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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81화 (181/307)

181화. 뜨거운 맛

“그건 안 됩니다. 그럼 세계 언론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간신히 달래 놓은 세계은행이 다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 자체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일입니다. 그들에게 구걸할 생각은 없어요.”

“야당의 반발은 어쩌시려고요?”

“그건 국민들이 판단할 겁니다. 난 어떠한 경우라도 부당함은 용인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입니다.”

나즈마가 강하게 나오자 진혁이 오히려 화가 빠르게 식어 갔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처리해서는 좋을 게 없었다. 로힝야에게도, 한국 정부에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쵸두리의 모습에 진혁이 나즈마 총리에게 말했다.

“제게 시간을 조금 주십시오.”

“서 회장은 나와의 약속을 몇 배로 지켜 줬어요. 이번에는 내가 약속을 지킬 차례입니다. 날 거짓말쟁이로 만들지 마세요.”

“총리님의 마음은 잘 압니다. 저 역시 로힝야에게 약속했습니다. 그건 반드시 지킬 겁니다. 하지만 그게 꼭 이런 식일 이유는 없습니다. 제가 대책을 세우겠습니다.”

“…….”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반드시 방법을 강구해 내겠습니다.”

“좋아요. 서 회장을 믿고 기다리겠어요. 하지만 오래는 아닐 겁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나온 진혁은 사무실로 갔다.

이영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노아르는 처음 보는 진혁의 굳은 표정에 눈치만 보느라 입도 떼지 못했다.

이영석에게 총리실에서의 대화 내용을 들려주고 말했다.

“모든 정황으로 봐서 분명히 누군가 사전에 치밀한 계획 하에 소르나 공단 건설을 막은 겁니다. 범인을 반드시 찾아내세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반드시 찾아낼 테니 회장님은 좀 쉬십시오. 안색이 너무 안 좋습니다.”

어제 먹은 술이 덜 깬 상태로 큰일을 겪어서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결국 사무실을 나온 진혁은 호텔로 돌아가 쉬었다. 그 역시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느끼고 있었다.

몸이 건강해야 정신도 맑아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이영석으로 연락이 온 것은 저녁때였다.

대장금으로 바로 달려갔다.

VIP 룸에 들어가 앉자마자 물었다.

“알아냈습니까?”

“BGMEA(방글라데시 의류 제조, 수출 업체 협회)의 주유엔 회장이 주도한 일이었습니다.”

“그자가 왜요?”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BGMEA는 회장님의 행보를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다카공 알라딘 화장품 공장의 임금을 최저 임금 이상을 주고 있지 않습니까.”

“더 주는 것이 문제가 됩니까?”

“그로 인해 본인들 공장의 근로자들도 임금 인상을 요구할 거라는 우려 때문이지요. 외국 기업이 들어와 경제가 발전하면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을 잃게 될까 봐 외국인 직접 투자도 막으려고까지 한 이들입니다.”

“미친…….”

“BGMEA의 회원들은 현지인 공장주들인데, 대부분은 정계 인사들의 가족들이 운영하고 있어 힘이 막강합니다. 주유엔 회장만 하더라도 정권의 실세인 국방장관의 삼촌입니다.”

단단하게 굳은 진혁의 표정을 보며 이영석이 자료를 건네주고 말했다.

“박이동 실장님이 보내 주신 자료를 분석해 보니, 소나르 해안가 땅을 최근에 매입한 게 주유엔 회장과 BGMEA 간부들의 가족이었습니다. 거기에 쵸두리 산업부 장관의 친인척들 이름도 나타났고요.”

“아주 더러운 놈들이군요.”

“정재계 인사들이 다수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걸 밝히시면 대형 스캔들로 번져 야당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나즈마 총리도 곤란한 지경이 될 테니 갈수록 첩첩산중입니다.”

이영석의 말에 화가 끓어오르는지 진혁은 자료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 소주병을 통째로 들고 마셨다.

대화는 더 이상 없었다. 이영석은 진혁의 빈 잔에 술을 채우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다였다.

피로가 풀리지 않은 몸으로 연이은 과음을 하자 진혁은 빠르게 취했다.

그런 진혁을 이영석은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이 봐도 진혁은 지금 미친 짓을 벌이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가 이곳에 한 일만 가지고도 극빈 대접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사사건건 발목을 잡은 것도 모자라 억지로 내쫓으려 하고 있었다.

