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스마트팜 사업
“뭡니까?”
“연구소장님이 회장님과의 면담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간 외국에 계셔서 미뤘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마침 저도 할 말이 있었는데 잘됐습니다. 함께 가 봅시다.”
정호영과 사무실을 나왔다.
희준은 한인갑 사장 등과 개발 계획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하겠다고 해서 남았다.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알라딘 스마트 기술 연구소로 가자 구필준 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캠브리지 대학 교수로 있다가 태후 전자의 간절한 구애를 받고 돌아온 4차 산업 기술의 전문가였다.
원래는 태후 연구소로 가기로 했는데 정진호가 아들을 위해 양보해 줬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아 진혁이 물었다.
“한국의 스마트 기술은 어느 수준입니까?”
“수준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엉망입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준비가 안 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구필준은 직설적인 성격인지 대답에 거침이 없었다.
정호영은 그게 불편했지만 진혁은 아니었다. 솔직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중에 가장 큰 게 각종 규제입니다. 스마트 기술에 대한 표준까지는 바라진 않지만, 최소한 연구를 위한 데이터 수집은 막지 말아야 합니다. 스마트 기술의 핵심은 빅데이터입니다. 데이터가 있어야 기술을 개발하고 개발된 기술을 검증할 수 있는데, 정보통신법에서 개인 사생활 보호를 이유로 금하고 있어 데이터 수집 단계에서부터 막혀 있습니다.”
구필준은 이런저런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듣고 난 진혁이 말했다.
“제가 나중에 정부 관계자를 만나면 소장님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정 사장님도 재계분들에게 소장님의 고충을 알리고 정부 역시 서두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기초 기술 분야의 전문 인력이 너무 없습니다. 로봇 기술은 미국과 일본에 한참이나 뒤져 있고, 인공 지능은 시작도 못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기초 기술 분야 전문가부터 양성하는 게 낫습니다. 응용 기술자인 제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맞는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회장님을 뵙자고 한 겁니다.”
“아니, 소장님…….”
“제가 답변 드리지요.”
사직의 뜻이 있음을 비치는 구필준의 말에 정호영이 놀라 끼어들려는 것을 진혁이 막았다.
“전 기술자가 아니지만 한국의 스마트 기술이 뒤쳐져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용 기술자인 소장님을 영입한 것은 대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
“전 현 상황에서 한국이 스마트 기술 선진국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맞습니다. 이미 너무 늦었습니다. 영재를 발굴해 대학부터 관련 기술자들을 키워야 해결될 문제입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인데 4차 산업의 발전 속도가 훨씬 빠릅니다. 그사이 한국 기업들은 경쟁력을 잃고 도태될 겁니다.”
“그래서 전 중국이 그랬듯이 이미 개발된 선진 기술을 가져올 작정입니다.”
“기술과 인력을 빼내 오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구필준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한동안 중국이 불법적인 방법까지 동원하며 닥치는 대로 기술과 인력을 모으는 것에 세계의 기업들에 비상이 걸렸었다.
하지만 중국의 높아진 경제력에 해당 국가의 정부에서 대놓고 반발은 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하는 사이 중국이 기술과 인력을 신속히 확보하면서 싸움이 끝나 버렸다.
진혁이 그 같은 방법을 쓰겠다는데 우려하는 건 당연했다.
“빼내 온다는 단어는 적절치 않습니다. 공유한다는 의미가 맞을 겁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소장님께서는 그때를 대비해서 스마트 기술 응용 분야에 대한 연구에 집중해 주십시오. 조만간 그 결과물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믿고 제 결정은 잠시 유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심하는 진혁에게 구필선이 다른 문제를 내놓았다.
“개발한 기술을 적용할 현장이 많지 않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실제 현장에 도입하고 운영하면서 문제점을 개선하는 게 기술 향상에 가장 이상적인 모델입니다.”
