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쇼다 대신의 굴복
“미국에 살고 있는 친척 계좌입니다. 먼저 그쪽으로 돈을 입금해 주십시오.”
조금도 어렵지 않은 주문이었다.
파일만 받고 돈을 주지 않을까봐 걱정되었나 보다.
진혁으로선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던 자신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좋습니다.”
메모지를 받아든 진혁이 바로 알라딘 홀딩스의 야맘 사장에게 전화해 계좌를 불러주고 입금을 지시했다.
얼마 후 스즈키 핸드폰이 울렸다. 미국의 친척이 메신저를 통해 입금 사실을 알려왔다.
스즈키가 암호를 알려 주자, 이춘섭이 서류와 USB를 가지고 얼른 옆방으로 갔다.
전문가가 대기하고 있었다.
잠시 후, 방으로 돌아온 이춘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이 스즈키에게 마지막 요구를 했다.
“차가 대기하는 동안 이 일에 대해 증언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대가도 지불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내친걸음이었다. 스즈키는 누구의 지시로 어떻게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 되었는지 낱낱이 밝혔다.
이춘섭이 그 모습을 핸드폰으로 촬영했다.
수하가 스즈키를 공항으로 데려다주러 떠나자 진혁은 이춘섭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긴자 요정 골목으로 차를 몬 이춘섭이 가게 앞에 멈췄다.
“쇼다 대신이 이곳의 미유키란 아이에게 푹 빠져 있습니다. 공돈이 생겨서 그런지 전화를 하자 반색하며 오겠다고 했답니다.”
“인맥이 상당하시네요.”
“운이 좋았습니다. 이곳 주인이 2000년대 초에 재팬 드림을 꿈꾸고 건너왔던 호스티스입니다. 어려웠을 때 도와줬던 게 고마웠다며 흔쾌히 승낙해 줬습니다.”
“피해가 안 가게 확실히 매듭지어야겠군요.”
진혁이 호기롭게 말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면 이번 일은 반드시 성공한다.
쇼다 경제 산업 대신이 활짝 핀 얼굴로 들어섰다.
애간장을 태우던 미유키가 마침내 자신을 받아들이겠다고 연락해 왔다.
그러나 뜨거운 밤을 생각하느라 끓어올랐던 쇼다의 피가 빠르게 식었다. 미유키 대신 웬 시커먼 사내놈이 앉아 있었다.
“웬 놈이냐?”
“알라딘의 서진혁입니다. 앉으시지요.”
쇼다의 눈이 커졌다. 그러도 곧 상대의 정체를 깨닫고 노기를 드러냈다.
“건방진 놈. 대일본 내각 인사를 이런 식으로 농락하다니. 네놈은 물론 이곳도 온전히 못할 것이다.”
“일본 전력이 그렇게 건방을 떨다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직접 보시고도 그 길을 선택한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해보시겠습니까?”
진혁의 싸늘한 눈빛에 쇼다의 행동이 주춤했다.
일본인으로서 치욕스러운 기억이었다. 그 일을 주도했던 이가 서진혁이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기세가 꺾인 쇼다가 결국 앞에 와서 앉았다.
“좋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들어 보자.”
진혁은 으르렁거리는 쇼다 앞에 말 대신에 사진 몇 장을 펼쳐 보였다. 식당에서 하네다 사장으로부터 가방을 건네받으면서 찍힌 사진들이었다.
흠칫 놀란 표정을 짓던 쇼다가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깟 사진으로 나를 협박해 도이에 중공업을 인수하려는 모양인데, 잘못 생각했다. 이건 정황만 있지,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한다. 겨우 이딴 치졸한 짓으로 나를 옭아맬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이건 맛보기고 본 코스는 이제부터니 보시고 잘 판단하십시오.”
진혁의 눈짓을 받은 이춘섭이 노트북을 가져다 쇼다 앞에 놓았다.
먼저 핸드폰 통화 내역을 틀어 줬다.
시간이 흐를수록 쇼다의 얼굴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마지막으로 이에다 회장과의 대화를 듣고 쇼다가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넌 지금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분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고도 일본 땅에서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냐?”
“생즉사, 사즉생. 살려고 발버둥 치면 죽을 것이오, 죽을 각오로 임하면 살 것이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계속보시지요.”