로힝야만 아니었다면 다른 나라로 옮기자고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샤물까지 불려나와 인사불성이 된 진혁을 호텔까지 옮겨야 했다.

* * *

“아이고, 죽겠네.”

깨어난 진혁의 입에서 곡소리가 절로 났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속은 울렁거렸다.

거의 기다시피 해서 밖으로 나온 진혁이 억지로 입을 열었다.

“샤물, 물.”

건네주는 컵을 받아 거침없이 마셨다. 차가운 물이 들어가자 정신이 조금 들었다.

“고맙…… 어? 네가 어쩐 일이냐?”

“이 지랄하고 있을 것 같아서 왔어.”

난민 캠프에 있어야 할 희준이었다.

“학교는 어떻게 하고?”

“정호영 사장이 잠깐 들렀는데 선생님도 데려왔더라. 내가 정 사장을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머리 울린다. 천천히 말해라. 샤물은?”

“네가 시킨 일이 있다면서 그 일 때문에 나간다고 했어.”

“해장이나 하러 가자.”

“여긴 금주 국가 아니야?”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어딨…… 아니, 한국인이 있는데 안 되는 게 어딨냐? 금방 준비하고 나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진혁이 무거운 몸을 움직여 서둘러 채비했다.

대장금으로 가자 종업원들이 억지로 웃음을 참는 모습에 희준이 한 소리했다.

“아주 어제 쇼를 했나 보구나.”

“이 자식은 여기까지 와서 잔소리야.”

뜨거운 육개장 국물에 소주가 들어가자 울렁거리던 속이 겨우 진정이 되었다.

“이런 좋은 곳이 있었으면 얼른 데려왔어야지.”

탁.

진혁이 소주병으로 향하는 희준의 손을 내리쳤다.

“환자가 무슨 술이야?”

“의사가 수술 잘됐다고 했다며. 이 정도는 괜찮아.”

“처제한테 전화해?”

“치사한 놈.”

지현에게 단단히 주의를 들었는지 희준이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대신 물컵을 쥐었다. 마누라가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진혁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려 희준이 말했다.

“공장은 여전히 가동이 중단된 상태야. 시위대가 여전히 막고 있어서 경찰들이 로힝야의 난민 캠프 외출을 금지시켰어. 어떻게 할 생각이냐?”

“하루아침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여기 오기 전에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힘들게 산다고 생각했어. 잘나가는 너와 비교되는 것도 싫었고. 그런데 지금 네 꼬라지를 보고 열악한 난민 캠프의 로힝야를 생각하니 내가 참 행복했구나 하고 느껴지더라.”

희준을 이곳에 데려온 목적이 이루어졌지만 진혁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더 큰 난관이 여전히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시에라 씨가 너 만나면 전해 주라던 말이 있어.”

“……?”

“자신들은 걱정 말라고 하더라. 쿠투팔롱이나 소나르나 고향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라고. 고향에서 멀어지는 게 내키지 않았는데 오히려 잘됐다는 말도 했어. 죽기 전에 고향 땅만 밟아 볼 수 있게 해 주면 되니, 지금 너무 힘들면 고집 부리지 말고 물러서도 괜찮다고 했어.”

진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지금 더 힘든 것은 그들일 텐데도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시면서 고행 땅을 밟아 본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셨었다.

희준이 말을 이었다.

“넌 난민 캠프의 집들이 동쪽을 향해 지어진 것 모르지?”

“그랬어?”

“보통 남쪽으로 짓잖아. 그래서 이유를 물어봤더니 그쪽이 미얀마 방향이라고 하더라고.”

“……!”

“난 서울 태생이라 고향이라는 것에 대한 느낌이 없어. 그런데 여기 와서 고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러고 나니까 네 할아버지가 속초에 터를 잡으신 이유가 이해되더라고.”

소주잔을 다시 드는 진혁을 보고 희준이 말을 이었다.

“난 잘 모르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어.”

“뭐가?”

“넌 로힝야를 위해 하는 일이라는데, 그들은 오히려 소나르로 옮겨 가는 걸 싫어해. 그런데 왜 소나르에 그렇게 집착해?”

“……!”

