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스마트 기술 연구소
“해외 사업 실적을 보니 최근에 수주한 내역이 거의 없더군요.”
“저유가로 중동 건설 경기가 위축된 데다가, 겨우 우선 협상자로 내정되어도 산업은행이 지급 보증을 해 주지 않아 매번 최종 계약 단계에서 무산돼 버렸습니다. 회장님이 오셨으니 더 열심히 해서 반드시 실적을 내놓겠습니다.”
“아닙니다. 앞으로 국제건설은 어떠한 국제 입찰에도 참여하지 않을 겁니다.”
“예?”
“그건 국내 건설 부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역량을 집중해 현재 맡고 있는 공사를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마무리 지어 주십시오.”
“회장님!”
이제는 정호영마저 당황한 표정으로 변했다. 이건 사업을 접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서나 하는 행동이었다.
진혁은 그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자신의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산업은행에서 내려온 낙하산 인사들부터 솎아 내십시오.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존재들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그건 신중하셔야 합니다, 회장님.”
한인갑이 놀라 정신을 차리고 말렸다. 진혁의 눈이 날카롭게 변하자 얼른 말을 이었다.
“국내외 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은행의 지급 보증이 반드시 필요한 게 국내 건설업계의 현실입니다. 산업은행에게 밉보였다가는 좋을 게 없습니다.”
“알라딘 그룹은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그 울타리로 들어오신 겁니다. 겨우 한국의 일개 은행의 눈치나 보는 건 우리의 명예에 먹칠하는 겁니다.”
“……!”
“제가 많은 건설사를 놔두고 국제건설을 인수하기로 결정한 것은 뛰어난 해외 건설 능력 때문입니다. 방글라데시에 알라딘 제국을 건설할 작정입니다. 그것만으로도 국제건설이 해야 할 일은 차고도 넘칩니다. 따라서 두 분은 수주에는 신경 쓰지 마시고 시공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회사의 체질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회장님의 정확한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굳어진 얼굴로 묻는 한인갑에게 진혁이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방글라데시 남부에 공단과 신도시들을 세울 겁니다. 면적은 5,000헥타르입니다.”
한인갑, 장일수는 물론 정호영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5,000헥타르면 1기 신도시인 분당, 일산, 중동, 산본, 평촌을 다 합친 크기였다.
“1차가 그렇다는 겁이다. 그 이후 주변 지역까지 개발해야 할 겁니다.”
이어지는 진혁의 말에 다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공단 건설은 물론 교통 및 인프라 공사도 해야 하니 각오를 단단히 하셔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을 무조건 믿고 따르겠습니다.”
한인갑은 물론 장일수도 머리가 테이블에 닿을 정도로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1기 신도시는 사업비만도 10조 5,000억 원에 이르는 대형 프로젝트라, 국내의 모든 건설 회사들이 총력을 집중해 4년이나 걸렸다.
진혁의 말대로 지금은 한가하게 수주 걱정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진혁이 마지막으로 당부를 했다.
“제가 이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이 자리가 처음입니다. 그만큼 여기 세 분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번 일은 절대 실패하면 안 됩니다. 한 민족의 생존이 달린 중요한 일입니다. 정 사장님이 두 분께 로힝야에 대해 들려주시고 함께 계획을 세워 주십시오. 세부적인 내용은 여기 희준이가 알고 있습니다. 전 다음 약속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잠시만요, 회장님.”
한인갑이 일어나려는 진혁을 막고 물었다.
“취임식은 언제 하실 예정이십니까?”
“……?”
“대표이사 회장 취임식을…….”
“그건 한 부사장님, 아니, 이제 한 사장님이라고 불러드려야겠군요.”
“……!”
“앞으로 국제건설은 한 사장님이 이끌어 가십시오. 제가 뒤에서 든든하게 지원하겠습니다. 그럼.”
인사를 하고 떠나는 진혁의 등을 바라보는 정호영의 두 눈에는 뜨거운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다.
