산자락이 중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여기를 개간해서 나온 흙으로 하천을 매립해 공단 부지로 만들 생각입니다.”
“좋아요. 이 일은 내가 처리해 줄 테니 서 회장은 한국과의 일을 마무리 지어 주세요. 파드마 대교는 반드시 건설되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총리님의 약속을 믿고 이쪽 일에 집중하겠습니다.”
총리실을 나온 진혁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전 계획을 마쳤습니다. 이제 그쪽에서 결정을 확인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말만 하고 통화를 마친 진혁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 * *
사무실로 가자 샤물이 건너와 있었다.
“오 사장님은 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고생했다.”
그곳에서 무엇을 얻을지는 희준의 선택이었다.
자신은 여기 일에 집중해야 했다.
이영석에게 총리실에 대화한 내용을 들려주고 대책을 세우게 한 뒤 샤물과 함께 다카 공항으로 가 바게르 하트행 비행기를 탔다.
손님은 몇 명 되지 않았고 도착한 바게르 공항 시설도 형편없었다.
“관광객들이 줄어 조만간 공항이 폐쇄될 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관광객이 안 와서가 아니라 공항 시설부터 이러니 관광객이 못 오는 것이었다.
바게르 하트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작은 도시였다.
‘모스크의 도시’로 부릴 정도로 많은 모스크가 있었다.
그중에 가장 유명한 곳은 굼바드 모스크로, 방글라데시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고 싶어 하는 이슬람 성지였다. 지붕이 첨탑 대신 60개의 돔으로 이루어진 게 특징이었다.
200타카의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 안내 데스크에 용건을 말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성직자 복장의 사내가 다가왔다.
“이크발 아콘지입니다. 서울 모스크의 나흐얀 이맘께 연락을 받았습니다.”
“서진혁입니다. 바쁘실 텐데 폐를 끼친 게 아닌가 합니다.”
“우리 형제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집트 알-아즈하르 대사원의 아메드 울라마께서도 따로 전화를 주셨고요.”
“고마우신 분들입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모스크를 짓고 싶어서입니다.”
진혁은 로힝야를 위한 공단 건설 계획에 대해 들려주었다.
“모스크 건축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파견도 부탁드립니다.”
“당연히 저희가 도와드려야 할 일입니다. 언제든지 준비되시면 연락만 주십시오.”
그렇게 얼마간 더 대화를 나누고 그곳을 나왔다. 비행기가 하루 한 편씩밖에 없어 서둘러 돌아가야 했다.
샤물을 박이동에게 가라고 하고 진혁은 다시 국제선 비행기를 탔다. 인도, 티베트를 거쳐 이탈리아까지 다녀와야 하는 먼 여정이었다.
* * *
최종적으로 진혁이 도착한 곳은 영국이었다. 유니로브의 본사로 가자 메이슨 회장이 반갑게 맞아 줬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잘 왔습니다. 서 회장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부터 듭니다. 그동안 사회 활동가랍시고 떠들고 다녔는데, 로힝야 문제를 서 회장에게만 떠넘기고 나 몰라라 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제가 원해서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사업가가 사업을 해야지, 봉사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봉사라니요. 과한 말씀입니다. 전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방글라데시에 공단을 조성하기로 했습니다.”
진혁이 방글라데시에서의 일을 말했다.
“공단까지 건설한다니. 대단합니다.”
“로힝야도 돕고 제 사업도 고려하다 보니 일이 좀 커졌습니다. 그러니 봉사라는 말씀은 거둬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공단이 건설되면 유니로브가 제일 먼저 입주하겠습니다.”
“미리 감사드립니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메이슨이 본론을 꺼냈다.
“그런데 주드 모건은 왜 만나려고 하는 것이오?”
“미래를 준비하려고요. 앞으로는 인공 지능이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한다고 하잖습니까?”
“물론 그렇지만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세상은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허황된 가상 세계입니다.”
전통 제조업에서 평생을 보낸 메이슨이라 진혁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여기 온 목적은 메이슨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었다.
“약속은 됐습니까?”
“어렵게 잡았습니다. 천재들은 괴짜라고 하더니. 허참.”
메이슨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유니로버는 영국은 물론 세계 생필품 시장을 좌지우지하는 거대 기업이었다.
그런 그가 겨우 벤처 기업 수준에 머물고 있는 자에게 사정했다는 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진혁이 아니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상당히 괴팍한 자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는 모르겠지만 서 회장도 각오 단단히 하셔야 할 겁니다.”
약속을 잡으면서 쌓인 게 많은지 메이슨이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주의를 줬다.
주드 모건을 만난 곳은 템스 강이 바라다보이는 포터스 필즈 공원의 벤치였다.
시간도 인적이 드문 새벽녘이었다.
헝클어진 더벅머리에 면 티와 청바지, 운동화가 마치 집에서 자고 일어나 산책을 나온 모습이었다. 메이슨이 왜 그렇게 치를 떨었는지 느껴졌다.
‘흠, 쉽지 않겠군.’
하지만 자신도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디 누가 이기나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