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우군 규합
“회장님도 아시는 분입니다. 일한 칼리파 씨를 기억하십니까?”
“일한 칼리파. 아, 소말리아 난민 문제로 찾아오신 분!”
“맞습니다. 지난 선거에서 뉴욕주 하원의원에 당선되셨습니다. 그분이라면 적극 도와주실 겁니다.”
“잘됐군요. 미국이 움직여야 국제 사회가 움직입니다. 그만큼 기자님의 역할이 큽니다.”
“걱정 마십시오. 여론을 만드는 것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진혁이 넘겨준 자료를 챙겨서 서둘러 떠나는 조나단의 행동에 진혁이 만족한 표정을 짓다가 서둘러 일어났다.
처리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 * *
진혁이 간 곳은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였다. 국방부 청사로 가서 알자위를 만났다.
그는 진급하여 대장으로 국방장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들어서는 진혁을 바라보는 알자위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펴 있었다.
두 사람은 뜨겁게 껴안고 뺨을 맞대는 아랍식 인사를 나눴다.
전선을 넘나들며 정권을 바꾼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무하마디 총사령관님은 어떻게 지내신 답니까?”
“정식 정부가 들어서자 모든 직을 사임하시고 시골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분다운 결정이시네요.”
“맞습니다. 제가 본 중 최고로 청렴하신 분이십니다. 가끔 찾아뵙는데 그때마다 서 회장님 말씀을 하십니다. 그때 서 회장님이 아이디어를 내서 ‘인어의 새벽’ 작전이 성공한 거라고 하시면서요.”
“한번 찾아뵈어야 하는데…….”
“서 회장님 바쁜 것은 그분도 아십니다.”
“……?”
“인터넷이 있지 않습니까. 서 회장님 관련 기사는 빠짐없이 보신다고 하시더라고요.”
돈 되는 것이라면 목숨까지 내걸 정도로 정신없이 살았던 시절 도움을 주고받았던 추억 속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과거의 이야기를 하며 이 자리에 없는 무하마디 총사령관을 떠올렸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알자위가 물었다.
“바쁘신 분이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중국의 동서경제벨트 때문에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진혁은 동서경제벨트가 무엇이 문제이고 왜 막아야 하는지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다 듣고 난 알자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서 회장님의 말씀은 알겠지만 리비아는 지중해에 접해 있어 그쪽 해상과는 무관합니다. 그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위에 말씀드려 OPEC 회원국의 의견을 모아 주십시오.”
“OPEC요?”
알자위가 이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석유 수출국 기구인 OPEC는 12개국의 석유 수출국 연합 조직이었다. 리비아도 회원국 중 하나였다.
알자위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국방장관인 제가 OPEC을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국방장관이기에 더 하셔야 합니다.”
“……?”
“리비아는 아직 내전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유일한 수입원이 석유 수출밖에 없습니다. 인접국인 이집트 수에즈 운하가 막힐 때마다 리비아 경제는 크게 휘청거렸습니다.”
알자위가 그제야 눈이 커졌다.
리비아에서 아시아로의 원유 수출은 수에즈 운하를 통해 아라비아 해를 거쳐 인도양으로 했다.
이집트는 통행세 인상을 요구하며 수에즈 운하를 여러 번 차단했었다. 그때마다 리비아는 수출길이 막혀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려야만 했다.
“수에즈 운하가 아니라 인도양의 길목에 중국 군함이 배치되는 일입니다. 군사적 위협이 경제 안보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위에 보고해 주십시오. 이는 비단 리비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석유 수출국 모두의 큰 위협이 되는 일이라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대통령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알자위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채고 굳은 얼굴로 답했다.
* * *
트리폴리에서 하룻밤을 보낸 진혁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새롭게 단장된 알라딘 빌딩에서 한상국과 인도에서 보내온 스타트업 투자 대상 업체에 대한 검토를 했다.
동행 사무실에 들려 스마트팜 사업 진향 상황을 체크하기도 했다.
저녁은 무조건 집에 들어가서 가족과 함께 먹었다. 배가 많이 불러온 지현이 혼자만 온 것에 사정없이 눈치를 줬지만 진혁은 모른 척 꿋꿋하게 버텼다.
