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중국 공략
“여자의 직감을 무시하면 안 돼요. 난 하마드 사장님처럼 첨단 기술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번 중국 투자 결정은 무언가 이전과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어떤 점에서요?”
“회장님은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스타일이세요. 그래서 사업을 일으키고 키워서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기시죠. 그런 다음 또 다른 사업에 뛰어드셨어요. 이런 식으로 멀리서 투자하는 게 왠지 어색하게 보였어요.”
“부군께서는 바람도 못 피우시겠습니다.”
“그랬다가는 그날이 그 인간이 이승을 하직하는 날이 될 거예요.”
쓸데없는 농담이 끝나자, 진혁이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갈리와 하마드를 보고 말했다.
“내가 두 분을 만나 알쇼핑을 설립했을 때부터 목표는 아마존과 알리바마였습니다. 그런데 알라딘 그룹이 크면 클수록 그들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습니다. 외부의 도움 없이 빈손으로 출발한 내가 이미 공룡으로 커져 있는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있을까 회의가 든 적도 많았습니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거의 포기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놈들이 공격해 왔습니다. 어렵게 우군으로 만든 수피넷과 자포라를 잃었습니다. 여러분과도 떨어져 지낼 수밖에 없었고요.”
모두가 뼈저리게 겪은 사실이어서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숨어 지내면서 저의 나약함을 자책했습니다. 포기하는 순간 죽음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살려면 싸우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방법을 찾았습니다. 거대 공룡인 저들을 무너트릴 방법.”
진혁이 처음으로 밝힌 마음속의 고뇌에 다들 얼굴이 굳어졌다.
힘들었겠지만 잘 이겨내고 다시 섰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마음속에 패배감을 안고 살아가고 있었다.
미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진혁이 찾아냈을 방법에 대해 궁금증이 밀려왔다.
진혁이 모두를 둘러보고 말했다.
“공룡의 멸종 이유에는 수많은 가설들이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기생충 때문이라는 이론도 있습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빌딩보다 더 큰 공룡이 겨우 머리카락만 한 기생충에 양분을 다 빼앗겨서 결국 멸종됐다는 게.”
“…….”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 보죠. 산업화가 시작된 곳은 유럽이었습니다. 일본이 그곳에서 기술을 배워 와 기술 강국이 됐습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해 ‘한강의 기적’을 이뤘습니다. 지금 중국은 기술 복제를 넘어 신기술 개발로 G2에 올라 미국마저 위협하게 성장했습니다.”
“설마?”
“맞습니다. 알리바마에 앞서 중국의 IT 생태계에 기생충을 심을 생각입니다. 그들이 그랬듯이 중국의 신기술을 우리가 먼저 취할 겁니다. 그게 제가 중국에 투자를 결정한 이유입니다.”
섬뜩하게 들릴 만큼 치밀한 계획이라 다들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못했다.
진혁이 하마드 사장을 보고 말했다.
“앞으로 유통은 이커머스의 비중이 크게 확대될 겁니다. 따라서 각 그룹의 중심은 알쇼핑이 됩니다. 한상국 사장이 이미 알리바마를 맡아 관련 작업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하마드 사장님은 아마존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대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소비 친화적인 플랫폼을 개발해도 결국 양질의 제품이 있어야 소비자에게 선택됩니다. 그때를 대비해서 두 분도 제품 확보에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갈리와 아자데도 느슨해졌던 마음을 다잡고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다음 날, 진혁은 알라딘 홀딩스 사무실에서 회사를 넘기고 부사장으로 합류한 마이클 창과 마주 앉았다.
“현재 투자된 자금은 최대한 회수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스마트 기술 개발업체의 투자는 인공 지능, 그것도 안면인식 기술에 집중 투자합니다.”
“안면인식 기술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으시는 겁니까?”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유럽, 일본, 한국 모두 민주주의 국가다 보니 사생활 보호법 때문에 영상 데이터의 저장 및 사용에 제약이 많습니다.”
“……!”
창의 눈이 커졌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간과했었다.
중국은 공산당의 결정이라면 인권이나 환경 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철저하게 통제된 사회였다.
