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동시다발
진혁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습니다, 아버님.”
“고생했네. 오 서방도 같이 온 건가?”
“예. 그런데 먼저 방에 들어가서…….
“한참 좋을 때잖은가. 피곤할 테니 자네도 들어가서 쉬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만은 없었다.
출근하는 김세동을 배웅하며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이렇게 일찍 출근하십니까?”
“남태령 정체가 극심해. 조금만 늦으면 꽉 막혀서 광화문까지 두 시간도 넘게 걸릴 거야.”
“서울과 수도권까지 집중화가 심해져서 더 그럴 겁니다. 지방으로 인구 분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는데 그게 말처럼 간단하지 않아. 자네의 동행 사업 덕분에 시골이 조금씩 살아나는가 싶더니, 그마저도 요즘 정체라고 하더군.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야. 피곤할 테니 그만 들어가서 쉬게.”
차에 타고 떠나는 김세동을 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겼던 진혁이 얼른 집으로 들어갔다. 자신도 오랜만에 지민을 안고 단잠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건 헛된 망상임을 바로 깨달았다.
“아빠.”
막 잠이 깼는지 부스스한 머리로 달려오는 혜주를 얼른 안았다.
“아이쿠, 우리 예쁜이. 아빠 때문에 깼나 보네. 다시 들어가서 자자.”
“아니야. 나 다 잤어. 이모가 인형 많이 사 줬어. 우리 인형놀이 해.”
“잉?”
난감해하는 진혁의 뒤에서 언제 나왔는지 지민이 말했다.
“아빠 피곤하셔. 인형놀이는 나중에 하자.”
“그럼 엄마랑 해.”
“…….
이번에는 지민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역시 진혁의 품이 그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장모 박연심이었다.
“들어가서 자게. 혜주는 내가 볼 테니.”
“할무니 재미없어. 엄마 아빠랑 하고 싶단 말이야.”
“고집 부리면 안 돼.”
“으앙. 엄마 미워.”
지민의 호통에 결국 혜주가 울음을 터트렸다.
이 상황에서는 들어가도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진혁이 얼른 우는 혜주를 안고 달랬다.
“아빠랑 하자. 아빠가 놀아 줄게.”
“정말?”
“그럼. 아빠도 혜주랑 놀 때가 제일 신나.”
“여보!”
“잠은 천천히 자도 돼. 오랜만에 왔는데 놀아 줘야지. 자긴 피곤하면 들어가서 한숨 더 자. 인형놀이 하러 가자.”
“와! 신난다. 아빠 최고.”
함께 거실로 향하는 부녀를 바라보는 지민의 눈은 도끼눈이 되어 있었다.
혜주가 어린이집에 가고 나서야 겨우 해방이 된 진혁은 지민을 안고 푹 자고 일어나 점심을 먹은 뒤 희준과 함께 알라딘 건설로 갔다.
주총에서 사장 선임은 물론 회사명 변경도 의결했다.
정호영은 물론 사장으로 선임된 한인갑과 부사장이 된 장일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여기 오희준 씨가 저를 대신해서 알라딘 그룹의 실무를 맡아 진행할 겁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호영은 물론 다른 두 사람이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하는 모습에 희준이 급 당황했다.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특히나 정호영은 한때 쳐다보기도 힘들 만큼 까마득히 위에 있던 이였다.
급히 같이 허리를 숙이려는 희준의 어깨를 진혁이 꽉 잡았다.
희준은 더 이상 태후 물산의 직원이 아니었다. 이제는 알라딘 그룹의 일원으로 행동해야 했다.
진혁을 마음을 눈치챈 희준이라 동작은 멈췄지만 얼굴에는 불편함이 가득했다.
자리에 앉은 뒤 비서가 차를 내놓고 나가자 정호영이 먼저 인사부터 했다.
“회장님의 계획을 들었을 때는 설마 그런 엄청난 일이 벌어질까 싶었는데, 또 이렇게 멋지게 해내셨습니다.”
“이제 첫 발을 내딛었을 뿐입니다. 갈 길이 멉니다.”
진혁이 일부러 한발 뺐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일단 계획서부터 봅시다.”