이춘섭이 이어서 틀어 준 영상은 스즈키가 증언한 녹화 파일이었다.
이전과 달리 쇼다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건 단순히 도이에 중공업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은 최근 잇단 품질 조작 사실이 드러나 품질 하면 일본, 일본 제품이면 믿을 수 있다는 신뢰성에 큰 상처를 입었다.
닛뽄 자동차의 ‘완성 검사’에 무자격 직원을 이용한 사실, 나라 철장의 제품 강도 조작, 요사나 화학의 폴리에틸렌 부실 검사.
사건이 터질 때마다 세계 곳곳에서 대규모 리콜 사태와 막대한 배상금이 들어갔다.
스즈키의 마지막 증언이 흘러나왔다.
-이건 비단 다에쓰 자동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본 자동차 업체 모두가 이와 유사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핏기가 사라진 쇼다의 얼굴을 보며 진혁이 말했다.
“일본 전력으로부터 사과와 배상금을 받아낸 미국 폴스데이 로펌의 수석 변호사인 베이커 씨 팀이 전원 일본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하냐에 따라 그들에게 이 파일을 넘길지가 결정 날 겁니다.”
“살려 주시오.”
쇼다가 바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자동차 산업은 일본 경제의 근간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일본 경제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은 막아야 했다.
쇼다의 머리꼭지를 노려보며 진혁은 통쾌함보다는 불쾌감을 느껴졌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일본인 특유의 전형적인 비굴한 모습이었다.
진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일본호가 침몰할지 말지는 오로지 당신 하기 나름이오. 어떤 결정을 했는지는 내일 주총에서 확인하겠소. 갑시다.”
진혁의 말에 이춘섭이 노트북을 거두고 따라 나왔다.
혼자 남은 쇼다가 겨우 머리를 들었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시선에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 * *
다음 날, 도이에 중공업 본사 회의실에서 진행되는 주총장은 주주들은 물론 일본의 모든 언론사 기자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뜨거운 관심과 달리 분위기는 차분했다.
주총은 요식 행위일 뿐, 다에쓰가 도이에 중공업을 먹어 삼키는 것은 기정사실이라는 분위기였다.
요시다 신임 사장이 합병에 대한 찬반 투표의 시작을 알리자 주주들이 일어나 투표소로 향했다.
진혁은 회의장 맨 뒤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총의 절차를 문제 삼아 합병 결의 무효 소송을 내시려는 전략이십니까?”
옆에 서 있던 베이커 변호사가 물었다.
진혁이 일본 관광이나 하라고 불렀다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들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따로 조사해 진혁이 도이에 중공업 인수 작전에 뛰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혁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냥 지켜보세요. 재미난 구경이 될 겁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뜬 구름 잡는 답변에 베이커의 표정이 난감하게 변했다.
그때 진혁은 투표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노무라 전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노무라가 어두운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그의 표정에는 어떠한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투표가 끝나자 개표가 진행되었다.
“일본 신탁, 찬.”
모두의 예상대로 찬성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중간 중간 반대표가 나왔지만 대세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할 만큼 표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성질 급한 일부 기자들이 더 지켜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리를 뜨는 모습마저 보였다.
개표가 끝나 요시다 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다에쓰 중공업과 도이에 중공업의 합병안은 찬성 67%, 반대 32%, 무효 1%로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
텅!
“잠깐!”
갑자기 회의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소리치며 뛰어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경비 직원이 급히 달려가 막으려다가 멈칫했다. 국민들 모두가 알고 있는 다에쓰 중공업의 하네다 사장이었다.
얼마나 급히 달려왔는지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진정시킨 하네다 사장이 여전히 의사봉을 들고 있는 요시다의 모습에 안심하고 연단으로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다른 이였다면 어림도 없지만 통합 중공업을 이끌 인물이라 아무도 제지하지 못했다.
마른 입술에 침을 바른 후 하네다 사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다에쓰 중공업은 합병 제안을 철회합니다. 도이에 중공업의 주주 여러분들께 혼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하네다의 모습에 장내에 난리가 났다.
기자들이 서둘러 속보를 내보내기 위해 나가려는 바람에 입구에서 큰 혼란이 일어났다.
