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미얀마, 군불 떼기
“사업가가 사업 때문에 찾아뵌 것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사업 때문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알라딘 그룹은 동남아시아에 이미 진출해 있습니다. 거기에 사업 확장을 위해 이번에 알라딘 서남아시아도 발족했습니다. 이미 많은 나라들이 미얀마의 발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는데, 알라딘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음…….”
“미얀마와 한국의 인연은 깊습니다. 과거 대통령 순방 시 일어난 불행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양국 간 경제 협력은 매년 큰 폭으로 증가해 왔습니다. 수많은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 있고, 최근에는 해상 가스전의 본격적인 판매도 시작되었고요.”
다른 이가 이런 말을 했다면 당연히 크게 반기며 화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이라 여전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마웅 총리의 시선을 받은 탄민 비서실장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물었다.
“어떤 사업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온라인 유통 시장은 당연히 진출할 겁니다. 더불어 포화 상태인 다카공의 화장품 공장을 대체할 공장을 이곳에 세울 계획입니다만, 제일 먼저 차우크퓨 항 확장 공사 사업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차우크퓨 항 확장 공사 사업에요?”
“그렇습니다. 나즈마 총리께서는 방글라데시에 심해항을 건설했으면 하지만, 항로에서 떨어져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환적항으로는 적합하지 않거든요. 인근에 차우크퓨 항이라는 좋은 입지를 가진 심해항이 있는데 경쟁이 되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래서 이번에 경제특구 건설 자재도 차우크퓨 항을 주 거점지로 삼아서 계약까지 한 것입니다. 건설이 끝나면 물동량이 엄청나게 늘 것에 대비해서 미리 항만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이유였다.
의심을 반쯤 푼 마웅 총리가 물었다.
“차우크퓨 항 사업은 이미 중국 정부와 계약이 되어 추진 중이라는 것을 모르시오?”
“압니다만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구 문제로 재검토에 들어갔다고 들었습니다.”
태연한 진혁의 답변에 마웅 총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스리랑카도 미얀마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동서경제벨트 사업의 일환으로 차관을 도입해 함반토타 항구를 지었다. 그러나 이용 선박이 적어 생긴 적자 때문에 결국 운영권을 중국에 넘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국민들이 당장 들고 일어났다.
대통령이 탄핵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고, 지금도 국토를 외국에 넘겨서는 안 된다며 시위를 하고 있었다.
놀란 마웅 총리는 사업성 재검토를 이유로 공사를 전면 중단하고 중국과 재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이번에는 탄민 실장이 물었다.
“어떻게 참여하시겠다는 계획이십니까?”
“우리 그룹에서 파악해 보니 총 사업 규모는 73억 달러로, 12억 달러가 들어가는 1단계 사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것으로 압니다.”
“맞습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전체 사업을 알라딘에서 맡을 수도 있습니다.”
“전체를 말입니까?”
“솔직히 73억 달러는 과하게 책정된 겁니다. 저희 예상으로는 60억 달러면 충분합니다. 원하시면 저희가 그 돈으로 직접 지어 보이겠습니다.”
진혁의 거침없는 답변에 마웅 총리가 침을 삼키고 물었다.
“조건은 뭡니까?”
“공사비는 2% 저리로 빌려드리겠습니다. 항만 이용료의 할인과 부채 탕감 시까지 항구 운영권의 49%를 주십시오. 신설된 경제 특구(SEZ)에 대한 입주 우선권도 주셨으면 합니다.”
“그게 전부입니까?”
“그렇습니다. 미얀마는 운영권을 가져가야 하고, 저희는 자금을 빨리 회수해야 하니 환적 화물의 유치와 경제특구 분양에 협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총리님께서 결정만 하시면 공사 대금 60억 달러는 바로 예치하겠습니다. 서로 믿고 윈윈 하는 가장 합리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합리적이다 못해 미얀마 정부에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중국 정부는 5% 대 고리에 항만 운영권도 70%를 요구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공사비가 13억 달러나 절감된다니,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이득이었다. 공사 대금도 미리 입금한다니 믿을 수 있었다.