그렇게 진혁이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사이 세상은 중국의 동서경제벨트 사업으로 시끄러웠다.
첫 포문은 인도의 만길라 총리가 열었다.
인도 정부는 러시아군과 함께 인도양에서 해상 합동 훈련을 실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어 미국 의회에서는 일한 카리파 의원이 인-러 군사 훈련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며, 중국 동서경제벨트 사업은 아시아 국가들에 중국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전략이니 미국이 선제적으로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NS통신은 한 술 더 떠서, 중국이 동서경제벨트 사업의 이면에는 빚을 지워 항만을 인수해 인도양을 군사 기지화하려는 전략이 있다며 맹비난했다.
OPEC마저 대변인 성명을 통해 중국 정부의 인도양 항만 군사 기지화를 우려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 * *
아침을 먹고 출근 준비를 했다.
혜주의 손을 잡고 나와 어린이집 차에 태워 보낸 진혁이 돌아서 자신의 차로 가는데, 주차되어 있던 검은 색 차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
놀란 진혁이 안을 들여다보자 아는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일찍 좀 다녀. 오래 기다렸잖아.”
CIA의 잭슨이었다.
옆에 타며 진혁이 투덜거렸다.
“놀랐잖습니까. 한국으로 발령받아 오셨습니까?”
“웃기고 있네. 우리가 알고 지낸 사이가 얼마인데. 너 때문에 급히 호출되어 왔단 말이야.”
“……!”
“이번 일도 네가 꾸몄다는 것 알아.”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오래 안다는 것은 좋은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어렵다는 단점도 있었다.
표정을 바꾼 진혁이 물었다.
“반응이 어떻습니까?”
“신밧드가 벌인 일이니 예상대로지. 중국군이건 러시아군이건 무조건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더군.”
“고맙습니다. 나중에 거하게 한잔 사겠습니다.”
“이건 한 잔 정도로 안 돼.”
“알겠습니다. 한 병으로 하지요. 아주 좋은 것으로.”
한 병이 아니라 천 병, 만 병이라도 상관없었다.
미 대사관으로 가자 두 명의 미국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무부 차관 윌슨입니다.”
“국방부의 베이커 대장이오.”
“서진혁입니다.”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진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먼저 두 분이 아셔야 할 게 있습니다. 인도 정부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의 나즈마 총리께서도 이번 일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으면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헉.”
두 사람의 얼굴이 당장 흙빛으로 변했다. 인도 하나만도 골치 아픈데 방글라데시까지 속을 썩이고 있었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계획서에 나와 있습니다.”
진혁은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만길라 총리에게 보여 줬던 것과 같은 계획서를 내밀었다.
머리를 맞대고 계획서를 읽은 윌슨과 베이커는 놀란 얼굴을 했다. 자신들의 예상과 달랐지만 오히려 이게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이커는 오기 전에 읽었던 CIA의 보고서를 떠올렸다.
보고서에 따르면 진혁은 뛰어난 해결사였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도 그가 나서자 해결됐다.
말미에는 무조건 진혁과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제임스 지부장의 말까지 남겨 있었다.
그가 왜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 이번 계획서로 충분히 느껴졌다.
윌슨 차관이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머니 머니 해도 머니가 문제지 않겠습니까.”
“……?”
“아, 죄송합니다. 한국식 농담이었습니다. 중국의 부채를 갚으면 끝나는 일입니다. 총 12억 달러입니다.”
“그건 무리입니다.”
당장 윌슨 차관이 고개를 저었다.
진혁이 차갑게 말했다.
“중국이 동서경제벨트 사업에 투자한 금액만도 1조 4천억 달러입니다. 겨우 그 정도도 감당하지 않고 중국 군함의 인도양 진출을 막겠다는 겁니까?”
“엄밀히 따지면 타국에서 갚아야 할 빚입니다. 이게 선례가 되어 다른 국가들까지 우리에게 손을 벌릴 수 있습니다.”
의외로 윌슨이 강하게 나오자 진혁이 유화책을 썼다.
