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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87화 (187/307)

187화. 도이에 중공업 인수전

통화가 연결되자 야맘이 보고를 했다.

-WTI(서부 텍사스유) 유가 선물에 투자했던 게 회장님이 말씀하신 가격대에 도달해 청산했습니다. 총 200억 달러가량 수익이 발생했습니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기억하고 있던 것이 아닌지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맞아 떨어졌다.

진혁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야맘을 격려했다.

“고생하셨습니다. 비트코인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매수 물량이 100만 개를 넘었습니다. 평균 매수가는 280달러 선이고, 시세는 4백에서 5백 달러를 오가고 있습니다. 계속 매집할까요?

“계속 매수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일도 하나 해 주셔야겠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인수하기 적당한 VC를 하나 물색해 주십시오.”

-벤처 캐피탈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중국 쪽 스마트 기술에 강점이 있는 업체로 알아봐 주십시오.”

-중국 스마트 기술 VC. 조사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통화를 마친 진혁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집으로 급히 들어선 진혁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희준이 팔자 좋게 지현의 무릎을 베고 소파에 누워 포크로 찍어 주는 과일을 받아먹고 있었다. 누구는 개 발에 땀나듯 뛰어 다니는데.

“아주 팔자 좋다.”

“너도 와서 먹어.”

천연덕스럽게 일어나지도 않고 그대로 누워 건네는 말이 더 화나게 했다.

“동서, 우리 족보 좀 따져 볼까?”

“……치사하게. 알았다.”

투덜거리며 일어났던 희준이 노려보는 진혁의 시선을 접하고 얼른 수정했다.

“알았습니다, 형님.”

“일본 출장 갈 거니까 준비해.”

“또?”

“가기 싫으면 그냥 푹 쉬어. 처제 직장 내보내고 네가 집에서 애 보면 되겠다.”

“아닙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째려보는 지현의 날카로운 시선을 뒤로 하고 두 사람은 집을 나섰다.

* * *

나리타 공항에 도착하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이가 있었다.

“하사가와 씨?”

“아,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한국 이름이 이춘섭입니다. 차를 준비했습니다. 가시지요.”

김상균이 문자로 알려 준 이가 이춘섭이었다.

이춘섭이 진혁의 캐리어를 받아 끌고 앞장섰다. 여전히 불만투성이인 희준이 뒤를 따랐다.

차에 타자 이춘섭이 물었다.

“호텔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JK 모건으로 갑시다. 부탁한 조사는 어떻게 됐습니까?”

“회장님 말씀대로 다에쓰 중공업과 도이에 중공업의 합병을 논의하기 위해 임시 이사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갑자기 대표이사가 바뀌고 주주총회 소집이 의결됐습니다.”

지난주에 도이에 중공업의 사회이사 4인의 요청으로 열린 임시 이사회에서, 합병에 반대했던 노무라 사장을 전격 해임하고 찬성파인 요시다 항공기 부문 이사를 사장으로 의결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30분 만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대서특필을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일본 국민들이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양사의 합병을 지켜보고 있었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도이에 중공업이 초기에 부인 보도를 냈습니다만, 사장까지 바뀐 마당이라 합병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조선업의 위기는 비단 한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일본 조선업은 1990년 전 세계 신규 수주의 54%를 차지했을 만큼 막강했지만, 2000년대 들어와 한국에 그 자리를 빼앗겼고 지금은 중국에까지 밀려 고사 직전이었다.

뼈를 깎는 구조 조정과 인력 감축으로 위기를 넘기는 듯했지만 최근 엔고의 영향 탓에 수주 실적이 전무했다.

이에 정부 주도로 업체가 합병을 통한 체질 개선 작업 중이었다.

이춘섭의 설명이 이어졌다.

“작년 정부 주도로 일본 마린 조선과 유니벌 조선이 합병해 건조 능력 세계 4위의 일본 마린 유니벌이 탄생했습니다. 올해는 다에쓰와 도이에가 대상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번에는 특이하게 조선뿐만 아니라 전 사업을 통합해 시너지를 높이겠다고 합니다.”

진혁이 조사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기억으로는 규모를 키운 일본 조선업으로 인해 한국은 더욱 곤란한 지경에 처했었다.