마웅 총리가 마침내 의심을 거두고 활짝 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서 회장님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너무 큰 계약이다 보니 검토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동안 우리나라 구경도 하시면서 기다려 주십시오. 실장은 최상의 예우로 모시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일어나는 진혁을 탄민 실장이 따라 나와 비서실 직원에게 무언가 지시하고 밖까지 배웅했다.
입구에는 의전 차량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타민 실장이 직접 뒷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타십시오.”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되는데…….”
“아닙니다. 총리님께서 서 회장님을 국빈으로 생각하고 계십니다. 호텔에 쉬고 계시면 제가 직접 찾아뵙고 향후 시찰 일정을 논의하러 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결과가 있게 도와주십시오.”
진혁도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박이동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의전 차량이 떠나자마자 탄민 실장이 부리나케 다시 마웅 총리를 찾아가 당장 물었다.
“어떻게 하려고 이러십니까?”
“중국 정부안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잖나?”
“그렇긴 합니다만 단순히 차우크퓨 항 사업만 보시면 안 됩니다. 중국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큰일 납니다.”
탄민이 바로 우려를 나타냈다.
미얀마의 중국 의존도는 심각한 수준이었다.
전체 수출 중에 중국으로의 수출액이 차지하는 비중이 65%에 이르고 있었다.
거기에 이번 사업 말고도 중국의 도움으로 벌이거나 계획된 사업의 규모가 수백억 달러에 이르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중국계 소수 민족의 반란, 그중에서도 로힝야 탄압에 대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얀마 편을 들어 주는 게 중국이었다.
경제는 물론 정치적으로 철저히 예속된 상태였다.
마웅 총리가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장의 우려는 잘 알아. 문제는 중국 놈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우리를 식민지 취급하려고 한다는 거지. 이번 기회에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깨닫게 해 줄 필요가 있어.”
“하지만…….”
“깨닫게 하겠다는 거지, 판을 엎겠다는 게 아니야. 서 회장을 내세워 재협상을 우리의 의도대로 이끌어내야 해. 그러니 최상으로 대접해 줘. 지금은 그깟 사업가 놈에게 머리 숙이는 게 아니꼽지만, 나중에 빈손으로 쫓기듯 떠날 모습을 떠올리며 참아.”
탄민의 얼굴이 곧바로 밝아졌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전 총리님께 그런 깊은 뜻이 있는지도 모르고 놀랐습니다. 아무튼 그 높은 혜안은 항상 감탄스럽습니다. 말씀대로 꾹 참고 놈의 기분을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서 회장이 이곳에 머문다는 사실을 은근히 중국 정부에 흘려. 이번 기회에 중국 놈들의 높기만 했던 콧대를 확 꺾어 버리자고. 하하하하하.”
“화들짝 놀라 달려오는 꼴을 상상만 해도 즐겁습니다.”
그동안 중국 정부의 고압적인 태도에 쌓인 것이 많은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서진혁에 대한 생각은 없었다.
* * *
“휴우. 대단합니다.”
룸으로 들어선 박이동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양곤 시내의 가장 좋은 곳에 위치한 세노나 호텔의 스위트룸은 외국 정상들의 전용 숙소로 사용될 만큼 최고급으로 꾸며져 있었다.
방을 구경하러 다니며 호들갑을 떠는 박이동과 달리 진혁은 베란다로 나가 한눈에 다 보이는 양곤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들은 바람잡이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는 즐기며 기다리면 된다.
지금쯤 스리랑카에 가 있는 희준이 잘하고 있을 것이다.
* * *
다음 날 아침.
최고급 식사를 하고 내려가자 어제의 전용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산업부 장관입니다. 오늘 공단 시찰을 안내해 드리러 나왔습니다.”
“바쁘실 텐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총리께서 극진히 모시라는 당부가 있으셨습니다. 편히 모시겠습니다.”
군부가 장악한 국가라 그런지 상명하복이 확실했다. 덕분에 편했다.
하지만 인접국인 중국에서는 난리가 났다.
“큰일 났습니다.”
노크도 없이 문을 벌컥 밀고 들어와 소리는 무역부장 허융의 행동에 우핑 부총리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인가?”
“죄송합니다. 서진혁이 미얀마에 머물고 있답니다.”
“서진혁?”
