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FTA
“그렇습니다. 총 209에이커에 254개 구획으로 조성됐는데, 치타공 항과의 유일한 연결 통로인 교량의 확장 공사가 미뤄지면서 입주율이 20%밖에 안 되는 것으로 압니다. 나머지 부지를 제가 모두 사용하겠습니다.”
어차피 비어 있는 골치 아픈 곳이라 임차에는 하등의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의문이 생겼다.
“굳이 그곳을 택한 이유가 있나요?”
“말씀드렸듯이 치타공 항을 이용하는 게 불편해서 입주율이 낮았던 겁니다. 함반토타 항을 확보해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됐으니 기업 유치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물론 그렇지만 서 회장님은 이미 남부에 더 넓은 공단을 건설하고 있잖아요?”
“이제 겨우 매립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된 공단이 조성되려면 아무리 빨라도 2년 후입니다. 돈 먹는 하마인데 그동안 손만 빨고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독한 사업가시네요.”
“사업가에게 2년은 억겁보다 긴 시간입니다. 그 시간 동안 수많은 기업이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알라딘 전체 사업을 위해서라도 방글라데시에서의 생산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는 이 나라의 경제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진혁의 확신에 찬 말에 나즈마 총리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게 끄덕여졌다.
진혁이 방글라데시를 택해 준 게 큰 행운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 * *
나즈마 총리가 논의된 사항에 대해 준비하는 동안 진혁은 소나르의 건설 현장을 방문했다.
먼저 AS 유통 사무실로 가서 아노아르로부터 그간의 업무 보고를 받았다.
희준은 이영석, 한상국과 함께 인도에서 굿딜 인수 작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어 아래층의 알라딘 건설 방글라데시 사무소로 가자 얼굴이 검게 탄 정호영이 반갑게 맞았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제일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진혁의 인사에 정호영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물론 세계적 건설 회사들이 자신의 지시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을 이끌고 있으니 몸은 피곤하지만 기분은 벅차 있었다.
진혁이 웃으며 물었다.
“작업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습니까?”
“철거가 끝난 발라캔 난민 캠프의 평탄화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그곳에서 나온 흙으로 소나르 항만 부지의 매립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항구만 조성되면 건설 자재 반입이 수월해져 작업에 속도가 붙을 것 같습니다.”
“인력 수급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오히려 넘쳐 납니다. 소문이 퍼졌는지 방글라데시 전역에서 실업자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로힝야와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우선 배정 하도록 하세요. 어떻든 이 땅의 주인은 방글라데시안입니다.”
“회장님의 뜻을 알기에 각 업체에 그렇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정호영은 완전히 진혁의 복심이 되어 있었다.
진혁은 현장의 안전사고에 유의해 달라는 말을 하고 걸음을 돌렸다. 신도시 건설은 정호영에게 맡겨 둬도 충분하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럼 고생하십시오.”
“잠시만요.”
정호영이 뭔가를 떠올리고 나가려는 진혁을 얼른 잡았다.
“바쁘시지 않으면 함께 공사 현장에 가 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무슨 일 있습니까?”
“마침 오늘 좋은 구경거리가 있습니다. 회장님도 보시면 놀라실 겁니다.”
“정 사장님이 그렇게 자신할 정도라니 기대가 됩니다. 갑시다.”
함께 밖으로 나와 소나르 항만 공사 현장으로 갔다.
차가 소나르 항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다위에 떠 있는 커다란 화물선이 눈에 들어왔다.
“저게 뭡니까?”
“케이슨이랍니다. 콘크리트 물막이 옹벽입니다.”
차가 현장에 도착하자 거대한 위용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작업모를 쓰고 직접 현장을 지휘하던 한인갑 사장이 달려와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저게 대체 크기가 얼마입니까?”
“높이 30미터에 두께는 18미터입니다. 중량은 1만 3천 톤으로 이번 공사에 총 92개의 케이슨이 들어갈 겁니다.”
“대단하군요.”
“원래는 벨기에 업체가 독점했던 건데, 이번에 저희가 독자 기술로 개발했습니다. 크기와 중량을 키우면서도 두께는 줄여서 정확히 설치하는 게 핵심입니다. 싱가포르 매립 공사를 수주한 것도 이놈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한인갑이 말하는 사이에도 무전기에서 끊임없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위치에 내려놓기 위해 관계자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화물선 위에 있던 케이슨이 바다에 투하됐다.
-정확히 위치를 잡았습니다.
“와아!”