자신의 사업에 꼭 필요하고 조국에도 도움이 되니 일석이조였다.

JK모던 도쿄지점은 금융사에 밀집한 카야바쵸에 있었다.

앤더슨 지점장이 문 앞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앤더슨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진혁입니다.”

지점장실로 안내한 앤더슨은 당연하다는 듯이 진혁에게 상석을 양보했다.

앤더슨이 깍듯이 대하는 것은 본사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도 있지만 진혁과 인연을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 더 컸다.

그는 진혁이 ‘검은 머리 짐’이라는 명성을 얻은 일본 전력 공매도 당시도 이곳 지점장이었는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제때 손절을 못 해 큰 손실을 봤었다.

그 한 번의 거래로 경쟁상대로 여겼던 젯다 지점장이던 스미스와 자신의 처지가 180도 바뀌었다.

스미스는 뉴욕으로 돌아가 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 반면, 자신은 이곳에서 고된 외국 생활을 계속하고 있었다.

자신도 이번 기회에 진혁의 투자 전략을 지켜보다가 편승하겠다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스미스가 그랬던 것처럼 조만간 미국으로 돌아가 호가호위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생각에 잠겨 있던 앤더슨은 진혁의 시선이 낯선 사내로 향하자 서둘러 소개했다.

“기업 인수 합병 로비스트인 도노반 씨입니다. 최근 일본 제조 기업 간 합병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신 일본 전문가십니다.”

“도이에 중공업 인수가 가능하겠습니까?”

“쉽지 않아 보입니다. 합병 반대파인 노무라 사장이 해임됐다는 것은 다에쓰 그룹이 이미 이사진을 장악했다는 방증입니다.”

진혁이 심각한 표정을 짓자 도노반이 말을 이었다.

“도이에는 규모는 작지만 조선업을 기반으로 착실하게 성장해 왔습니다. 그에 반해 다에쓰는 끊임없는 인수 합병으로 몸집을 불려온 터라 그에 대한 노하우가 상당합니다. 힘든 싸움이 될 겁니다.”

“도이에가 다에쓰의 먹잇감으로 선택된 이유는 뭡니까?”

“도이에의 최근 실적이 좋지 못합니다. 한국에 이은 중국 조선업의 급성장으로 조선 부문의 실적이 계속 저조한 데다가, 최근 엔고의 영향으로 조선은 물론 주력인 오토바이와 철도 차량의 수출마저 여의치 않습니다. 거기에 산업용 로봇은 제때 투자가 이루어지지 못해 성장이 정체된 상태입니다.”

“자금 상황이 좋지 못해 벌어진 일입니다. 다에쓰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인수하겠다고 제의하세요.”

“다에쓰보다 더 큰 문제가 일본 정부입니다. 도이에 중공업은 방산 업체입니다. 잠수함 건조는 물론 선박과 차량 부품이 일본 자위대에 공급되고 있습니다. 외국 기업에게 매각되는 것은 무조건 막을 겁니다.”

“…….”

“이번에 임시 이사회를 주도한 사외이사들은 모두 일본 신탁은행 측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부의 의지가 들어간 게 분명합니다.”

도이에 중공업의 지분율을 따져 보면 창업주의 후손인 노무라 전 사장 측이 우리사주 조합원 지분을 포함해서 30%로 최대주주였다.

그다음이 25%를 소유한 일본신탁은행이었다. 기타 투자은행이 15%에 나머지는 소액 주주들이었다.

도노반의 말한 내용은 이미 스미스가 보내 준 자료로 알고 있었다. 진혁 역시 일본 정부의 방해 공작이 제일 우려가 됐다.

스미스도 그런 이유를 들어 포기하라고 했지만 진혁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이 앞으로 펼쳐나갈 계획에 꼭 필요한 기업이었다.

일본 정부를 상대할 방법을 고심하던 진혁이 마침내 기억 저편에 머물러 있던 일련을 사건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도노반이 말을 이었다.

“회장님의 도이에 인수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합니다만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저녁에 기자 회견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도이에 중공업에 공식적인 인수 제안을 할 겁니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회장님의 강한 의지는 알겠습니다만 이건 제 능력 밖입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뛰어난 분에게 맡기는 게 좋겠습니다.”