“그에 대해서도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희망을 가지고 있는 부분이 회장님의 존재입니다. 미국과 중국이 스마트 기술에서 우위를 점한 것은 아마존과 알리바마가 관련 분야에 대해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어서입니다. 앞으로는 스마트 기술을 선점한 기업이 세계를 지배할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서로 힘을 합쳐 헤쳐 나가 봅시다. 소장님의 어깨에 이 나라 산업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제가 뒤에서 최대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겨우 구필준을 이해시키고 연구소를 나왔는데 진혁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한국에서의 일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정호영이 이끄는 실사팀은 방글라데시로 출발했다.
* * *
진혁이 오랜만에 동행 사무실에 들렀다.
우상우가 반갑게 맞았다.
“그간의 실적 좀 봅시다.”
딱딱하게 굳은 진혁의 표정에 우상우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동행 사무실이 갑자기 바빠졌다.
모두가 지켜보는 중에 진혁이 모아진 서류들을 꼼꼼히 훑어봤다.
김세동이 출근하면서 무심코 동행 사업이 정체됐다고 했던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초기에 가팔랐던 성장세가 일정 궤도에 오른 후에는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거기에 지킴이의 정착률은 30%가 채 되지 않았다.
진혁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성장세가 꺾인 이유가 뭡니까?”
“…….”
“아직 원인 파악도 안 됐다는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우리도 문제점을 인식하고 센터장 회의에서 여러 방안에 대해 논의했지만 실행에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왜요?”
“결정적으로 계획을 추진할 사람이 없습니다. 회장님이 알다시피 농어촌의 고령화와 공동화 문제가 심각합니다. 지금까지 이룬 사업도 있는 사람으로 겨우 꾸려 나가고 있는 실정이라, 새로운 사업의 추진은 불가능하다고 결론이 났습니다.”
농어촌의 인구 부족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진혁이라 더 이상 나무랄 수만도 없었다. 국가에서도 어쩌지 못하는 일이었다.
다른 부분을 물었다.
“지킴이들의 정착률이 낮은 이유는 뭡니까?”
“농사일이라는 게 육체적으로 힘든 일이라 버텨내지 못했습니다. 거기에 젊은 세대가 누릴 수 있는 문화와 여가시설이 없다 보니 도시 생활을 그리워 하다가 정부 지원금이 끊기자 떠났습니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답변에 진혁이 모두를 보고 말했다.
“여러분들은 성장률 정체와 지킴이 이탈이 별개의 사안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닙니다. 둘은 같은 문제입니다.”
“……?”
“사업가들 사이에서는 유지는 퇴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성세대들은 유지만 돼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청년들은 미래가 없다고 받아들여 떠나는 겁니다. 그들에게 농어촌에도 미래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줘야 남습니다.”
진혁의 말이 끝났음에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의미는 이해했지만 마땅한 대안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침묵만 이어지자 진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전 답이 스마트팜에 있다고 봅니다.”
“……!”
다들 놀란 표정을 짓다가 시선이 한 사람에게 향했다.
전 전국 귀농 지원 센터장 고진무.
우상우가 진혁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를 동행에 합류시켜 부대표직을 맡겼다. 지난번에 왔을 때 잠깐 인사는 나눴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진혁이 물었다.
“왜 다들 부대표님을 보십니까?”
“…….”
모두 눈치만 보고 답을 하지 못하자 결국 고진무가 입을 떼었다.
“몇 년 전에 한 대기업이 서산의 간척지에 대규모 스마트팜 농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농민들의 반대로 철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사로 본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요?”
“그때 반대했던 농민 단체에 저희 전국귀농지원센터도 뜻을 같이 했었습니다.”
“반대하신 이유가 뭡니까? 제가 보기에는 최적의 시스템이던데.”
“…….”
진혁과 이런 식의 대화는 처음이라 고진무가 어려워하며 답을 하지 못했다.
“회장님은 지금 뭐라 하시는 게 아닙니다. 토론을 하고 싶으신 거니 소신껏 말씀드리세요.”