무전기에서 들리는 소리에 주변의 인부들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그건 바다 위의 선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진혁과 정호영도 그 분위기에 고취되어 같이 손을 들고 있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진혁이 한인갑에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낸 겁니까?”
“회장님이 무조건 공기를 단축하라고 하셔서 대책 회의를 했는데, 직원 중 한 명이 아이디어를 내놨습니다. 덕분에 매립 공사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직원은 반드시 포상하십시오.”
“알겠습니다.”
대답을 듣던 진혁이 다시 한번 높이 설치된 케이슨에 시선을 돌렸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저 높이까지 매립하려면 흙이 엄청나게 들어가겠군요.”
“전부 다 매립하지는 않을 겁니다.”
“……?”
“컨테이너 야적은 6단이 아니라 9단을 쌓아야 가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적장은 일부를 지하에 배치하는 지중화 방식으로 설계했습니다. 도로와 터미널 등 사무용 부지만 매립하면 됩니다.”
아이디어가 무궁무진했다. 역시 실무는 전문가에 맡기는 게 낫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진혁은 한인갑에게 오늘은 고생한 직원들과 회식을 하라며 금일봉을 건네주고 그곳을 떠났다.
사무실로 돌아와 알라딘 해운의 사장이 된 바라캇을 불러 함반토타 항 확보 소식을 알리고 관련 준비를 하게 했다.
그곳에서 하루 더 머물면서 건설 현장을 둘러보고 시에라와 김연희를 만나고 다시 다카로 돌아왔다.
나즈마 총리가 마련한 계획을 보며 의견을 조율한 후 총리실을 나온 진혁이 한 카페로 들어갔다.
빙글라데시 환경 연합 스잘 대표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리님과의 대화가 길어져 좀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서 회장님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비르 지부장으로부터 버려졌던 난민 캠프가 속속 정리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약속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혁은 방글라데시 민간 경제 특구 관리청 내에 환경 감시단을 두어 건설에 따른 환경 파괴를 철저히 관리하게 했다. 그 책임을 지브르가 맡고 있었다.
진혁이 말했다.
“산림 훼손을 막고 조림 사업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합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간 끊임없이 화석 연료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운동을 펼쳐 왔던 겁니다. 하지만 경제 개발 논리에 밀려 성과는 지지부진합니다.”
“이번 기회에 방글라데시 환경 연합의 이름을 세계에 한번 알려 보시지요? 제가 이산화탄소 배출을 줄이는 방법 한 가지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말이 이어질수록 스잘의 입이 벌어졌다. 진혁이 말을 마쳤을 때 스잘의 입은 더 크게 벌어져 있었다.
급히 정신을 차리고 입을 닫은 스잘이 이미 식어 버린 커피로 마른 입 안을 적시고 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번에도 한번 지켜보십시오. 설마 절 못 믿으시겠습니까?”
“그럴 리가요. 회장님 말씀은 무조건 믿습니다.”
“다른 부분은 제가 다 처리하겠습니다. 신호가 가면 세계 환경 연합이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만 시켜 주시면 됩니다.”
세부 사항에 좀 더 논의를 하고 헤어져 인도로 건너갔다.
사람들은 함반토타 항의 인수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환호하고 잊어버렸다.
하지만 진혁의 계획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 *
뉴델리 공항에 도착하자 만길라 총리 비서실장인 리암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반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총리께서 편히 모시라는 당부를 하셨습니다. 가시지요.”
이번에는 인도 총리의 전용차를 타고 이동했다.
보자마자 만길라 총리의 입가에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어서 오십시오. 중국의 끊임없는 야욕을 막아 줘서 고맙습니다.”
“다들 도와주셔서 간신히 성공시킬 수 있었습니다. 좋은 업체를 인수할 수 있게 배려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서 회장님에 대한 기대가 큽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이 나라에서도 사업을 확대해 주십시오.”
스리랑카의 카순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만길라 총리 역시 진혁이 방글라데시에서 했던 것과 같은 사업을 자국에서 펼쳐 주기를 원하고 있었다.
이미 예상했던 터라 진혁이 바로 화답을 했다.
“이미 약속드린 대로 인도의 잠재력을 믿고 사업을 확대하겠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방글라데시와 FTA를 체결해 주십시오.”
“방글라데시와요?”
만길라 총리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수년 전 방글라데시 정부의 요청으로 검토한 적이 있었는데 무산되었다. 전혀 경제적인 이득이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진혁은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알라딘 그룹은 중동으로부터 시작해서 동남아시아와 한국에 걸쳐 있음은 아실 겁니다. 이번에 방글라데시와 스리랑카가 FTA를 맺기로 했습니다. 이는 서남아시아와 중동, 동아시아를 잇는 교역로가 완성됐음을 의미합니다.”