진혁이 삽시간에 변한 장내 상황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베이커에게 물었다.
“좋은 구경 되셨습니까?”
속보로 전해진 다에쓰 중공업의 급작스런 합병 철회 사실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던 일본 국민들은 이어진 소식에 기겁을 했다.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기업가인 나카타 다에쓰 그룹 회장의 전격적인 은퇴 선언이었다.
더불어 그동안의 주장을 뒤엎고 한국인의 강제 징용 사실을 시인하고 사과와 함께 배상에 적극 협조하겠다는 의사도 밝혔다.
* * *
다음 날, 진혁은 희준과 함께 도이에 중공업을 다시 찾았다.
사장실로 안내받아 들어가자 노무라가 격하게 반겼다.
그는 어제 급하게 열린 임시 이사회에서 다시 사장에 선임되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는 노무라의 환대에 사정을 모르는 희준이 오히려 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리에 앉고 비서가 차를 내놓고 나가자 진혁이 본론을 꺼냈다.
“전 약속대로 사장님에게 결정권을 드렸습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회사를 지켜 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인수 제의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노무라가 어렵게 답을 했다.
자신만 생각하면 얼마든지 넘겨주겠지만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진혁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먼저 아시다시피 도이에 조선은 제 개인의 아니라 우리 가문의 역사와 같습니다.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요?”
“우리 회사의 제품이 자위대에 납품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다시 머리를 조아린 노무라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진혁이 말했다.
“사장님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전 도이에 중공업 경영을 맡을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
“특히 도이에 조선은 맡아 달라고 해도 거부할 겁니다. 한국에도 곤란을 겪고 있는 조선 회사는 많습니다.”
“그럼 왜?”
“아시다시피 알라딘 그룹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방글라데시에서 경제 특구를 신도시 개념으로 개발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경전철을 설치할 생각입니다. 개발되고 나면 공단이 세워지게 될 텐데, 산업용 로봇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동남아시아는 물론 서남아시아에서는 차보다 오토바이가 더 많이 돌아다닙니다. 방글라데시는 내륙 수운이 발달해 선박 수요가 끊임없이 발생하게 될 겁니다. 더 할까요?”
“아닙니다. 지금까지 하시는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노무라가 눈가에 힘이 들어간 상태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진혁이 이야기한 모든 제품을 도이에 중공업이 생산하고 있었다.
철도 차량, 로봇, 오토바이, 선박.
알라딘 그룹과 도이에 중공업을 합치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비단 알라딘 그룹만이 아니라 도이에 중공업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저는 세계에 퍼져 있는 알라딘 그룹을 이끌어야 합니다. 섬나라 일본에 안주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습니다. 도이에 중공업은 지금처럼 노무라 사장님이 맡아서 경영하셔야 합니다. 전 자금을 지원하고 판매에 집중하겠습니다. 필요하다면 각서를 써 드리지요. 아, 거기에 국방 관련 기밀 정보에 대한 접근 차단에도 동의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일본 정부에서도 막지는 않을 겁니다.”
노무라의 고개가 자동으로 끄덕여졌다. 진혁의 제안대로라면 자신이나 일본 정부도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두 사람이 합의하자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미 들어와 있던 베이커 변호사를 불러 인수에 따른 작업을 맡겼다. 베이커의 전문 분야는 아니었지만 그가 일본 내에 아는 변호사가 많았다.
* * *
며칠 후, 진혁이 일본 신탁이 가지고 있던 25%의 지분과 노무라 소유의 지분 10%를 6천억 엔에 매수하여 도이에 중공업의 최대 주주가 됐다.
평소 같으면 국내 핵심 기업이 외국 자본에 팔리는 걸 결사반대하며 막았을 일본 정부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는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일본 내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짤막한 단신만 내보냈을 뿐 철저히 침묵했다.
이와 반대로 해외 언론은 뜨거운 관심을 보이며 연신 기사를 쏟아냈다.
한국 언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자극적인 제목도 사방에서 보였다.
‘서진혁, 일본의 심장에 알라딘 깃발을 꽂다.’
‘찢겨진 일장기. 서진혁의 광폭 행보.’
다시 한번 국민들이 서진혁의 이름을 부르며 열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