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국제건설
진혁이 웃으며 하는 말에 박이동의 눈이 이제는 찢어질 듯이 커졌다.
평당 200~300원이었던 뽕밭이 지금 상업지의 경우 5억 원을 주고도 사기 힘든 곳이 되었다. 50년 만에 200만 배의 지가 상승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의 머리로 계산이 안 되는 것을 느낀 박이동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하천 부지도 부지지만 난민 캠프가 개발되면 그 인근의 토지들도 덩달아 오를 겁니다.”
“그럼 그것도 매입하십시오. 자금은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샤물과 아르아노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회의실로 갑시다.”
회의실 의자에 앉자 진혁이 샤물과 아노아르에게 말했다.
“땅을 매입하려고 하는데, 너희 가족의 도움이 필요하다.”
방글라데시는 외국인이 직접 토지를 구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현지인을 대리로 내세워야만 가능했다.
진혁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샤물과 아노아르라 이견이 없었다.
박이동에게 말했다.
“절대 소문이 나서는 안 됩니다. 은밀하고 신속하게 진행해 주셔야 합니다.”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겠습니다.”
“돈 아끼지 말고 최대한 많이 확보해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땅은 널려 있습니다.”
얼마간 더 땅 구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박이동이 아노아르와 샤물을 데리고 떠났다.
* * *
진혁은 사전 준비 작업을 위해 총리실로 들어갔다.
마침 나즈마 총리는 쵸두리 장관과 면담을 하고 있었다.
나즈마 총리에게 인사를 하고 쵸두리 장관에게 물었다.
“소나르 공단 문제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환경 단체들의 반대가 완강합니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 로힝야에 대한 거부감도 날로 높아만 가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자리아 산의 개발을 전제로 한 수로 쪽 공단 건설을 고집하다가는 공단 건설 자체가 좌초될 수 있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무조건 공단은 건설되어야 합니다.”
진혁이 단번에 말을 잘랐다. 쵸두리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해안가밖에는 안 된다니까요.”
“알겠습니다. 매입 비용이 추가로 더 들더라도 해안가 쪽으로 건설하겠습니다.”
“땅값이 많이 올랐다는데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나즈마의 우려에 진혁이 당당히 말했다.
“조흐르 가스전을 담보로 하면 100억 달러는 빌릴 수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100억 달러…….”
쵸두리가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글라데시 일 년 예산이 100억이었다. 일개인인 진혁이 그 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게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진혁이 말했다.
“장관님만 믿겠습니다. 서둘러 계획을 세워 주십시오. 그에 따라 추가로 부지를 매입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건 걱정 마십시오.”
“서 회장님이 어렵게 결정하신 일이니 다시 계획이 유출되지 않게 보안에 철저히 신경 쓰세요.”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이만 나가서 계획을 세우겠습니다.”
“수고를 부탁드립니다.”
진혁의 인사를 받고 떠나는 쵸두리의 두 눈은 번들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에게 재신이 강림한 것이다.
둘만 남자 진혁이 바로 일어났다.
“저도 가 보겠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어서 오신 것 아닌가요?”
“이미 다 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혼자 남은 나즈마 총리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 * *
이틀 간 계획서 초안을 마련한 진혁은 희준과 함께 바로 다카 공항으로 가서 소나르로 넘어갔다.
공장은 여전히 가동이 중단된 상태였다.
시위대에 둘러싸여 있지는 않았지만 몇몇 집행부는 남아서 계속 피켓을 들고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권기남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이제 공단도 부족해서 도시를 세우겠다고?”
“남자는 배포 아닙니까. 지를 때는 확실하게 질러 버려야지요.”
“고럼. 이런 피라미들이랑 투닥거릴 시간이 없지. 얼른 세워서 빨리 돌리자우.”
“그전에 처리할 일이 있어서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진혁의 시선을 받은 박이동이 보고를 했다.
“테크나프 난민 캠프 외에 20여 개의 비어 있는 캠프와 수용소를 확인했습니다. 전체적으로 3,000헥타르 정도 됩니다. 이곳 하천 부지와 쿠투팔롱 난민 캠프가 각 1,000헥타르이니 전체 면적이 5,000헥타르입니다.”
