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남부 민간 경제 특구
“제 계획을 말씀드리기 전에 묻겠습니다. 이번 사태를 풀 방법은 있으신 건가요?”
나즈마 총리가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없어요. 야당이나 환경 단체는 큰 문제가 아닌데 국민들의 요구는 무시할 수 없어요. 버려진 난민 캠프의 문제를 뻔히 아는데 그들을 탄압하는 것은 맞지 않아요. 그렇다고 그걸 처리하기에는 우리나라 재정 상황으로는 불가능해요.”
진혁이 다시 물었다.
“만일 이번 사태가 없었다면 총리님이 발표하신 ‘Vision 2021’은 이뤄낼 자신은 있었던 겁니까?”
“그것 역시 쉽지 않아요. 외국인의 투자 유치가 생각만큼 이뤄지지 않고 있어요. 고속도로 확장만 해도 현재 공정률이 20%에 불과해요.”
최근 힘든 시간을 보내서인지 나즈마 총리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순순히 현실을 밝혔다.
원하는 답을 얻은 진혁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제가 사업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위기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번 사태 역시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예……?”
“공단과 버려진 난민 캠프는 물론 그간 실적이 없었던 경제 특구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비책이 있습니다.”
진혁이 가져온 계획서를 내놓았다.
얼른 받아 읽은 나즈마 총리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이게 실현 가능한 계획인가요?”
“그렇습니다. 한국에서 제반 준비가 진행 중입니다.”
바로 이어진 답변에 나즈마 총리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으로 소르나 공단을 제의한 건가요?”
“제게 앞일을 예측할 능력은 없습니다. 다만 로힝야 문제를 언제까지나 단계적으로 해결해 갈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마침 일련의 일들이 일어난 거고요.”
“…….”
“이번에 한국에 가서 건설 회사도 하나 인수했습니다.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이곳에 쏟아붓는 한이 있더라도 약속한 것은 지킬 겁니다. 이제 총리님의 결단만 남았습니다.”
잠시 진혁을 노려보던 나즈마 총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제가 그동안 착각하고 있었네요. 난 로힝야에 대한 서 회장의 행보가 라이나 왕비의 부탁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 서 회장님이 오히려 이 일을 주도하고 있군요.”
“저와 왕비님 사이에는 누가 누구를 이끄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서로 간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전 총리님과도 그런 관계가 되기를 원합니다.”
“좋아요. 나도 내가 한 약속은 지킵니다. 서 회장을 믿기로 했으니 끝까지 믿고 가겠어요. 그런데 개발비만도 엄청날 것 같은데 감당이 되겠어요?”
“총 개발비로 100억 달러 정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제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항상 냉정을 잃지 않던 나즈마 총리의 눈이 커졌다.
규모도 규모지만 진혁이 그걸 모두 책임지겠다는 게 더 놀라웠다.
입을 열려던 나즈마 총리가 급히 동작을 멈췄다. 그에 따른 반대급부로 진혁이 무엇을 요구할지 두려웠다.
그 마음을 알고 진혁이 먼저 이야기 했다.
“해당 토지를 적정 가격에 불하해 주십시오. 남부에 대해서만이라도 로힝야의 이동 및 취업을 막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요?”
“없습니다.”
“없어요?”
나즈마 총리가 거듭 놀랐다.
엄청난 거금을 투자하는데 요구 조건이 없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 얼마 안 되는 돈을 투자하면서도 그보다 더 큰 인프라 건설을 요구해 오는 게 다반사였다.
진혁이 생각난 듯 말했다.
“최대한 빠른 일 처리를 위해서 인허가 관련 업무를 지원해 줄 전담팀을 꾸려 주시면 됩니다.”
“그건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그런데 솔직히 너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만 좋은 조건이라 오히려 의심이 드네요. 서 회장에게 로힝야가 그런 큰 희생을 할 만큼 중요한 존재인가요?”
“그 말은 사업가인 제게 맞지 않습니다. 전 한 번도 로힝야를 위해 희생한 적이 없습니다.”
“믿기 힘든 말이네요. 서 회장이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나 노력에 비해 지금까지 이룬 것이라고는 겨우 공장 두 개 돌리는 게 전부잖아요?”
진혁이 웃으며 답했다.