“……!”
“인도 내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갈등, 파키스탄과의 카슈미르로 인한 전쟁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이는 서남아시아의 최대 경제 대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기업들의 성장을 제약하고 있습니다. 저는 열사의 사막에서 난로를,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냉장고까지 팔았다는 한국의 상사맨 출신으로 무역이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인지는 압니다만 국민들의 정서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만길라 총리가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물러설 진혁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방글라데시와의 FTA가 필요한 것입니다. 실제 인도와 파키스탄 기업들이 정치와 별개로 경제적인 이유로 스리랑카와 각각 FTA를 맺어 우회 수출을 하고 있음을 아실 겁니다.”
진혁의 날카로운 지적에 만길라 총리의 말문이 막혔다.
많은 세계 경제학자들이 인도가 잠재력에 비해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 때문이라고 하고 있었다.
신분제로 인한 비민주성이 경제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
이는 무슬림에 대한 차별로 이어져 사회, 정치, 군사적 갈등을 촉발하고 있었다.
“스리랑카는 불교 국가인 데다 유통 구조의 후진성으로 그 역할에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는 최빈국이라 세계 모든 국가로부터 다양한 세제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알라딘만 하더라도 파키스탄군에 납품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의 좋은 제품을 얼마든지 무슬림 시장에 판매할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이유로 중국보다 더 큰 무슬림 시장을 포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진혁은 준비한 말을 다 했기에 기다렸다.
하지만 만길라 총리는 좀처럼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오랜 기간 카스트 제도에 영향을 받아 온 인도의 모든 힌두교도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진혁이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전면적인 시장 개방을 기대하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제약 없이 사업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는 겁니다. FTA만 체결되면 인도 시장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검토할 테니 조금만 시간을 주시오.”
“좋은 소식 기대하겠습니다.”
진혁은 인사를 하고 총리실을 나왔다.
호텔로 가자 다들 모여 있었다.
희준과 이영석, 한상국은 물론 알쇼핑 인디아의 공동 설립자인 ‘다부다 인디아 그룹’ 아먼 의장도 자리하고 있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한상국에게 말했다.
“보고하세요.”
“굿딜은 2010년 쿠폰 판매 사이트로 시작해 인수 합병하여 세력을 키웠고, 인도의 이커머스 부분 내 5위까지 오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경쟁에 밀려 현재는 순위권 밖인 상황입니다.”
“원인은 파악했습니까?”
“덩치를 키우느라 내실이 부족했습니다. 거기에 자금 조달 문제로 오픈 마켓으로 전환에 실패했습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세계 시장을 겨냥한다며 힌디어를 배제하는 정책 때문에 자국민에게 외면 받아 매출이 곤두박질친 것입니다.”
경영자의 건방진 사고가 기업을 망가트린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희준에게 물었다.
“인수 작업 진행 사항은?”
“임시 주총을 다음 주에 열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회장님이 인도 중앙은행으로부터 인수한 지분이 33%에 아먼 의장님이 확보한 25%의 지분으로 인수 합병 결의에는 문제가 없다는 판단입니다.”
“알라딘은 그간 무슬림 시장에만 진출했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파노나와 이곳의 굿딜을 인수를 계기로 비무슬림 국가로 사업을 확대해 나갈 겁니다. 한 사장님이 이번 사업을 총괄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얼마간 더 굿딜 인수와 알쇼핑 확대방안에 대한 논의를 하고 저녁은 아먼 의장과 먹었다.
* * *
만길라 총리로부터 연락이 온 것은 다음 날 오후가 다 되어서였다.
품목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방글라데시와 FTA를 체결하겠다는 답을 들었다.
리스트를 확인한 진혁은 화장품과 통조림을 추가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즈마 총리에게 연락해 실무 협상단을 꾸려 양국 간 논의할 수 있도록 조율까지 해 주느라 다시 호텔로 돌아온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한상국과 이영석은 다른 방에 있는지 희준만 있었다.
지친 표정의 진혁이 넥타이를 풀면서 말했다.
“오늘 저녁에는 진하게 한잔하고 내일 서울에 좀 다녀올게.”
“서울!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너도?”
“배가 많이 불렀을 텐데…….”
간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희준의 모습에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겪어 봐서 어떤 심정인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한상국이 있으니 여기 일은 안심하고 맡겨도 됐다.
“그래, 함께 가자.”
“오케이!”
환호성을 지르며 희준이 갑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는 모습에 진혁의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