“여긴 최빈국이라 개발 안 된 땅은 엄청 많을 거 아니야. 버려진 난민 캠프도 많다며? 물론 지금 공장이 거기 있어서 그럴지 모르지만, 그것 빼고는 아무것도 득 될 게 없잖아.”

“……희준아, 이 자식아!”

진혁이 희준을 와락 끌어안았다.

“켁켁.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야. 난 임자 있거든.”

껴안은 진혁을 희준이 억지로 밀어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진혁이 그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진혁의 눈에는 더 이상 숙취는 없었다.

오히려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 * *

“지도 어디 있습니까? 지도.”

갑자기 희준과 함께 뛰어 들어오며 소리치는 모습에 이영석은 물론 박이동과 샤물 남매도 놀란 표정을 하다가 얼른 벽에 걸린 지도를 가리켰다.

앞으로 다가가 진혁이 한참 동안 방글라데시 지도를 노려보다가 한 곳을 찍었다.

“여깁니다, 난민 캠프.”

“…….”

“로힝야가 고향을 떠나 머문 곳들. 추억이 담긴 그곳에 그들이 삶의 터전을 꾸릴 겁니다. 하하하하.”

미친 사람처럼 혼자 떠들다가 웃던 진혁은 다들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멋쩍게 말했다.

“소나르 지역에 추가 부지는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지금처럼 출퇴근하면 됩니다. 대신 난민 캠프들을 살기 좋은 신도시로 개발할 겁니다.”

“쿠투팔롱이라면 모르지만 그 아래 난민 캠프들은 거리가 너무 멀어 출퇴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쿠투팔롱만 하더라도 개발하려면 비워야 하는데, 그 많은 인원이 옮겨 갈 곳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부동산 전문가인 박이동이 현실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하지만 진혁이 바로 대안을 내놓았다.

“그래서 사전 준비 작업을 먼저 하려고 합니다. 교통 문제도 해결하고요.”

“……?”

“소나르부터 테크나프까지 난민 캠프들을 연결하는 전철을 설치하려고 합니다. 물론 도로도 확보하고요.”

“회장님의 계획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환경 단체가 반대하는 자리아산의 훼손은 피할 수 없습니다.”

“자리아산은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기존 도로가 아니라 레주 수로를 따라 새로운 도로를 건설할 겁니다.”

이영석의 눈이 커졌다.

“수로를 따라서요?”

“그렇습니다. 하천 부지는 국가 소유라면서요. 그럼 불하만 받으면 되니 문제없는 거 아닌가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일단 계획부터 세워 보세요. 나머지 문제는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갑자기 사무실이 분주해졌다.

진혁의 지휘 아래 난민 캠프들에 대한 자료들이 모아졌다.

희준은 한국의 신도시 개발 사례를 수합하느라 연신 컴퓨터 자판을 두드려야 했다.

정신없이 일하고 있을 때 박이동이 다가와 말했다.

“계획이 변경됐으니 해안 부지 확보 작업은 중단하겠습니다.”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면 안 되지요.”

“……?”

“빠져나올 때 빠져나오더라도 뜨거운 맛을 보여 주고 나와야 합니다. 그곳이 그들에게는 죽음의 늪이 될 겁니다.”

진혁이 품어내는 차가운 냉기에 박이동이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하지만 진혁의 계획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천 부지 주변 상황은 어떻던가요?”

“거의 쓸모없는 늪지예요. 매년 우기에 잠기는 곳이라 버려진 땅들입니다. 그래도 간간히 농사를 지어 왔는데, 작년에 몬순에 이어 사이클론으로 바닷물이 유입되는 바람에 염기가 빠질 때까지는 그마저도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토지 가격은요?”

“오염된 농지라 가격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만큼 헐값이었습니다. 회장님이 그쪽을 개발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잠깐 희망을 가졌다가 환경 단체가 낀 반대 시위를 보고 포기한 상태들입니다.”

“그쪽 땅을 집중적으로 매입하십시오.”

“거길요?”

“서울의 강남이 어떻게 금싸라기 땅으로 변했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

박이동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서울 강남은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홍수가 범람하는 배 밭에 지나지 않았다.

한강에 제방이 설치되고 도로가 뚫리면서 눈부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의 부촌이 됐다.

“투자비는 뽑아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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