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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188화 (188/307)

188화. 걸림돌, 다에쓰

기자 회견장의 분위기는 지나칠 정도로 썰렁했다. 참석한 기자도 몇 명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혁은 예상하고 있던 터라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잠시 후 기자회견이 시작되자, 진혁은 알라딘 그룹이 경영난에 빠진 도이에 중공업을 인수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진혁과 희준은 기자 회견을 마치고 저녁까지 먹은 뒤 돌아왔다.

희준이 지현과 통화로 오글거리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진혁은 컴퓨터에 매달렸다. 직접 경험했던 일이 아니라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미래를 유추해 낼 필요가 있었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 * *

그 시각, 다에쓰 그룹 회장실에서 진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서진혁이 기자 회견을 열었답니다.”

“건방진 조센징.”

나카타 회장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나왔다.

얼굴 곳곳에 검버섯이 피어 있는 노령의 나이지만 지금도 젊은이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그룹을 장악하고 있는 나카타였다.

다에쓰 그룹은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그룹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군수 기업으로 성장했는데, 강제 징용한 조선인의 노동력을 사용했었다. 현재도 여러 극우 단체와 정치가를 후원하고 있었다.

강제 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나 배상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뼛속까지 제국주의로 물들어 있는 나카타에게 있어 여전히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 정도였다.

하찮은 천민 출신이 감히 자신의 일을 공개적으로 방해하고 나선 것에 심기가 불편했다.

“그것 하나 막지 못하고 요시다는 뭘 했다더냐?”

“주요 일간지 기자들은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답니다. 일부 잡지와 인터넷 기자들만 들었으니 큰 걱정은 하지 마시라고 연락을 해 왔습니다.”

보고 하는 이는 장남으로, 다에쓰 중공업 사장인 하네다였다.

한가한 답변에 나카타 회장 입에서 당장 호통이 튀어나왔다.

“바보같이! 철저하게 했어야지.”

“걱정 마십시오. 쇼다 경제 산업 대신이 최악의 경우라도 외국 자본에 도이에가 넘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셨습니다.”

“정치인 놈들의 말만 믿어서는 안 된다. 이번에 후원금을 넉넉하게 보내 줘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센징은 영악한 놈들이다. 틈을 보이면 안 된다. 철저하게 무너트려 제국의 힘을 깨닫게 해 줘야 다시는 그런 불충한 생각을 못 하게 될 거다.”

“알겠습니다. 아주 뜨거운 맛을 보게 해서 쫓아 버리겠습니다.”

하네다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도 조센징은 하찮은 존재였다.

* * *

진혁이 기자 회견을 했는지도 국민들이 모를 정도로 일본 언론은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러건 말건 진혁은 다음 날 희준과 함께 도쿄 관광을 나갔다가 기분만 잡치고 일찍 돌아왔다.

이곳도 중국 관광객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떼로 몰려다니면서 큰 소리로 떠드니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구매력이 높다 보니 상점에서는 최고의 대접을 했다.

상대적으로 알뜰 쇼핑을 하는 한국 관광객은 푸대접을 받고 있었다.

사흘째 되던 날, 호텔방 컴퓨터로 자료 조사를 하던 진혁은 이춘섭의 전화를 받고 급히 로비로 내려갔다.

남들이 보면 마음이 편해서 관광을 즐기는 것 같지만 속마음은 아니었다.

이번 일을 어떻게든 성공시키려는 진혁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춘섭으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자신이 내린 지시와 상관있는 일이 분명했다.

진혁이 맞은편에 앉자마자 이춘섭이 봉투를 건네며 말했다.

“회장님의 예상이 맞았습니다. 점심시간에 하네다 사장이 쇼다 경제 산업 대신을 만나 가방을 전달했습니다.”

봉투 안에는 가방을 들고 고급 식당으로 들어서는 하네다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들어 있었다. 물론 나올 때는 그 가방이 쇼다의 손에 들려 있는 사진도 있었다.

진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로는 부족했다.

그 모습에 이춘섭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녹음 파일입니다.”

“도청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요?”

“갑작스럽게 잡힌 약속이고 은밀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라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하지는 못했습니다.”

“……?”

“쇼다 대신이 식당을 나와 차를 타고 가면서 통화한 내용을 녹음한 겁니다.”

“차에 도청기를 설치한 것입니까?”