“회장님이 신도시로 개발하시겠다고 해서 그에 맞춰서 준비했습니다.”
정호영이 건네준 서류를 진혁은 희준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검토에 들어갔다.
능력이 입증된 전문 건설 회사답게 계획서는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잘 만드…….”
찌릿.
무심코 입을 열었던 희준이 진혁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말끝을 흐렸다.
진혁이 한인갑에게 물었다.
“총 5단계로 계획하셨는데 완공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각 단계별로 최소 1년은 여유를 주셔야 합니다.”
진혁이 정호영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대체 난민 캠프에서 무엇을 보신 겁니까? 그들을 위하는 마음은 진심이라고 하셨잖습니까?”
“…….”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하루하루 삶을 연명하는 그들에게 5년을 더 기다리게 하겠다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계획서를 그대로 내놓으면 어쩌란 말입니까?”
“저기 회장님, 정 사장님도 기간이 너무 길다고 줄이라고 하셨지만 실무진 회의에서 현실적인 문제로 무리했다가는 부실시공이 될 거라는 우려가 많아서 기간 단축은 어렵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진혁이 차가운 시선을 끼어든 한인갑에게 돌리고 물었다.
“어떤 문제입니까?”
“가장 심각한 것은 개발 예정지 대부분이 저지대 습지라는 겁니다. 방파재를 쌓고 매립해야 하는데 흙이 부족합니다. 이번 일에 산지 개발에 대한 환경 단체의 반대가 심했다고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외부에서 흙을 반입해 와야 하는데, 그에 따른 시간과 비용도 감안해야 했습니다.”
“제가 방글라데시에서 사업을 시작한 지가 5년도 더 됐습니다. 머문 시간을 따지면 반년도 더 될 겁니다. 그런 제가 이 정도 사정도 모르고 이번 일을 벌였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일반론적으로는 한 사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는 버려진 난민 캠프 처리 문제가 대두된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남부 민간 경제 특구입니다.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
“지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보고 진혁이 손을 내밀자, 희준이 얼른 가방을 열어 확대한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정 사장님이 머물렀던 쿠투팔롱 난민 캠프가 제일 규모가 큰데 1,000헥타르 정도 됩니다. 모든 난민 캠프가 그렇듯 고도가 상대적으로 높습니다. 심하게 훼손되어서 원상 복구는 불가능합니다. 집중 호우 방지 대책은 간단합니다. 밀어 버리고 평지로 만드는 대신 우수로를 깊게 파 주는 겁니다.”
“……!”
“내가 가장 주목하는 곳은 발라캔 지역의 난민 캠프입니다. 1번 고속도로가 유일하게 숲을 관통하고 개설되어 있다 보니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산림이 훼손된 곳입니다. 이쪽만 밀어도 우리가 필요한 흙은 대부분 충당될 겁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된다면 충분히 기간 단축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다른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뭡니까?”
“방글라데시에는 변변한 항구라고는 치타공 항구가 유일한데, 내륙 항이다 보니 수심이 낮고 화물 적채가 심해 건설 자재를 반입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됩니다.”
“그 문제는 제 나름대로 복안이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자재 반입이 늦어져서 공사가 중단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 일에 아주 제격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을 하는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아련한 추억 속의 사람들을 떠올리자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럼 저희들은 회장님을 믿고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겠습니다.”
“잠시만요.”
한인갑이 장일수를 데리고 일어나려는 것을 진혁이 막았다.
“장 부사장님의 아파트 건설 계획에도 한 가지 고려해 주셨으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떤 점입니까?”
“방글라데시는 아열대성 기후라 사이클론과 몬순이 수시로 발생합니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부지를 상대적으로 높게 가져갈 생각입니다. 거기에 우수 시설을 최대로 확보하게 설계되었습니다.”
“잘하셨습니다만 대대로 재해를 겪어 트라우마가 상당합니다. 1층을 비우는 필로티 구조로 변경해 주십시오. 침수가 되어도 자신들 집은 안전하다는 심리적인 안정을 주는 게 중요합니다. 거기에 중간층도 비우고 공원으로 조성해 싸이클론의 강력한 바람에도 대비하게 해 주십시오.”