“많이 투자했지요. 그래서 이번에는 확실하게 거둘 겁니다. 나중에 욕심쟁이라고 욕이나 하지 말아 주십시오.”
“어떻게요?”
“그건 직접 보시면 아실 겁니다. ‘한강의 기적’이 아니라 ‘나프 강의 기적’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제 계획이 성공하면 방글라데시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투자금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겁니다. 하하하.”
대소를 터트리는 진혁을 바라보며 나즈마 총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혁이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가 명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민하던 나즈마 총리의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풀렸다.
진혁의 계획대로 이루어질지는 모르지만,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방글라데시 입장에서는 하등의 손해가 아니었다.
100억 달러라는 막대한 돈이 국토 개발에 투입되면 직간접적인 효과가 적지 않았다.
국민들이 문제 삼는 버려진 난민 캠프를 개발하는 것이라 일석이조의 효과를 낼 수도 있었다.
* * *
나즈마 총리와 담판을 지어 자신의 계획대로 방글라데시 사업을 확대한 진혁은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즉시 컴퓨터를 켰다.
잠시 잊고 있었던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인수 대상 기업을 찾아내야 했다.
단순히 이곳 사업만 생각하면 그런 기업들은 널리고 널렸다. 하지만 진혁의 꿈은 더 원대했다.
방글라데시를 넘어 서남아시아, 나아가 동남아시아, 그리고 더 큰 대륙으로 진출을 계획하고 있었다.
거기에 걸맞은 규모와 기술을 가진 기업을 찾아내야 했다.
며칠간 자료를 검토한 끝에 마침내 적당한 기업을 찾아냈다. 자신이 원하는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 마침 경영위기에 몰려 있었다.
진혁이 즉시 전화기를 들었다. JK모건의 스미스에게 걸었다.
“서진혁입니다.”
-아, 서 회장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기업을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어디입니까?
“일본의 도이에 중공업입니다.”
-도이에 중공업. 알겠습니다.
스미스와 통화를 끝낸 진혁이 잠시 생각하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국정원의 김상균 차장은 전화를 받자마자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서 회장님이 먼저 전화를 주시고 어쩐 일이십니까?
“일본에서 은밀하게 일을 좀 벌여 볼까 하는데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음……. 은밀하게라는 말씀은 비공식적인 활동을 지원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자료 수집, 증거 확보, 경우에 따라서는 불법적인 일도 해야 할지 모릅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 있겠습니까?”
-마침 적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 일본 주재원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 믿을 만하실 겁니다.
“소개 부탁드립니다.”
-문자로 이름과 연락처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조심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마지막 자금만 마련되면 방아쇠를 당길 수 있다.
* * *
다음 날, 나즈마 총리가 전 각료를 대동한 채 기자 회견장으로 내외신 기자를 불러 중대한 발표를 했다.
“치타공주 남부의 버려진 난민 캠프에 3년간 100억 달러를 투자해 민간 경제 특구 여섯 곳을 조성하겠습니다. 총 면적은 5,000헥타르로, 개발이 완료되면 상주 인원 150만 명에 국내외 1,000여 개 업체가 입주하게 되고, 100만 명의 노동력의 고용과 함께 연간 50억 달러의 수출 효과가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원대한 계획에 비해 기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나즈마 총리가 그동안 이런저런 계획을 발표했지만 제대로 된 것이 거의 없어서였다.
자금 조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처음 발표 때만 반짝 관심을 끌고 이후는 지지부진했다.
그러건 말건 나즈마 총리의 발표가 이어졌다.
“정부는 안정적이고 빠른 사업 추진을 위해 소나르 인근 100헥타르의 국유지와 인근 하천 부지, 방치된 난민 캠프 토지를 불하함은 물론, 방글라데시 민간 경제 특구 관리청(BIEZA) 신설을 적극 지원하겠습니다. 초대 청장은 총리 자문역이시고 알라딘 그룹의 회장이신 서진혁 씨가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이번 발표에는 기자들이 크게 술렁였다.
서진혁의 명성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세계적인 기업가였다.
뒤에 서 있던 진혁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남부 민간 경제 특구의 개발에 필요한 100억 달러는 해외 투자금으로 마련하겠습니다만, 부족한 부분이 발생한다면 알라딘 그룹에서 전액 책임지겠습니다. 따라서 투자 유치를 위한 별도의 설명회는 갖지 않겠습니다.”