“……핸드폰이 참 여러 가지로 유용합니다. 공무용 폰은 전문가들이 매일 점검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만, 이런 은밀한 일에는 개인 폰을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쉽습니다.”

이춘섭이 어색한 표정으로 돌려 말했지만 진혁은 바로 알아차렸다. 도청을 위해 쇼다 대신의 핸드폰에 스파이 앱을 설치했다는 말이었다.

이춘섭은 흥신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가지각색의 의뢰를 받아 처리하다 보니 이런 종류의 일에 능숙했다.

진혁은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상대방의 영업 비밀이었다.

이춘섭과 헤어져 호텔 방으로 돌아온 진혁은 컴퓨터에 USB 메모리를 꽂고 쇼다의 핸드폰 통화 내역을 들어 봤다.

첫 통화는 보좌관에게 받은 돈의 처리를 지시하는 내용이었는데, 금액이 너무 작다며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다음 통화는 누구인지 모르지만 쇼다의 목소리가 정중했다.

다에쓰가 도이에를 합병하면 조선업 통합 절차가 마무리된다며 그를 위해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랑으로 일관했다.

슬슬 지루해질 때쯤 마침내 원하던 대화가 나왔다.

-다음은 자동차 부분입니다, 회장님.

-잘만 처리해주시오. 난 나카타보다 통이 큰 사람이니 기대하셔도 될 거요.

-아무렴요. 이번 일만 끝나면 회장님의 재계 1위의 입지가 더 견고해질 겁니다.

-대신만 믿겠소.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칭찬하며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통화를 끝냈지만 진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했다.

자동차 하나로 일본 재계를 평정하고 세계적 기업의 반열에 올라선 이에다 회장. 그 역시 정경유착의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진혁의 눈이 더 차갑게 빛났다.

* * *

주총이 열리기 이틀 전.

JK 모건 사무실에서 다시 앤더슨, 도노반과 자리를 했다.

도노반의 안색이 며칠 사이에 까칠해져 있었다.

나름 열심히 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너무도 차가웠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해도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진혁이 의뢰비를 한꺼번에 자급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포기하고 미국에 돌아갔을 것이다.

그에 반해 앤더슨의 표정은 좋았다.

다에쓰 그룹의 주가가 연일 치솟고 있었다. 매집해 놓은 주식들의 평가 이익이 적지 않았다.

미국에서 스미스를 볼 날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노반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기대를 내려놓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분위기가 좋지 않나요?”

“안 좋은 정도가 아닙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도이에도 연락조차 없습니다.”

“상대방이 연락 안 하면 찾아가면 되지요. 안 그렇습니까, 지점장님?”

“예?”

갑작스럽게 자신을 응시하는 진혁의 행동에 앤더슨이 놀라 되물었다.

“JK 모건이 면담조차 잡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 직접 찾아가시게요?”

“슬슬 움직일 때가 됐지요. 노무라 전 사장님과 약속을 잡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앤더슨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JK 모건의 이름만 듣고도 노무라가 쌍수를 들고 반기겠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뭐 씹은 표정을 하고 있는 앤더슨을 놔두고, 진혁은 도노반에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달라는 말을 하고 일어났다.

노무라 전 사장과의 만남은 늦은 오후 도쿄 외곽의 주택가 찻집에서 이루어졌다.

“서진혁입니다.”

“앤더슨 지점장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나왔지만 헛걸음하셨습니다. 도이에를 알라딘에게 넘길 생각이 없습니다.”

“사장님에게는 그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요?”

“……!”

노무라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하지만 반발하지는 못했다.

대표이사 변경은 임시 이사회의 의결 사항이지만 이사 해임은 주총에서 승인을 받아야 해서 겨우 이사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일이면 끝이었다.

비록 자신이 우호 지분을 포함하면 최대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만 나머지 모두가 합병을 찬성하고 있었다. 내일 이사직마저 박탈당할 게 분명했다.

진혁이 노무라를 직시하고 말을 이었다.

“제가 노무라 사장님이 결정권을 되찾아 오실 수 있게 해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구체적인 이야기는 그다음에 나누도록 하지요. 내일 주총에서 뵙겠습니다.”

자신의 말만 하고 떠나는 진혁의 등을 바라보는 노무라의 시선에는 복잡함 감정들이 담겨져 있었다.

호텔로 돌아오자 반가운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변호사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회장님.”

미소 띤 얼굴로 인사하는 이는 폴스데이 로펌의 수석 변호사 베이커였다.