“좋은 지적이십니다. 설계에 반영하겠습니다.”
“아니요. 무조건 제 말에 따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제 아이디어는 물론 현지인들에게 다른 좋은 생각은 없는지 조사해서 반영하라는 겁니다. 현지인에 대한 조사는 정 사장님이 맡아서 하실 겁니다.”
“제가요?”
갑자기 지목당한 정호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왕 매일 통화하시는 것, 생산성 있는 대화를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잖습니까?”
“아!”
정호영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김연희에게 부탁해서 조사하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한인갑과 장일수가 나가고 희준과 함께 셋만 남자 정호영이 감탄의 말을 했다.
“회장님의 사고는 정말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그런 많은 생각들을 하십니까?”
“크고 넓게 보십시오. 경영자는 미래와 주변을 살펴야 한다는 게 제 지론입니다.”
“자주 듣는 말인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 이번부터 실천해 보십시오.”
“……?”
의아한 표정을 짓는 정호영을 보고 진혁이 물었다.
“태후그룹으로는 언제 들어가실 작정이십니까?”
“예?”
“언제까지 남의 회사를 위해서 일할 수만은 없지 않겠습니까?”
“전 태후그룹으로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
“전 회장님에게 더 배우고 싶습니다. 태후는 인영이가 잘하고 있습니다. 아버님도 허락하신 일입니다. 계속 회장님을 따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당차게 말하고 깊이 고개를 숙이는 정호영의 모습에 진혁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의 진심이 충분히 느껴졌다.
“방글라데시는 시작이지 끝이 아닙니다. 서남아시아에 사업을 더 크게 확대할 생각입니다. 그래서 알라딘 서남아시아, AS 그룹을 새롭게 신설하려는데 그걸 정 사장님이 맡아 주십시오.”
“제가요?”
“지금처럼만 해 주시면 됩니다. 어려운 부분은 저와 함께 헤쳐 나가시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회장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정호영의 고개가 숙여졌다. 알라딘 서남아시아를 맡게 된 것보다 진혁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기대하겠습니다.”
“회장님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경제 특구 건설은 여기 한 사장님에게 맡기시고, 정 사장님은 청와대에 좀 다녀오셔야겠습니다.”
“청와대요?”
“지금 세계의 시선이 우리의 개발 계획 발표에 쏠려 있습니다. 세계 각국은 물론 세계적 기업들도 투자 계획을 속속 밝혀 오고 있습니다.”
“한국도 이미 투자를 확정한 것으로 압니다만.”
“맞습니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은 아실 겁니다. 남부 민간 경제 특구 건설로 넘쳐나는 돈은 방글라데시 전역에 걸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겁니다. 이번 기회에 한국-방글라데시 공동 프로젝트 개발 펀드를 미리 체결해 놓은 덕을 봐야지요. 나즈마 총리의 경제 개발 모델이 한국입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줄 알겠습니다만, 그 정도면 회장님이 직접 들어가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방글라데시 민간 경제 특구 관리청의 청장을 맡을 제가 특정 국가를 위해 일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한국의 일은 정 사장님이 맡아서 처리하셔야 할 겁니다. 이제 정 사장님도 알라딘 그룹의 일원입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정 사장님도 이제 제가 일하는 스타일을 어느 정도는 아셨을 겁니다. 방글라데시는 시작점일 뿐입니다. 한국경제가 한 단계 도약한 데는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계속된 1차 중동 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에 못지않은 일이 서남아시아에서 벌어질 겁니다. 정 사장님이 국내 기업을 어떻게 이끄냐에 따라 10년 후 한국의 위상이 달라질 겁니다. 태후가 아닌 알라딘 서남아시아를 발판으로 세계적인 사업가로 거듭 태어나셔야 할 겁니다.”
“회장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다하겠습니다.”
진혁이 정호영으로부터 90도 인사를 받고 나고 물었다.
“스마트 기술 연구소는 어떻게 됐습니까?”
“판교의 테크노벨리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국내 대기업과 기술 제휴하기로 했고, KAIST와 ETRI와도 협약을 체결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이 추진하시는 일이라고 하니 다들 먼저 인연을 맺으려고 하던데요.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