기자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을 먼저 언급하고 말을 이었다.
“총리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남부 민간 경제 특구 여섯 곳은 버려져 오염된 난민 캠프를 재건하는 데 그 첫 번째 목적이 있습니다. 경제 특구는 외국인 투자 및 거주에 유리한 국제화된 기업 환경 및 친환경을 고려해 조성될 것이며, 각종 세제 혜택과 인허가의 대폭 축소, 각종 지원책으로 기업이 생산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100% 외자 인정, 기업 및 개인의 국외 송금 허용, 내외국인 직접 고용 등 기업의 자주권을 최대한 허용하겠습니다.”
화면에는 남부 민간 경제 특구의 각종 인센티브에 대한 세부 내용이 띄워져 있었다.
“주거 및 상업 지역의 조성은 기존의 환경 파괴적인 집단 개발 방식을 지양하고, 방치된 채 흉물로 변한 난민 캠프의 생태를 복구할 겁니다. 쾌적한 주거 시설과 학교, 병원 등 편의시설, 호텔과 면세점 등 관광 시설로 변화시켜 자급자족이 가능한 세계 최고 수준의 신도시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마스터플랜 화면이 넘어갈 때마다 카메라 셔터들이 연신 터졌다.
재원 조달도 명확하고 능력이 검증된 서진혁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서 벌이는 사업이니 그 성공은 확실했다.
발표가 끝나자 기자들의 끊임없는 질문이 이어졌는데, 진혁은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성의껏 답변을 했다.
* * *
남부 민간 경제 특구 건설에 대한 기사가 나가자 들끓던 여론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환경 단체에서는 자리아산 훼손 없이 해안 도로를 건설한다는 내용에 환영의 의사마저 내비쳤다.
국민들도 흉물스럽게 버려진 난민 캠프 문제가 해결되는 데다 개발이 되어 그 혜택이 자신들에게까지 돌아간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겨우 야당이 실현 가능성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이어지는 투자 소식에 묻혀 버렸다.
제일 먼저 화답한 것은 요르단 왕실이었다.
5억 달러의 투자 의향서를 제출하고, 그와 별도로 라이나 왕비가 운영하는 ‘국제 난민 구호 재단’에서 학교를 무상으로 지어 준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이집트 대사원에서도 투자 계획과 함께 병원 설치를 약속했다.
한국 정부도 가만있지 않았다.
권성일 대통령이 직접 3억 달러 차관 제공을 약속하고, 태후 그룹에서는 1억 달러 투자 계획과 함께 중국 공장의 이전을 약속했다.
다른 기업들도 앞다퉈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영국의 유니로브,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부다에서도 투자와 공장 및 호텔 유치를 알려 왔고, 유니핏과 HEXA 등 세계적인 의류 업체들도 공장 건설 계획을 서둘러 발표했다.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 인도의 진혁을 아는 기업들도 그 대열에 동참하자 투자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나즈마 총리에 대한 비판이 사라진 것은 당연했고, 이제는 그녀의 높은 지도력에 대해 칭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혁은 방글라데시 정부와 알라딘 그룹 간의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희준과 함께 한국으로 향했다.
광명의 김세동의 집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가 되기 전이었다. 희준이 벼락 같이 뛰어 들어가며 소리쳤다.
“여보야!”
“자기야!”
소파에 쪼그리고 앉아 졸던 지현이 벌떡 일어나 호응했다. 희준이 사전에 연락해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픈 데는 없어? 약을 잘 먹었고?”
“난 괜찮아. 우리 애기는?”
“의사 선생님이 잘 크고 있대. 그런데 자꾸 발로 차는 것 같아.”
“이놈이 축구선수가 되려나 보네. 하하하하하.”
“자기 피곤하겠다. 얼른 들어가서 자자.”
“그래. 우리 애기 안고 자야지.”
“나는?”
“물론 자기도 같이.”
“아이, 예뻐, 우리 신랑. 쪽.”
쌍으로 지랄하며 들어가는 모습에 진혁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직 발차기를 하려면 한참이나 더 있어야 하거늘.
소란에 깼는지 지민이 방에서 나오는 모습에 진혁이 얼른 달려가 안으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연달아 안방 문이 열리며 출근 준비를 마친 김세동이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