“아닙니다. 전 도노반 씨에게 맡기겠습니다.”

“하지만…….”

다시 고사 의사를 내비치려는 도노반의 말을 막고 진혁이 물었다.

“보통 이런 경우 의뢰 비용은 어떻게 됩니까?”

“일반적으로 인수 금액의 0.1%를 받습니다. 착수금으로 절반, 나머지는 성공 후에 받습니다.”

“착수금으로 전액 드리겠습니다.”

진혁의 파격적인 제안에 도노반이 갈등을 했다.

이건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을 맡았다가 인수 작업에 실패하면 그간 쌓아 온 로비스트의 경력에 오점을 남기게 된다.

무조건 거부해야 하지만 금액이 너무 컸다.

도이에 중공업은 자산 가치가 1조 6천억 엔에 이르는 거대 기업이었다. 의뢰비만도 1,500만 달러가 넘었다.

도노반의 마음을 읽고 진혁이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도노반 씨에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습니다. 이건 제가 무조건 고집을 부려서 억지로 떠안으신 겁니다. 그건 여기 앤더슨 지점장님이 확인시켜 줄 겁니다.”

“…….”

“성공 여부를 떠나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그거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맡겠습니다.”

고심하던 도노반이 마침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진혁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앤더슨의 주도하에 용역 계약서를 작성했다. 진혁은 그 자리에서 바로 1,500만 달러를 입금시켜 줬다.

앤더슨 지점장은 그런 진혁의 거침없는 행보에 혀를 내둘렀다. 그 역시 아무리 ‘검은 머리 짐’이라도 이번은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준비를 하겠다며 도노반이 나가자 앤더슨이 물었다.

“주식 매입은 언제부터 시작하실 생각이십니까?”

“……?”

“주총에서 합병을 막으려면 주식을 조금이라도 끌어모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작업해서 주총 전까지 얼마나 모을 수 있겠습니까?”

역으로 되묻자 앤더슨이 답을 하지 못했다.

합병설이 알려지자 도이에 중공업 주식은 연일 상승해 저점 대비 두 배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대량 매수 자금이 유입되면 가격은 천정부지로 오를게 분명했다.

자금도 자금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가격 상승에 매도자들이 매물을 거둬들일 거라 물량 확보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앤더슨이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표 대결로 가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전에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자 회견을 준비해야 하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뵙지요.”

나가는 진혁의 등을 바라보는 앤더슨의 눈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스미스가 직접 전화까지 해서 무조건 진혁을 믿으라고 했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앤더슨이 트레이딩 룸에 전화를 했다.

“중단했던 다에쓰 그룹의 주식 매수를 다시 시작해라. 최대한 확보한다.”

앤더슨은 진혁의 말과는 다른 결정을 내렸다.

도이에 중공업을 인수하면 다에쓰 중공업이 단숨에 업계 1위로 올라섬은 물론 그룹의 부족한 부분을 메울 수 있으니 시너지 효과가 상당했다.

당연히 주가 상승이 기대된 상황이라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세상에 100% 승률은 없다.

‘이번에는 스미스가 틀렸어.’

스미스가 진혁의 성공에 편승해 어부지리로 미국으로 재입성했다면, 자신은 그의 실패를 이용해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호텔까지 태워 준 이춘섭은 진혁으로부터 몇 가지 지시를 받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떠났다.

호텔 방으로 들어서자 희준이 물었다.

“도이에 중공업을 인수하게?”

“응. 서남아시아 사업에 여러 가지로 필요할 것 같아서.”

“히야, 한국인인 우리가 일본 기업을 인수한다니. 맨날 우리 기업들이 일본기업에 넘어갔다는 기사만 봐 왔는데. 이번에 아주 코를 납작하게 해 줘라. 아무튼 내 친구지만 대단하다.”

희준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한국인치고 일본에 대한 감정이 좋은 이는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한 사과는 없고 끊임없이 거짓말만 늘어놓더니 이제는 독도도 자기네 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진혁은 호텔 회의실로 내려갔다. 기자 회견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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