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위기가 가져다준 선물
검은 옷으로 감싼 왜소한 체격의 여인이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모든 힘을 집중해 서진혁에 대한 걸 낱낱이 조사해 제거할 방법을 찾아내라.”
“존명!”
말과 함께 히요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히요미는 이에다 회장 가문을 대대로 지켜 온 닌자의 우두머리였다.
장내에는 이에다 회장만이 남아 냉기를 풀풀 풍겼다.
* * *
늦게까지 술을 먹어 새벽에 들어와 곤히 자고 있던 진혁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일어났다.
도이에 중공업에 가자 노무라 사장이 함박웃음을 짓고 반겼다.
“대단하십니다, 회장님.”
“전화로 말씀하신 게 사실입니까?”
“그렇습니다. 스마트팜 기술 이전은 물론 닛뽄 그룹으로부터 후쿠오 선박수리회사 지분 인수도 바로 승인이 났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되는 일이잖습니까. 안 되면 중국이나 한국 쪽으로 알아보겠다고 했더니 서둘러 결정을 해 준 모양입니다.”
진혁이 적당히 둘러댔다. 쇼다와의 일을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노무라는 다르게 생각했다.
폐쇄적인 일본 사회에서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다시 한번 진혁의 능력에 감탄하며, 반드시 알라딘 그룹과 함께 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진혁은 다음 날 알라딘 그룹과 도이에 중공업의 스마트팜 기술을 비롯한 로봇 기술 이전에 대한 양해 각서를 작성했다.
오후에는 노무라 사장이 닛뽄 그룹으로부터 후쿠오 선박수리회사의 지분 60%를 매입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 * *
일본행의 목적을 100% 달성한 진혁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판교에 들려 구필준에게 일본에서의 성과에 대해 들려주자 반색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일을 상의하고 나와 동행 사무실로 들어서는 진혁의 얼굴은 어느새 굳어 있었다.
준비는 다 됐는데 스마트팜 사업이 농민들의 반대로 무산될 처지였다.
그 일을 조사한 것을 보고받아야 했다.
인사하는 우상우와 고진무의 표정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자리에 앉자 고진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반대하는 농민들을 만나 봤는데, 스마트팜에서 쏟아져 나올 대량의 수확물 때문에 가격 하락을 우려하는 게 제일 컸습니다.”
“그래서 수출 작물 위주로 재배하겠다고 했잖습니까.”
“그 약속을 믿을 수 없답니다. 농수산물 수출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면서, 처음 약속과 달리 나중에 수출이 어렵다고 국내 소비로 돌릴 게 뻔하다며 절대 반대한답니다.”
“후…….”
“우리에게 오히려 그렇게 자신 있다면 먼저 결과를 보여 달라며 큰소리로 호통까지 쳤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현실이었다.
자신들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어서 진행하려는데 믿지 못하겠다는 이유만으로 반대를 하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는 진혁을 보고 우상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뒤에 농협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반대 시위를 이끌고 있는 농민들이 농협과 관련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스마트팜 사업을 반대하는 데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개기름이 번질거리던 위성곤 농림식품장관의 보기 싫은 얼굴이 떠올랐다.
농협을 앞세워 자신의 일을 막으려는 게 분명했다.
“청와대와 상의해 보시는 게…….”
“안 됩니다.”
우상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혁이 강하게 반대했다.
권성일은 자신의 뜻에 따라 이현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부담이 큰데도 어렵게 수용해 줬다.
여기서 더 부담을 안길 수는 없었다.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고진무가 힘겹게 입을 열어 말했다.
“전부가 다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들 지역에 세워 달라고 하는 곳들도 있습니다.”
“그래요?”
“동행 센터가 들어서지 않은 곳들이라 인구가 계속 줄다 보니 한계 상황에 직면해 있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문제는 신청 지역이 몇 안 되고 인구수도 너무 적으니…….”
잠시 희망을 빛이 떠올랐던 진혁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찔러 봤다는 말이었다.
다 같이 입을 닫고 고민했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해결책은 간단했다.