인영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진혁 씨가 사업 넓혀 가는 데는 일정한 방식이 있어요.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지만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키워 가요.’
자신이 방글라데시를 떠날 때는 200헥타르 규모의 공단 건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5,000헥타르의 신도시로 커져 있었다.
정호영의 뒤에 서 있는 한인갑과 장일수의 얼굴 역시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희준만이 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 *
진혁은 오랜만에 가족들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혜주를 데리고 강릉에도 다녀오고 이모네 집에도 들렀다.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진혁만이 아니었다.
계획을 세우느라 바쁜 와중에도 희준은 아예 매일 깨를 볶아대고 있었다.
눈꼴사나운 모습에 집 안에 머물기 힘들어 중간 중간 알라딘 코리아와 동행 사무실에 들러 보고를 받았지만 진혁은 어떠한 의견도 내놓지 않았다.
특별한 문제도 없었지만 이제는 그들 스스로가 알아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영석의 보고로 방글라데시 정가가 혼란이라는 이야기는 들었다. 쵸두리 산업부 장관과 BGMEA 주유엔 회장은 물론 그들의 친인척들이 대거 경찰에 붙들려 가 강도 높은 조사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들만이 아니었다.
국토부 직원들은 물론 다른 공무원들도 최근에 소나르에 땅을 매입한 사실이 밝혀져 대대적인 사정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이런 호기를 놓칠 야당이 아니었다.
연일 나즈마 총리의 무능을 비판하며 하야까지 촉구했다.
거기에 환경 단체와 국민들도 버려진 로힝야 난민 캠프를 처리해 달라며 계속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 상태로는 내년에 있을 총선은 치르나 마나라며 여당 내에서도 나즈마 총리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 * *
진혁이 오랜만에 AK 사무실을 찾았다.
고용준이 한상국과 기다렸는데 정호영도 와 있었다.
국제건설에서 희준과 함께 방글라데시 신도시 계획서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지 얼굴이 까칠해 보였다.
인사를 나누고 진혁이 자리에 앉고 입을 열었다.
“제가 여러분께 모이라고 한 것은 한국에서 한 가지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마트 기술 연구소를 설립하세요.”
“연구소를요?”
“그렇습니다. 지금까지가 정보화의 시대였다면 다가올 미래는 인공 지능의 시대가 될 겁니다.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다들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IT 기술에 문외한인 고용준은 더했다.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4차 산업 혁명 기술에 대한 이야기가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것은 압니다만, 아직 구체화된 게 없는데 연구소부터 세우는 것은 시기상조 아닙니까?”
“구체화된 다음에 준비하면 늦습니다. 그때는 이미 미국과 중국이 인재와 기술을 독점한 후입니다. 우리가 ‘대륙의 실수’라고 비아냥거렸던 중국산 제품의 질이 얼마나 빨리 우리의 기술력을 따라잡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
정호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스마트폰으로 세계적 기업 반열에 올라선 태후 전자는 지금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그간 무시했던 중국산 저가 휴대폰의 성능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시장이 빠르게 잠식당하고 있었다.
진혁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 조선업의 불황도 중국 조선업계의 약진 때문입니다. 미국과 중국 기업들은 국가 지원하에 공격적인 M&A와 인재 확보로 스마트 기술 선점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를 믿고 기다릴 여유가 없습니다. 민간 기업이 앞서 인재를 지키고 기술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 줄 알겠습니다. 아버님께 말씀드려 기업들도 스마트 기술 개발에 더 투자할 수 있도록 유도해 보겠습니다.”
기술력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는 정호영이라 금방 이해하고 답했다.
진혁이 한상국을 보고 말했다.
“스마트 기술의 발전은 결국 인터넷쇼핑몰의 대변혁을 불러올 겁니다. 지금까지의 방식만 고집하다가는 아마존과 알리바마와의 격차가 더 벌어질 겁니다. 상대의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하면서 대비책을 세워 주세요.”
“테스크포스팀을 꾸려 철저히 준비하겠습니다.”
IT 기술 변화에 누구보다도 민감한 한상국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로 답했다.