“알라딘 그룹 회장입니다. 예전에 저우추취 전자 상거래 분야 공작의 일환으로 인수하려다가 실패한 알쇼핑을 이끌고 있는 자입니다.”
“재빨리 꼬리만 자르고 숨어 버린 놈?”
“맞습니다. 그자가 마웅 총리를 만나 차우크퓨 항 확장 공사 사업을 자신이 맡겠다고 했답니다. 아주 국빈 대접을 받고 있답니다.”
“뭣이!”
얼마나 놀랐는지 우핑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쳤다.
차우크퓨 항은 왕칭린이 가장 역점을 두고 펼치는 동서경제벨트 사업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곳이었다.
이건 절대 실패하면 안 되는 사업이었다.
“그놈이 미얀마에서 그 난리를 피우는 동안 대체 뭘 한 거야!”
“부총리님의 지시로 스리랑카 함반토타 항구 인수 작업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어서 놓쳤습니다.”
“국가안전부 놈들이라도 알려 왔어야 하잖아?”
“지난 과업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리정팅 부부장이 물러났을 때 우리가 도와주지 않은 것에 앙심을 품고 일부러 알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빌어먹을 놈들.”
모두가 자신이 직접 관여한 일 때문이니 허융만을 나무랄 수만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의 근원인 서진혁에 대한 분노가 밀려왔다.
하지만 지금은 한가하게 그걸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왕칭린 총리가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당장 미얀마로 간다.”
“알겠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답한 허융이 서둘러 나갔다.
아무리 비공식이라도 부총리급 인사가 외국을 방문하는 일이니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 * *
다음 날 진혁은 한통의 전화를 받고 마웅 총리를 찾아갔다.
총리는 급한 일로 부재중이라며 탄민 실장이 대신 맞아 인사를 했다.
“어떻게 편하게 둘러보셨습니까?”
“너무 큰 환대에 감사합니다.”
진혁은 그간 최고의 대접을 받으며 산업 단지는 물론 가스전 현장도 총리 전용 헬기를 타고 시찰을 했었다.
자리에 앉자 진혁이 용건을 꺼냈다.
“결정이 너무 늦어져서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찾아뵀습니다.”
“아시다시피 기존에 벌이고 있던 사업이라 검토할 게 좀 많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총리님의 부탁이 있었습니다.”
“이해합니다만 인도에 급한 일이 생겨서요. 그곳에 알쇼핑 인디아가 진출해 있거든요. 하루 이틀은 걸릴 것 같은데…….”
“걱정 말고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빨리 결론이 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실장님만 믿고 최대한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총리님께 인사 못 드리고 간다는 말씀 좀 대신 전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편히 다녀오십시오.”
깍듯한 인사로 진혁을 배웅한 탄민 실장은 급히 옆방으로 들어갔다.
부재중이라던 마웅 총리가 기다리고 있다가 급히 물었다.
“어떻게 됐나?”
“마침 일이 있어 인도에 다녀와야 한다고 해서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습니다.”
마웅 총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했어. 난 혹시라도 우핑 부총리의 방문 소식을 듣고 따지러 온 줄 알았는데 다행이군.”
“비공식 방문이라 철저히 비밀로 하고 있는데 제 놈이 알 리가 없지요. 아무튼 우리에게는 잘된 일입니다.”
“조짐이 좋아.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서둘러 나가는 탄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웅 총리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간 중국에 당한 화풀이는 물론 묵은 난제도 모두 털어 버릴 작정이었다.
* * *
인도 뉴델리 공항에 도착해 호텔로 가자 희준이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각자 자신을 소개했다.
“스리랑카 대통령실의 사례쓰 보조관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미국 대사 앨런이오”
“일본 대사 야마모토입니다. 쇼다 대신께서 안부 전하라 하셨습니다.”
“리암 인도 총리 비서실장입니다. 다시 뵙습니다.”
“서진혁입니다.”
현지인인 리암을 제외하고는 중국의 정보망을 피해야 해서 실무자들이 온 터라 중량감이 떨어졌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들은 각국 정상에게 말을 전할 전달자일 뿐이었다.
진혁이 사례쓰를 보고 말했다.
“먼저 함반토타 항구의 현재 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