“상태는 어떻던가요?”
“아주 최악이었습니다. 난개발을 한 데다 급작스럽게 이주를 시키는 바람에 정리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물과 악취가 진동해서 제대로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었고요. 이곳 국민들이 데모를 하는 이유를 알겠더군요.”
박이동이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변 땅값은요?”
“사정이 그러니 거의 거저로 가져가만 줘도 좋다는 반응들이었습니다. 땅 구입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이곳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해안가 쪽은 후끈 달아올랐습니다. 벌써 소문이 났는지, 못 보던 이들이 단체로 땅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놀란 땅주인들이 매물을 다 거둬들여서 거래는 안 되는데 호가만 치솟는 상황입니다.”
“하천 부지 인근은요?”
“거긴 반대로 싸늘합니다. 지난번에 접촉했을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던 인간들이 지금은 공장까지 찾아와서 서로 자기 땅을 사 달라고 매달릴 정도입니다.”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보안에 더 신경 쓰셔야 합니다, 이곳 같은 꼴이 나지 않으려면.”
“걱정 마십시오. 이 나라 분위기를 알았으니 다시는 그런 못된 짓에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오래 끌어서 좋을 게 없습니다. 최단 시간에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데 주력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위로 치러 갑시다.”
호기롭게 말한 진혁을 따라 다들 샤물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탔다.
변변한 부동산도 없는 곳이라 박이동이 이미 파악한 해변가 지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진혁이 직접 나서서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땅을 팔아 달라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지주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일이면 더 오를 텐데 오늘 파는 바보는 없었다.
한동안 더 얼굴을 보여 준 진혁이 해변에 도착해 박이동에게 말했다.
“내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은 이 정도로 된 것 같으니 나머지는 박 실장님이 돌아다녀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걱정 마시고 쉬고 계십시오. 반드시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말겠습니다.”
박이동도 쌓인 게 많은지 강한 의지를 보이고 떠났다.
희준과 함께 근처 유일하게 있는 허름한 카페에 가서 탄산음료 캔을 사고 바다를 향해 놓여 있는 낡은 의자에 앉았다.
희준이 말했다.
“이제 며칠 있으면 이 지긋지긋한 싸움도 끝나겠네.”
“겨우 한 걸음 나아간 것뿐이야. 더 큰 싸움이 기다리고 있어.”
“계획을 들으면서도 난 엄두가 안 나더라. 넓이도 넓이지만 또 들어가는 돈은……. 어이구,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내 친구지만 참 대단하다. 그걸 다 어떻게 계획하고 꾸려 나가냐?”
“나 혼자서는 못 해. 희준아, 네가 이 일을 맡아 주라.”
“내가?”
“그래. 네가 맡아 줘야 안심이 될 것 같다. 내가 일을 크게 계획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네가 있어서야. 지금까지는 로힝야가 방글라데시 사회에 진출하게 해 주려고 했는데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 거꾸로 그들이 로힝야를 찾아오게 만들 거야. 같이 그걸 이뤄 보자.”
희준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진혁이 왜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는 상황이라 쉽게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국내 영업부로 옮긴다고 했을 때 네가 하는 데까지 해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해서 이집트로 갔어. 상사원으로 참 열심히 살았다. 거래를 성사시킬 때마다 보람도 컸고, 돈도 벌고, 사업도 계속 커지고. 그런데 어느 날 내가 나를 보니,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계속해서 팔고 있더라. 돈도 벌 만큼 벌었는데 난 무얼 위해 가족과도 떨어져서 이러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어.”
“…….”
“그때 라이나 왕비님을 만났어. 그분을 따라 여기저기 돕는 일을 하다 보니 신기하게 더 사업이 잘되는 거야. 그때 느꼈어. 장사는 물건을 사고파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거구나 하고 말이야. 그때 만난 게 로힝야야. 너도 봤겠지만 화장실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는 곳에서 살면서 공장 근로자로 일하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어. 넌 그들보다 훨씬 좋은 집에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어. 그런데 행복하니?”