“미국이 전부 책임지라는 게 아닙니다. 일본 정부도 내놓을 겁니다.”
“일본도요?”
“그렇습니다. 인도가 무너지면 제일 속이 타는 게 그쪽입니다. 일본이 2000년대 들어서 인도에 투자한 돈이 수백억 달러나 됩니다. 기업 인수 차 일본에 갔을 때 쇼다 경제 산업 대신에게 의중을 물었다가, 무조건 자신들도 참여시켜 달라는 부탁을 들었습니다.”
“……!”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인도와 방글라데시, 한국 정부도 참여할 테니 그리 부담스러운 금액은 아닐 겁니다. 거기에 여러 나라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사업이니 만큼 미국한테만 떼를 쓰는 일도 없을 겁니다.”
확신에 찬 진혁의 말에 윌슨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윌슨이 베이커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본국에 보고를 하고 허락을 받으려는 것이다.
쇼다 대신을 놓고 거짓말을 한 게 마음이 걸렸지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단단히 약점이 잡혀 있으니 무조건 거부만은 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이 그만큼 자금을 내놓으면 된다.
한참 만에 들어온 윌슨이 앞에 앉으며 말했다.
“위에서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다만, 자금 문제는 일이 끝난 이후에나 집행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일이 틀어졌는데 돈만 챙길 정도로 나쁜 놈은 아닙니다.”
진혁이 악수를 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밖으로 나오자 잭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타고도 잭슨이 물어오지 않자 진혁이 어쩔 수 없이 먼저 입을 뗐다.
“결과는 안 묻습니까?”
“물어 뭐해. 네 꼬임에 빠져 돈을 엄청 뜯겼겠지, 우리처럼.”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사기꾼 같잖습니까. 이득은 오히려 CIA가 더 본 것으로 아는데요.”
“알아. 하지만 돈을 뜯긴 것도 사실이잖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을 보니 엄청 뜯어낸 것 같단 말이야. 이건 단순히 술 몇 병으로 끝날 일이 아닌 것 같아.”
“헐.”
진혁은 다시 한번 잭슨과 너무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는 것을 느꼈다. 너무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 * *
진혁은 즉시 박이동을 불러 함께 인도로 넘어갔다.
구필준에게 서울에서 한상국과 검토한 내용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희준은 따로 불렀다.
“드디어 심해항을 마련할 방법을 찾았다.”
“그래?”
“문제는 나 혼자서는 안 된다는 거야. 네 도움이 필요해.”
진혁이 자신의 계획을 들려줬다.
이야기를 들은 희준이 눈이 커졌다. 너무 큰 계획이었다.
한참 만에 정신을 차린 희준이 물었다.
“그게 가능하겠어?”
“가능하게 해야지. 내가 미얀마를 맡을 테니 넌 스리랑카를 맡아 줘.”
“내가?”
“그래. 난 너무 알려져서 안 돼. AS의 이영석 부장을 불러 같이 가. 이쪽 정세에 밝으니 도움이 될 거야.”
“좋아. 까짓것, 해 보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언제 놀랐냐는 듯이 큰소리치는 희준의 모습에 진혁이 미소를 지었다.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희준이 스스로 의지를 다지기 위해 일부러 하는 행동임을 잘 알고 있었다.
* * *
다음 날, 진혁은 만길라 총리와 면담을 하고 박이동과 함께 미얀마로 넘어갔다.
한때 버마로 불렸던 미얀마는 사회주의 국가였다. 의회는 군부가 장악하고 있었다.
마웅 총리는 군인 출신답게 작지만 단단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알라딘 그룹의 서진혁입니다.”
“앉읍시다.”
진혁을 바라보는 마웅 총리의 시선은 날카로움 속에서도 곤혹스러움이 묻어났다.
함께 배석한 탄민 비서실장이 서진혁이 면담을 요청해 왔다는 말에 사실인지 다시 물을 정도로 놀라운 행보였다.
서진혁은 자신들이 내쫓은 로힝야 난민을 돕는 자로, 결코 반가운 인물이 아니었다.
당연히 첫 질문이 호의적이지 않았다. 호의적이기는커녕 당장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