우상우가 옆에서 하는 말에 고진무가 답했다.
“그 최적의 시스템이라는 게 문제입니다.”
“……?”
“회장님은 농사가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힘든 일인지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겁니다. 농민과 대기업은 애초부터 싸움이 안 되는 상대입니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입니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에 따라 농민에게 가야 할 혜택이 그들이 가져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우리의 입장이었습니다.”
“농민들도 스마트팜 설비를 갖추면 되지 않나요?”
“농민 개인이 스마트팜 시설에 갖추려면 최소 13억 원가량이 필요합니다. 일반 농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큰돈입니다. 정부가 1%의 금리로 전액 대출해 준다고 하지만, 그간 정부 정책 자금을 받은 이들 대부분이 신불자가 되었습니다. 정부는 수출하면 된다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결국 내수 시장에 저가의 농산물이 대량으로 쏟아지게 될 겁니다. 그로 인해 가격이 폭락해서 기존 농가에게 피해를 준다는 게 우리의 주장이었습니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까?”
“설비의 표준화가 이루어지지 않다 보니 대부분 수입해서 들어오고, 국내 업체는 영세해서 호환성과 A/S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나이가 많은 데다 정보 통신 기기의 조작법을 익히는 게 쉽지 않습니다.”
이후로도 고진무가 이런저런 문제점들을 더 지적하고 말을 멈췄다.
묵묵히 듣고 있던 진혁이 물었다.
“더 없습니까?”
“거의 다 말씀드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바를 관철하셨는데 농민들의 삶이 편해졌습니까?”
“그것과 지금의 농촌의 문제는 별개입니다.”
“당시 농민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무조건 반대만 할 게 아니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어야 했다는 말씀입니다.”
“저희도 농관민이 모여 논의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받아주지 않고 공사를 강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실력 행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서로에게 신뢰가 없으니 대화를 했어도 제대로 된 합의가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진혁이 모두를 둘러보고 말했다.
“전 스마트팜 사업을 동행에서 주도해서 진행했으면 합니다.”
“우리가요?”
“동행은 농민이 모여 만든 조직입니다. 대기업이나 특정 농민만 혜택을 보는 것이 아니니 반대할 명분이 없습니다.”
“대량 생산에 따른 가격 하락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풍년기근으로 인한 가격 폭락은 지금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동행은 그에 대처하는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전체 사업을 통제하게 되면 품목이나 생산량의 조절이 가능하니 오히려 가격 폭락을 막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비의 표준화는 우리가 만들면 됩니다. 지키지 않는 제품은 안 사 주면 됩니다. 정보 통신 기기의 조작법은 지킴이나 상대적으로 젊은 동행 식구가 배워서 천천히 알려 주면 됩니다.”
진혁은 고진무가 방금까지 늘어놓은 반대 논리에 대해 조목조목 대안을 제시하고 나서 말했다.
“제 주장이 전부 옳다는 게 아닙니다. 당장 동행에 참여하지 않는 농민에 대한 대책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동행에 앞서 농어촌이 먼저 무너질 거라는 것은 다들 느끼고 계실 겁니다. 스마트팜만이 정체된 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지킴이에게 희망을 주어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입니다.”
“…….”
“부대표님이 중심이 되어 스마트팜 사업 계획서를 준비해 주십시오.”
“제가 말입니까?”
고진무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스마트팜 사업에 대해 가장 앞장서 반대한 자신에게 그 일을 맡긴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부대표님이 스마트팜에 대해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문제점을 빠짐없이 나열해 보세요. 하지만 이전과 달리 주장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대안도 마련하셔야 합니다. 정부나 업체에 요구할 것도 적어 주세요. 그건 제가 맡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우 대표님은 직원들과 함께 부대표님을 도와주시고요.”
“알겠습니다.”
동행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알라딘 홀딩스의 야맘 사장이었다.
전화가 온 내용을 짐작한 진혁은 눈빛을 반짝이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