희준은 답을 하지 못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보면 행복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진혁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로힝야를 돕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내가 그들로부터 오히려 도움을 받고 있더라. 나 같은 평범한 상사원이 어떻게 총리 자문역이 되어 이 큰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겠니? 아마 정 사장도 그게 궁금해서 이곳에 왔을 거야.”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우리는 기틀만 잡아 주면 돼. 나머지는 정 사장이 맡아서 할 거야. 그때까지만 서로 고생하자.”
“해 보고 싶긴 한데…….”
잠시 고민하던 희준이 로힝야 직업학교에서 봤던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동자들을 떠올리고 마음을 굳혔다.
“좋아. 해 보자.”
두 사람이 힘차게 캔을 부딪쳤다.
술잔이 아닌 게 아쉬웠다.
* * *
다카로 온 진혁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희준과 함께 급히 한국으로 돌아갔다.
정호영이 국제건설 인수 작업이 마무리되었다는 연락을 해 왔다.
진혁이 한국으로 향하는 시간에 방글라데시 언론들은 샤물이 환경 단체에 몰래 건네준 자료를 근거로 ‘소나르 땅 투기 의혹’에 대한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정호영이 기다리고 있다가 급히 허리를 꺾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정호영은 기대 이상으로 잘해 줬다.
2조 원대로 예상했던 인수 금액을 1조 5천억 원대로 낮췄다.
분식 회계로 숨겨 놓은 해외 사업의 부실을 추가로 발견한 데다, 줄어든 금액으로 산업은행의 차입금 5천억 원을 갚겠다는 역제안이 먹혀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산업은행에 들러 계약서에 사인하는 것으로 국제건설의 최대 주주가 진혁으로 변경되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정호영이 말했다.
“회장님에 이어 알라딘 홀딩스가 그간 15%의 지분을 매입해 2대 주주가 되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임시 주주 총회를 소집해 회사 인수 작업을 마무리 지어 주십시오. 방글라데시의 일이 생각보다 빨라질 겁니다.”
“알겠습니다.”
“태후 그룹과의 관계는 잘 마무리하셨습니까?”
“네. 아버지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일도 정리했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이혼에 대한 이야기였다. 김연희가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사적인 영역이라 진혁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남산에 있는 하얏트 호텔로 가자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호영이 얼른 그들을 소개했다.
“해외 건설 부문을 총괄하고 있는 한인갑 부사장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장일수 전무님으로 국내 건설 부문장을 맡고 계십니다.”
“서진혁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방글라데시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 오희준 씨입니다. 앉으시지요.”
진혁이 먼저 자리에 앉자 신협갑과 장일수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따라 앉았다.
국제건설이 서진혁에게 인수될 거라는 소문은 한 달 전부터 흘러나왔다.
매각을 반대했던 이전과는 달리 여론이나 노조 모두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서진혁이란 이름 때문이었다.
시장도 호의적이라 주가도 그사이 20%가량 올라 있었다.
진혁이 정식으로 회장에 취임하고 나면 회사에서 정식 업무 보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불쑥 외부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해 올 줄은 몰랐다.
진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한 부사장님은 국제그룹 시절부터 해외 현장을 누비며 국제건설 신화를 쓰신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장 전무님은 업계 최초로 아파트에 웰빙 개념을 도입해 브랜드 아파트의 붐을 일으키셨다고 들었습니다.”
“…….”
“전 두 분께서 국제건설을 이끌어 주셨으면 싶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저희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두 분이 국제건설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시잖습니까. 당연히 그에 맞는 역할을 맡으셔야지요.”
한인갑과 장일수 모두 당황하는 빛이 역력했다.
자신들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건 앞에서뿐이고, 뒤에서는 온갖 추잡한 뒷거래로 요직은 저희들끼리 나눠 가졌다.
산업은행도 다를 바가 없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낙하산 인사가 사장으로 내려왔고, 그들 또한 중요한 자리는 자신의 사람으로 채웠다.
자신들은 그저 그들을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데 필요한 자금을 대는 도구에 불과했다.
여전히 믿기지 않은 표정을 짓는 두 사람을 보고 진혁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