왕칭린이 직접 발표한 ‘인터넷 레벨업’ 계획이 모든 것에 우선이었다.
엄청나게 쌓이는 데이터로 아무런 제약이 없이 실험이 가능하니 기술 발전이 빠를 수밖에 없었다.
진혁의 말을 이었다.
“나머지는 스마트 기술을 도입해 상용화한 업체에 투자해 주십시오.”
“그런 업체는 이미 시장에 알려져서 가격이 높을 겁니다.”
“비싸더라도 그렇게 하십시오. 전 중국의 기술 발전에 기여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과실만 취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인터넷 쇼핑몰 관련해서는 하마드 사장님께 수시로 조언을 구하십시오.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몇 가지 더 당부를 하고 진혁은 AM 사무실을 나와 싱가포르로 향했다.
파노나 본사로 가자 선병식과 티엔이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공항으로 차를 보냈을 텐데.”
“서로 바쁜데 번거롭게 뭐 하러 그럽니까. 택시가 편합니다.”
소탈하게 말한 진혁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사이트 통합 작업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습니까?”
“시험 테스트까지 마쳐서, 회장님이 지시만 내리시면 내일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자포라와 분리 작업은요?”
“그것 역시 문제없이 준비됐습니다. 메이왕 그룹의 도움을 받아 오픈한 홍콩과 대만에서 테스트한 결과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럼 모든 준비가 끝난 건가요?”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티엔 사장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리사 아마니의 영입을 확정 짓지 못했습니다.”
“리사, 누구요?”
“말레이시아의 배우인 리사 아마니입니다.”
“아, 마리아 씨가 말한 동남아시아의 최고의 히자비 스타.”
“맞습니다. 설득 중인데 쉽지 않습니다.”
진혁이 선병식에게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그게 참…….”
“과도한 요구를 합니까?”
“차라리 그랬으면 협상해서 맞추기라도 할 텐데, 도저히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아이요?”
“이제 갓 스무 살을 넘겼는데 얼마나 영악한지 만날 때마다 조건이 올라갑니다. 거기에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선병식은 학을 뗐는지 고개까지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혁이 혀를 차며 말했다.
“양아치네요.”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업에 꼭 필요하다고 해서 어떻게든 설득해 보려 했는데, 이제는 자신 이름의 쇼핑몰을 차리겠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소문이 좋지 않았습니다. 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광고 모델로 쓴 이들도 혀를 내둘렀습니다. 스태프들이 고생하는 것은 말도 못 하고요.”
이어진 티엔의 말에 진혁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아가 무조건 잡아야 한다고 했는데 양아치에 성격까지 개차반이라니.
그때 진혁의 머리에 번쩍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가만. 우리가 지금 정확히 찾는 인물이 뭔가요?”
“……?”
“같은 히자비 스타지만 마리아 씨와는 완전히 경우가 다르네요. 디자이너와 배우.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의류 제작에 필요한 디자이너 아닌가요?”
“맞습니다.”
“아까 스태프들이 고생이 많다고 했죠?”
“그렇습니다만…….”
“전략을 수정합니다. 리사라는 버릇없는 애의 스태프들을 빼내세요.”
티엔이 답을 하기도 전에 진혁이 선병식에게 다른 지시를 했다.
“마야에게 이야기해서 인도네시아에 리사를 대신할 배우를 물색하라고 하세요.”
“인도네시아에서 찾으시게요?”
“그쪽의 무슬림이 더 많습니다. 이왕이면 좀 덜 유명한 애로 찾으라고 하세요. 우리가 운영하는 슈퍼 블로거들이 움직이면 스타가 되는 것은 순간일 겁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당장 알아보라고 하겠습니다.”
갑자기 사무실에 활기가 돌았다.
* * *
새롭게 바뀐 전략에 따라 계획을 세우고 같이 저녁을 먹으며 AA의 사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하루 묵어야 했다.
