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금의환향
한국에서 급히 건너온 한상국이 도이에 중공업의 온라인몰을 알쇼핑으로 전환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개발 도상국들과 달리 택배 시스템이 발달된 나라라 배송에 큰 문제는 없었다.
진혁은 노무라 사장으로부터 사업 전반에 대한 보고를 듣고 공장 시찰에 나섰다.
그런데 진혁을 옆에서 보좌하는 이는 희준이 아니라 의외의 인물이었다.
알라딘 스마트 기술 연구소장 구필준이었다.
그는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빛나는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철저한 일본인 특유의 기질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공장들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약속대로 방산 관련 시설은 건너뛰었다.
진혁이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반면, 앤더슨 지점장은 쓸쓸히 사무실의 개인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본사의 지시를 어기고 다에쓰 그룹에 대한 무리한 투자를 감행해 큰 손실을 입은 것이다. 앤더슨에게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기 발령 조치가 내려졌다.
* * *
일본에서의 일을 마무리 짓고 한국으로 돌아가자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박이동이 서류철을 펼쳐 들고 보고를 했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조건에 맞는 건물이 경매로 나왔습니다.”
진혁은 박이동에게 알라딘 그룹이 들어갈 빌딩을 알아보라고 했었다.
“대명 빌딩입니다. 지하철 2호선과 신분당선이 만나는 강남역 1번 출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입니다. 코너에 위치해 입지적으로 우수합니다. 무엇보다 AK와 동행 사무실로부터 도보로 6분밖에 걸리지 않아 최적의 조건입니다.”
“규모는요?”
“토지 면적 300평에 지하 4층, 지상 10층 구조입니다. 현재 4층부터 7층이 공실이라 알라딘 그룹이 들어가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진혁에게 박이동이 말을 이었다.
“인근 빌딩 대비 70억 원가량이나 낮은 300억 원 정도면 낙찰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진혁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지민은 혜주를 데리고 방글라데시로 오겠다고 했지만 진혁은 마음만 감사히 받기로 했다.
자신을 위해 가족을 또 다시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그래서 AS 그룹을 신설해 정호영에게 맡기고, 자신은 알라딘 그룹을 총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랬더니 희한하게 더 큰 그림이 보였다.
그간 로힝야에 매달려서 방글라데시만 보다 보니 시야가 좁아져 있었다.
진혁은 동행 사무실에 들러 고진무 부대표가 만든 스마트팜 사업 계획서를 받아들고 청와대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서 회장.”
권성일 대통령이 죽은 조상이라도 돌아온 듯 격하게 반겼다.
그도 그럴 것이 도이에 중공업의 인수로 진혁의 주가는 연일 상종가를 치고 있었다.
덕분에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며 비판했던 여론이 쑥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권성일이 농담을 건넸다.
“그간 정 사장만 보내고 발길을 끊으셔서 영영 안 오시나 했습니다.”
“방글라데시 정부에서 자리를 맡고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입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이해합니다. 오시면 좋지만 안 오셔도 좋은 소식을 연달아 들려주니 충분합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직접 찾아오신 겁니까?”
“농어촌 지원단장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뵌 겁니다.”
권성일은 물론 이현국마저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농어촌 지원단장이 정부 조직도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거의 유명무실화되어 있었다.
동행 사업이 안정되고, 사업 관계로 바쁜 진혁이 더 이상 그 일에 관여하지 않는 줄 알았다.
“동행에서 스마트팜 사업을 추진해 볼까 합니다.”
진혁의 이어진 말에 이현국의 얼굴이 당장 구겨졌다.
“그 사업은 이미 과거 정부에서 폐기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지금 와서 그것을 다시 꺼내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농어촌의 문제를 풀어 달라며 먼저 농어촌 지원단장을 제의한 것은 청와대였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서 회장님이나 동행이 이룬 성과에 우리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동행은 임시방편이었지, 근원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정체된 성장과 지킴이의 낮은 정착률이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
“고령화와 공동화에 따른 일손 부족으로 노동력 위주의 전통 농법은 한계에 달해 있습니다. 노동력 절감과 부가 가치 창출이 가능한 스마트팜의 도입만이 현재 농어촌의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대안입니다.”
이현국에 맞서 주장을 굽히지 않는 진혁의 모습에 그가 단단히 준비해 왔다는 것을 느끼고 권성일이 입을 열었다.
“지난 정부 때 그 사업을 추진했다가 농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사실은 알고 계시지요?”
“압니다. 당시는 대기업의 말만 듣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겁니다. 그간 이룬 성과로 농민들의 동행에 대한 인식은 매우 호의적입니다.”
“스마트팜 사업은 단순히 농민만 관여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기업, 설비업체, 유통업자 등등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압니다. 그래서 사업 진행 과정 전반이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되어야 합니다.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면 뒷말이 나오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최소화할 수는 있지만 아예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이현국이 답답한 마음에 다시 끼어들었다.
지금 여당과 대통령의 지지율은 진혁의 연이은 활약 덕분에 역대 어느 정권보다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특별한 이슈만 없다면 내년에 있을 대선에서 여당이 배출한 후보가 압승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굳이 위험 부담이 큰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기에 진혁이 권성일 대통령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대통령께서 동행 사업을 정부 사업으로 하자고 하시면서 했던 말씀이 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
“한중 FTA가 곧 발효된다고 하시며, 빈사 상태인 농어촌에 더 이상 시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농어촌은 그때보다 더 절박합니다. 정치 논리로 인해 그들을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말씀이 지나칩니다!”
이현국이 참지 못하고 큰소리를 냈다.
하지만 진혁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권성일의 눈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권성일이 손을 내밀었다.