이건 정치적으로 풀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카드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진혁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당장 내일부터 진행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니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각자 고민해 보고 다시 모여서 이야기해 봅시다. 수고하십시오.”
동행 사무실을 나서는 진혁의 발걸음은 천 근 추라도 단 듯 무거웠다.
그날 저녁 진혁은 파김치가 된 몸을 침대에 뉘었다.
일본에서 큰일을 끝내자마자 돌아와 연구소와 동행 사무실을 들러 일을 봐야 했다.
게다가 동행 사무실의 일은 오히려 더 큰 고민만 안겨 줬다.
집에 돌아와서도 놀아 달라는 혜주의 성화에 쉴 수가 없었다.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재운 후에야 겨우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막 잠이 들려고 할 때 지민이 이불을 들추고 옆으로 들어와 안기며 말했다.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여요.”
“피곤해서 그런가 보지.”
“제가 당신을 하루 이틀 보나요. 당신은 아무리 힘들어도 일이 잘 풀릴 때는 표정이 밝아요. 반대로 고민이 생기면 어두워요.”
“귀신이 따로 없네.”
일반인도 마찬가지인데 그게 대단한 듯 이야기하는 진혁의 말에 지민이 웃으며 물었다.
“무슨 고민인데요?”
“스마트팜 사업이 농민이 반대로 진행이 어려울 것 같아요.”
진혁은 낮에 동행 사무실에서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중간에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농민들에 대한 불평도 가감 없이 토로했다.
진혁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지민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반대하는 농민들한테 서운하세요?”
“서운해요. 내가 이러는 게 모두 그들을 위해 하는 일인데 그 맘도 몰라주고…….”
“제주도에서 일이 생각나네요. 술에 취한 수호 씨가 당신에게 대들었을 때, 화를 내는 대신 오히려 기백이 있다며 웃으셨잖아요?”
“……!”
“그때도 주변에서 온갖 비난이 쏟아졌어요. 그런데 당신은 당당히 제주 동행을 성공시켜서 그들을 끌어안고 전국적인 사업으로 성장시켰어요. 이번이라고 다르지 않다고 봐요.”
조근조근 말하는 지민의 의견에 진혁은 반발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 중에 틀린 것은 없었다.
그렇다고 수긍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잠시 숨어 지내던 상황이라 시간이 충분해 단계적으로 추진해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널려 놓은 사업이 너무 많아 그 일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한숨을 내쉬는 진혁에게 지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스마트팜 사업을 한다고 해서 자료를 찾아봤어요. 그쪽 분야는 네덜란드가 제일 앞서 있더군요. 그러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어요.”
“뭔데?”
“케어팜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케어팜(Care Farm, 치유 농장)은 농촌 체험을 통한 정서 함양 및 휴양 등의 기능은 물론 정신적, 육체적 건강 회복을 목적으로 제공되는 모든 농업활동을 통칭하는 용어였다.
특히 네덜란드의 케어팜은 치매 환자나 정신지체 장애인 등의 재활을 돕기 위해 농업, 농촌이 가진 치유 기능을 잘 살린 사례로 높이 평가받고 있었다.
진혁도 조사를 해서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스마트팜이 안정화되면 그 일도 시작할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동행 사업이 전국 사업으로 크게 성장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큰 감흥이 없어요. 하지만 제주 동행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순수하게 뜻이 같은 이들끼리, 서로 도우며 이룬 일이라 힘들었지만 보람도 그만큼 컸어요.”
“……!”
“이번에도 그렇게 해 봐요. 굳이 반대하는데 크게 벌일 필요 없잖아요? 당장 돈이 필요해서 하는 사업도 아니고. 작게라도 도움을 요청한 곳부터 시작해 보세요. 당신이 추진하는 일이니 무조건 성공할 거잖아요. 그때는 지금 반대하는 농민들이 서로 하겠다고 부탁할 거예요. 이번에도 제가 옆에서 도울게요.”
맞는 이야기였다.
지금 상대방에게 매달려서는 오히려 상대방의 기만 살려 주고 더 꼬이게 되어 있었다.
정부 지원금을 받지 않는다면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아도 된다.
기가 막힌 생각이었다.