그래서 푹신한 호텔 침대에서 단잠을 자던 진혁은 울리는 핸드폰을 받고는 급히 방글라데시로 오게 됐다.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맞는 나즈마 총리의 모습에 진혁이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스리랑카 국민들의 반중 시위가 격해져 카순 대통령이 예상보다 일찍 함반토타 항만운영주식회사를 발표하는 바람에 진혁이 보고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전권을 위임하기는 했지만 통치자로서 기분이 상한 것이다.
‘좁쌀.’
진혁이 모른 척 인사를 했다.
“잘 다녀왔습니다.”
“심해항을 마련해 주겠다는 약속이 결국 타국의 항구를 이용하겠다는 건가요?”
“경제 논리를 무시하고 무리하게 추진된 스리랑카의 함반토타 항이 어떤 결말로 이어졌는지 지켜봐 놓고도 계속 욕심을 부리시는 것은 총리님답지 않습니다.”
“욕심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심해항을 갖추지 못해 입는 직간접인 피해가 적지 않아요.”
“압니다. 그건 직접 사업하는 제가 더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세계가 하나의 경제 공동체로 묶인 지가 한참이나 지났습니다. 모든 화의 근원은 욕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미얀마의 차우크퓨 항이 어떻게 중국에 넘어가는지 조만간 보시게 될 겁니다.”
진혁은 이번 일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듣는 중에 나즈마 총리는 여러 번 놀라야 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크고 난해한 작업이었다.
그런 큰 스케일의 국제적인 공작을 계획하고 성공시킨 진혁의 능력에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드러낼 정도로 나즈마 총리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었다.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사업가인 서 회장이야 어느 나라 항구를 이용하든 들어가는 비용은 같으니 상관없겠지만, 우리나라는 수입은 줄고 경비만 늘어나니 같을 수가 없지요.”
“그래도 제가 명색이 총리 자문역인데 그런 일방적으로 손해나는 거래를 할 수는 없지요.”
“……?”
“조만간 항만운영주식회사 발족식이 열릴 겁니다. 직접 가셔서 방글라데시-스리랑카 간 FTA를 체결하시지요.”
“FTA를요?”
얼마나 놀랐는지 나즈마 총리는 평소의 포커페이스도 잊고 크게 소리쳤다.
요즘은 국가 간 FTA 체결이 하나의 큰 흐름이었다.
당연히 방글라데시도 인접국들에게 의사를 타진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반응들뿐이었다.
교역 및 투자 측면에서 최빈국인 방글라데시의 경제적 중요도를 높게 보지 않아서였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나즈마 총리는 지금은 포기한 상태였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현재 양국 간 교역량은 전체의 0.1%밖에 안 될 정도로 미미합니다. 특히 방글라데시는 원단, 원사 등 대부분의 의류 제조 관련 원부자재를 중국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스리랑카는 이러한 원자재의 주요 공급 국가 중 하나입니다.”
“……!”
“또한 스리랑카를 통한 플라스틱, 고무, 화학 제품 등의 산업 원자재류도 공급이 가능하니 대중국 수입 의존도를 완화할 수 있습니다. 이번 함반토타 항의 지분 확보로 그간 문제가 된 치타공 항의 적체를 해소할 수 있으니, 방글라데시의 교역 경쟁력은 한층 상승할 겁니다.”
“그런 깊은 뜻이 있는 줄 몰랐어요. 고생하셨어요.”
나즈마 총리가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진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진혁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며칠 후 쇼핑몰 업체 인수 문제로 인도를 방문할 예정인데 FTA에 대한 의사를 파진하겠습니다. 한국 정부에도 같은 제의를 해 보겠습니다.”
“서 회장님만 믿겠어요.”
“그 전에 우리끼리 마무리 지을 일이 있지 않습니까?”
“……!”
나즈마 총리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진혁이 함반토타 항만운영주식회사에 대납하기로 한 1억 달러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도 정부는 그 대가로 인도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던 굿딜의 지분을 넘겨주기로 했지만 방글라데시는 그마저도 마땅치 않았다.
나즈마 총리의 자존심을 위해 진혁이 먼저 안을 내놓았다.
“카나풀리 수출 가공 공단을 현 임차료 기준으로 임차해 주십시오.”
“카나풀리 EPZ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