“가져온 계획서를 봅시다.”
“대통령님!”
“서 회장의 말이 맞네. 날 무능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게 하지 말게.”
이현국의 반발을 막은 권성일이 진혁이 건넨 사업 계획서를 읽어 봤다.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동행이 중심이 되어 민간 참여 위주의 사업으로 진행되게 계획되어 있었다.
각자 역할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고 단계별 사업 진행으로 난립과 혼란이 최소화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익은 농어촌으로 환원되고 청년 농부에 대한 지원으로 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외에 지난번에 발생했던 문제에 대한 해결책들이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진혁이 고집을 부리면서까지 강하게 추진을 주장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만큼 잘 세워진 계획이었다.
마지막 장을 닫고 권성일이 말했다.
“좋습니다. 진행하세요.”
“감사합니다.”
진혁이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역사를 비틀어 그를 선택한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이 느껴졌다.
* * *
“와아!”
동행 사무실에서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소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진혁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께서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고도 어렵게 허락해 주신 사업입니다. 절대 실패하면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이 시간부로 스마트팜 사업 본부를 신설합니다. 동행은 물론 알라딘의 모든 가용 자원을 사용할 권한을 갖게 될 겁니다. 사업 본부장은 고 부대표님이 맞습니다.”
“회장님.”
“잘 부탁드립니다. 우 대표님과 나머지 분들도 적극 지원해 주십시오.”
감격에 눈물을 글썽이는 고진무를 우상우가 웃는 얼굴로 안아 줬다. 그 모습에 나머지 직원들이 일제히 박수로 응원했다.
과거의 앙금이 남아 어색하게 지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깔끔히 해소됐다.
동행 사무실에서 앞으로 일에 대해 논의하던 진혁은 시계를 보고 서둘러 나왔다.
강남역 인근의 바로 들어가자 정호영과 구필준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막 도착했습니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정호영이 아쉬움을 토로했다.
“도이에 중공업의 인수 소식은 방글라데시에서 들었습니다. 저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하는데 어찌나 아쉽던지…….”
“정 사장님도 보셨어야 합니다. 깔끔한 설비며 앞선 기술력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한국의 기업들도 빨리 준비하지 않으면 큰일 나겠다는 것을 느끼셨을 겁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나중에 그런 기회가 있으시면 꼭 좀 불러 주십시오.”
“앞으로도 기회는 많을 거니 걱정 마십시오.”
적당히 대답한 진혁이 구필준 소장을 보고 물었다.
“뭐가 제일 부러우셨습니까?”
“로봇이 제일 탐이 났습니다. 스마트 기술을 구현해도 실현시킬 로봇이 없으면 무용지물이거든요. 꿈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럼 이번 기회에 그 꿈을 실현해보시지요.”
“……?”
“오늘 청와대에 들어갔다 나오는 길입니다. 스마트팜 사업의 추진을 허락받았습니다.”
“정말 큰일 하셨습니다.”
구필준이 바로 크게 반겼다.
스마트팜의 자동화 설비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게 산업용 로봇이었다.
자신을 갑자기 불러 도이에 중공업 시찰에 참여시킨 게 단순히 견학을 위해 그런 것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진혁은 이미 스마트팜을 계획하고 있었다.
구필준이 말했다.
“솔직히 회장님을 만나고도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도이에 중공업의 인수로 로봇 기술을 확보한 데다가 스마트팜으로 시험할 현장마저 준비해 주시니 이제 마음을 굳혔습니다. 회장님을 믿고 응용 기술 개발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파트팜은 시작입니다. 방글라데시의 알라딘 공장은 스마트 팩토리로 꾸며 볼까 합니다. 준비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신도시 중 한 곳은 스마트 시티로 갈 수도 있습니다. 어디까지 실현될지는 소장님이 하시기 나릅입니다.”
구필준이 진혁의 커다란 계획에 이제는 입을 딱 벌린 채 답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정호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진혁을 보고 저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정호영에게 진혁이 말했다.
“한국을 4차 산업 선진국으로 만드는 것은 알라딘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무슨 말씀인 줄 알겠습니다. 태후가 앞장서서 4차 산업에 매진할 수 있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응용 기술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초 기술 분야도 적극 지원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말씀도 함께 드리겠습니다.”
이후 세 사람은 술잔을 나누면서 앞으로 일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 * *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늦어 몰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진혁이 놀라 동작을 멈췄다.
어두운 거실 소파에 희준이 팔짱을 끼고 앉아 있었다.
“너 거기서 뭐 해?”
“치사한 놈.”
“……?”
“좋은 데 갔다 왔지?”
“좋은 데는. 정 사장하고 구 소장님이랑 바에서 가볍게 한잔하고 들어오는 길이야.”
“이 시간까지 바에서만 마셨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진짜라니까. 나 먼저 들어간다.”
자리를 피하려는 진혁을 희준이 얼른 일어나 몸으로 막았다.
“그러지 말고 다음에는 나도 좀 데려가 주라.”
“……?”
“태아에 안 좋다고 옆에도 오지 못하게 한단 말이야. 그러니까, 응?”
“미친놈. 발 닦고 잠이나 자, 인마.”
“진혁아. 형님.”
매달려 사정하는 희준의 뒤로 문이 열렸다.
“두 분이서 뭐 하세요?”
“어. 진혁이가 잠이 안 온다고 한잔 더 하자고 해서 안 된다고 하는 중이야.”
“다 늦은 저녁에 술은 무슨 술이에요. 어여 들어와서 자요.”
“어.”
재빨리 지현을 따라 방으로 들어가는 희준의 행동에 진혁이 어이없어했다.
“불쌍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