“역시 우리 여보야.”
지민을 힘차게 껴안았다.
머릿속의 고민이 일순간에 사라지자 다른 욕심이 생겼다.
옷 속으로 파고드는 진혁의 손길을 지민이 얼른 잡아 막았다.
평소와 다른 반응에 진혁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지민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혜주 동생이 생겼대요.”
“정말?”
“4주 됐대요.”
“와아!”
환호성을 지르던 진혁의 기분이 이어진 지민의 말에 빠르게 식었다.
“그래서 당분간은 조심해야 해요. 곱게 자요.”
잡았던 손을 떼어 내고 돌아눕는 지민이었다.
희준을 불쌍한 놈이라고 놀렸는데 자신이 이제는 그 꼴이 됐다.
* * *
다음 날, 동행으로 출근한 우상우와 고진무는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해결책을 고민해 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사업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해결책이 나올 리가 없었다.
답답한 상황에서 진혁이 들어오니 인사하는 목소리에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건 말건 밝은 얼굴로 자리에 앉은 진혁이 물었다.
“해결책은 찾으셨습니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이건 해결책이 없습니다. 따라서 스마트팜 사업은 무기한 연기합니다.”
“예?”
“이 시간부로 스마트팜 사업 본부도 해산합니다. 그렇게 되면 고진무 본부장님의 자리가 없어지니 해고입니다.”
“이건 아니지요!”
본인보다 우상우가 더 격하게 화를 냈다.
진혁이 흔들림 없이 자신의 말을 이었다.
“알라딘 복지 재단이 만들어질 겁니다. 첫 사업으로 ‘스마트 케어팜’ 사업을 시작하는데, 고진무 씨가 그 일을 맡아 주셔야겠습니다.”
“회장님!”
“장애인 단체에 들렀다 오는 길인데 대환영이랍니다. 지체 장애인 중에 의외로 IT 기술을 가진 이가 많다고 합니다. ‘스마트 케어팜’ 사업은 정부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알라딘 복지 재단에서 도움을 원하는 지역만을 대상으로 시작할 겁니다.”
스마트팜의 장점 중에 하나가 무인 전자동화라 노동력이 최소화되고 집에서도 관리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장애인에게는 안성맞춤인 사업이었다.
그렇다고 노동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고 지킴이들로 보조해 줘야 하니 청년 실업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도 있었다.
청와대에서 관련 사실을 알려 허락을 받았다.
방향이 정해지자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 계획서가 만들어졌다.
그사이 알라딘 복지 재단이 만들어졌다.
이사장은 지민이 우선 맡았다가 나중에 확대될 때는 전문가를 영입하기로 했다.
* * *
분위기가 후끈 달아오른 한국과 달리 도쿄의 고급 일식집의 VIP 룸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에다 회장이 중국의 전 주한대사였던 장이를 만나고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고 있습니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장이는 굴욕감에 입술을 깨물며 어렵게 답을 했다.
그는 지금 베이징도 아닌 시골 청양의 기술 대학에서 정치외교학 교수로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 일만 없었다며 개발도상국 정도는 지도자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대중국의 외교 실세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서진혁이란 자에 대한 분노가 다시금 밀려왔다.
그 기색을 느끼고 이에다가 차가운 눈으로 물었다.
“그자에게 복수하고 싶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무심코 대답하던 장이가 말끝을 흐렸다.
이에다 회장이 그 일을 알고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렇게 자신을 은밀히 불러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장이의 눈이 빠르게 돌아가는 모습에 이에다 회장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놈이 감히 나를 건드렸습니다.”
“허어. 그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군요. 감히 회장님을…….”
“예전에 대사가 정호영이란 자를 맡아 공작을 했다던데, 그 자료가 필요합니다.”
“…….”
“우리 그룹에 중국 관련 전문가가 부족한 실정입니다.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지요.”
“감사합니다.”
이에다 회장의 통 큰 제안에 장이의 고개가 바로 꺾였다.
어차피 자신에게는 쓸모없는 자료인 데다 좋은 대우에 복수까지 할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서진혁,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더니 잠자는 호랑이 코털을 제대로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