진혁의 의뢰로 미군의 원전 사고 피해 배상 소송을 맡았던 인연이 있는 인물이었다.

일본 전력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사과를 받아내 유명해졌다.

진혁이 주변을 둘러보고 물었다.

“팀원들은요?”

“방에서 쉬고 있습니다. 대체 얼마나 큰일이기에 전부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겁니까?”

베이커가 한껏 기대 어린 시선으로 물었다.

그가 기억하는 진혁은 통이 엄청나게 큰 사내였다. 돈 씀씀이도 그렇지만 벌이는 일이 일반인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팀원들을 전부 데리고 즉시 일본으로 건너와 달라는 말에 모든 일을 제쳐두고 온 것은 이번도 큰 건이 확실하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일은요. 지난번에 도와주셨는데 감사 인사를 제대로 드리지 못한 것 같아서요. 그동안 일하시느라 바쁘셨을 테니 팀원들과 일본 관광을 하시면서 좀 쉬십시오. 경비는 제가 모두 대겠습니다.”

“…….”

“이쪽은 제 일을 도와주는 친구입니다. 베이커 씨와 팀원의 일본 관광을 안내해 줄 겁니다.”

“내가?”

갑작스럽게 지목당한 희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혁은 깡그리 무시하고 베이커를 그에게 떠넘긴 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버렸다.

남아 있던 희준과 베이커의 표정이 황당하게 변해 있는 것은 당연했다.

엘리베이터를 탄 진혁의 표정이 언제 웃었냐는 듯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방보다 한층 아래에 내려 복도를 따라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재빨리 한쪽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약속대로 잠겨 있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인사하는 이춘섭을 놔두고 진혁의 시선은 소파에 앉아 있는 추레한 모습의 사내에게 향해 있었다.

“다에쓰 자동차 연구소의 소프트웨어 개발자 스즈키입니다.”

이춘섭의 말을 들으며 진혁은 스즈키 앞에 가 앉았다.

진혁은 과거 여러 수입차가 배기가스 조작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게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고 여겼다.

이춘섭에게 매수가 가능한 다에쓰 자동차 근무자를 찾아보라고 했더니 걸린 게 스즈키였다.

이춘섭의 보고에 의하면 스즈키는 빠칭코에 미쳐 가산을 탕진하고 이혼까지 당한 처지라고 했다.

최근 은행으로부터 월급 차압 통보를 받은 스즈키가 이춘섭의 제안을 거부하기는 힘들었다.

진혁이 물었다.

“원하는 게 뭡니까?”

“100만 달러와 함께 미국으로 안전하게 떠나게 해 주십시오.”

“드리지요. 확인만 끝나면 바로 공항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단번에 받아들이는 진혁의 태도에 스즈키가 오히려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혁의 눈짓에 이춘섭이 가방을 가져다 스즈키 앞에 열어 보였다.

백 달러 지폐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잠깐.”

스즈키의 손이 가방으로 향하는 것을 진혁이 막았다.

“그 전에 우리에게 확인시켜 줘야 할 게 있지 않습니까?”

큰돈을 보고 이미 눈이 돌아간 스즈키인지라 바로 옆에 놓인 가방 안에서 서류와 USB를 꺼내 놨다.

“차량 운행 상태에 따른 배기가스를 검사한 시험 성적서입니다. 앞의 것이 정본이고 뒤의 것이 조작된 겁니다.”

과거에는 데이터를 위조했다면 지금은 한 단계 발전해 있었다.

소프트웨어 조작을 통해 정차와 주행 상태의 대기까지 배출량을 조절하는 것은 물론 바퀴의 각도에 따라 조절도 가능했다.

“스티어링 휠이 규정 값보다 덜 움직이는 게 감지되면 ‘적격 조건’에 맞는 낮은 양의 배기가스를 배출한다는 게 이 기술의 핵심입니다.”

자부심이 강하게 깃든 스즈키의 답변에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뛰어난 능력을 잘못된 곳에 사용해 망가지는 전형적인 케이스였다.

서류를 확인한 진혁이 USB를 집어 드는 모습에 스즈키가 말했다.

“암호가 걸려 있어 바로 확인은 불가능할 겁니다. 그리고 그 암호를 아는 사람은 저밖에 없지요.”

의심이 많은 놈이었다.

진혁은 스즈키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조건을 말씀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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