하지만 고용준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우려감을 드러냈다.
“연구소 설립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재 확보에는 많은 자금이 들어갈 겁니다. 높은 연봉에 기술 개발까지 지원해 줘야 하는데…….”
“자금 마련은 별도의 계획이 있으니 걱정 마시고 스마트 기술력 확보에만 신경 써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고용준이 그제야 펴진 얼굴로 답했다.
진혁은 제주도에서 중국에 복수할 방법을 찾고 또 찾았다.
그래서 겨우 찾아낸 것이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비트 코인의 폭등 정도였다.
하지만 회귀하면서 기억에 문제가 생겼는지, 아무리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도 희미할 뿐 도통 다른 투자 대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답답한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문득 깨달은 게 있었다.
바보같이 지금까지는 자신이 직접 체험한 일에만 매달려 왔다.
꼭 자신이 관여되어 있지 않더라도, 당시 봤던 인터넷 기사나 무심코 지나쳤던 발전된 미래 세계의 생활 모습으로도 잘만 활용하면 큰 수익을 거둘 수 있었다.
이에 생각이 미치자, 진혁은 눈부시게 발달한 스마트 기술로 몰라보게 달라졌던 미래의 생활들을 떠올리고 4차 산업 관련 사업에 투자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 계획을 실현하고자 방글라데시의 사업을 크게 키운 것이었다.
그 첫 단계로 국제건설을 인수했고, 다음이 스마트 기술 연구소였다.
하지만 신도시는 건설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스마트 기술 연구소 역시 미래를 위한 투자이지 당장 실적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때 가서 준비하면 늦는다. 기술력이 앞선 기업의 인수가 필요했다.
진혁은 자신의 조건에 맞는 기업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자료 검토를 하던 진혁이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고 혜주와 인형놀이를 하고 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박이동이었다.
-토지 매입이 끝났습니다, 회장님.
“내일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진혁은 희준이 급히 국제건설에 들러 가져온 계획서를 받아 함께 비행기에 올라탔다.
계획서는 기내에서 읽었다.
* * *
나즈마 총리에게는 근 한 달은 자신의 일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이었다.
사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악화되고만 있었다.
이 일은 진혁이 벌인 소나르 공단 건설에서부터 시작됐다. 당연히 들어오는 진혁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무슨 염치로 찾아온 거죠?”
“그건 오히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소나르에 땅 투기를 한 자들은 모두 정부와 관련된 인사들이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는 것을 깨우쳐 주러 온 건가요?”
“아닙니다. 그래도 제가 명색이 총리 자문역인데 이번 사태를 모른 척만 할 수는 없어 찾아왔습니다. 말로만 떠드는 놈들이나 재빨리 거리를 벌리는 간신배들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진혁은 정확히 나즈마 총리가 처한 현실을 꼭 집어 언급했다. 사태를 명확히 이해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야당의 공세에다 환경 단체와 국민들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다.
나즈마 총리가 곤경에 처하자 그간 알랑방귀를 끼며 어떻게든 눈에 들려고 안간힘을 쓰던 여당과 정부 인사들이 발길을 뚝 끊었다.
나즈마 총리는 심한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터라, 말과는 달리 진혁의 연락을 받자 기뻤다.
진혁이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저를 자문역에 앉히신 것은 총리십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믿는다며 제게 공단 건설을 반드시 이뤄 달라고 하신 것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랬지요. 하지만…….”
“또 총리께서는 로힝야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게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씀도 하셨지요. 한국의 ‘한강의 기적’도 이루시고 싶다고도 하셨고요.”
진혁이 과거의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자 나즈마 총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뭔가 계획이 있는 거군요?”
“있습니다만 아마 받아들이시기 쉽지 않으실 겁니다.”
“서 회장을 믿는다는 이야기는 그냥 한 말이 아니었어요. 설혹 그 계획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렇게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아요.”
잠깐 말을 멈춘 나즈마 총리가 숨을 깊이 들이쉬고 말했다.
“어디 이야기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