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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03화 (203/307)

203화. 히요미

다음 날.

진혁은 기자 회견을 열어 농어촌 지원단이 추진하려던 ‘스마트팜 사업’을 농민들의 반대 의견을 존중해 무기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알라딘 그룹에서 복지 재단을 신설, 복지 사업을 통한 기업 이득의 사회 환원 계획을 밝혔다.

그 첫 사업으로 장애인과 치매 노인을 등 사회 약자를 위한 ‘스마트 케어팜 사업’을 추진하겠다며 지역별로 신청을 받겠다고도 발표했다.

이에 농촌과 사회 복지에 관심이 있는 청년들에게 함께 사업을 펼쳐 보자는 제안도 했다.

그날 퇴근길에 진혁은 희준과 함께 오랜만에 백화점에 들렀다.

혜주 때는 처음이라 그냥 넘어갔지만 둘째를 가진 것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귀금속 매장은 1층의 목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어서 오세요. 선물하시게요?”

“아내가 임신을 해서 선물을 할까 해서요.”

“어머! 너무 너무 축하드려요.”

판매 직원이 반색하며 건네는 인사에 진혁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장삿속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기분은 좋았다. 손님을 대할 줄 아는 직원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어떤 선물이 좋겠습니까?”

“목걸이나 반지가 좋을 것 같아요.”

직원의 말에 진혁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가슴께로 향했다. 만져지는 게 있었다.

자신을 구렁텅이에서 구하고 회귀시켜 준 베송의 마법 펜던트.

비록 그 효능은 다했지만 진혁은 여전히 그걸 목에 걸고 있었다.

고마움도 있었지만 딸 얀느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이라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그 마음을 기억하고 자신도 혜주를 사랑해 줄 생각으로 지니고 다녔다.

“목걸이가 좋겠습니다.”

“잠시만요.”

직원이 보여 줄 목걸이들을 고르는 사이 진혁은 여전히 과거의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때 물건을 판 선물 가게 노인.

그리고 베송이 남긴 나머지 마법 펜던트들.

기회가 되면 다시 한번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때 옆에서 상념을 깨는 소리가 들렸다.

“소꼬, 소꼬……. 어마에요?”

짧은 일본어에 어색한 한국말.

일본인 관광객이었다.

진혁의 눈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바로 옆이 화장품 매장이었다.

“새끈하게 생겼는데?”

시선을 같이 돌렸던 희준이 한 소리였다.

희준의 말이 수긍될 정도로 확 띄는 미모였다.

“일본 애들 중에 저 정도 미모는 보기 힘든데. 혼혈인가?”

희준이 그녀에 대해 이런저런 평을 하는 모습에 진혁이 혀를 찼다.

어떻게 결혼하고 곧 애 아빠가 될 놈이 변한 게 없었다.

“준비됐습니다.”

직원의 말에 다행히 희준의 만행이 그쳤다.

진열된 대여섯 개의 목걸이 중 지민의 하얀 목에 어울리겠다 싶은 것을 골랐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잘 고르셨네요. 예쁘게 포장해 드릴게요.”

“이것도요.”

잽싸게 끼어든 희준이 하나를 더 골랐다.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진혁에게 희준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자기야도 임신했잖아.”

“그래서 전에 선물해 줬잖아?”

“지현 씨가 샘이 좀 많더라고. 너만 하고 난 빈손이면 며칠을 바가지 긁을지 몰라. 이것도 따로 포장해 주세요.”

희준이 진혁이 말릴 사이도 없이 얼른 집어 내밀었다.

직원의 행동은 더 빨랐다. 두 개를 한꺼번에 팔게 됐으니 이보다 기쁠 수는 없었다.

계산할 때 잠시 신경전이 있었지만, 좋은 날이라 오늘만은 진혁이 통 크게 썼다.

각자 주머니에 목걸이 케이스를 하나씩 넣은 채 밝은 얼굴로 나가는 진혁과 희준을 등을 바라보는 히요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보통의 암살자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히요미는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대를 죽이는 것은 개나 돼지들을 도축하는 도살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아는 얼굴에 당하면서 죽어 갈 때 떠올리는 놀란 표정을 바라보는 쾌감이 컸다. 그래서 일부러 소리를 내 자신에게 시선을 주게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는 놈이 죽을 일만 남았다.

* * *

다음 날, 진혁은 스리랑카로 건너갔다. 함반토타 항만 운영 주식회사가 정식 발족하는 날이었다.

카순 대통령이 활짝 핀 얼굴로 인도의 만길라 총리 등 해외 외빈들을 맞았다.

탄핵 위기까지 몰렸던 카순 대통령은 지금은 오히려 국토를 지켜낸 지도자로 국민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에 반해 중국을 대표해서 온 우핑 부총리의 표정은 가관도 아니었다.

그는 대중국의 정치 실세로 가는 곳마다 최상의 예우를 받아 왔다.

게다가 비록 통째로 먹는 것은 실패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함반토타 항의 최대 지분 국가였다.

그런데도 겨우 1억 달러를 책임진 인도와 방글라데시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었다.

성질 같아서는 당장 자리를 박차고 떠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함반토타 항만에 대한 인수 실패로 동서경제벨트 사업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고 생각한 왕칭린이, 중단되어 있던 ‘콜롬보 항구 도시 프로젝트’를 무조건 재개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어떻게든 카순 대통령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성대한 발족식에 이어 처음으로 열린 주주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진혁이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진혁은 수락 연설에서 함반토타 항을 ‘친환경 스마트 항’으로 규정하고 3년 안에 세계 1위의 환적항으로 성장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항만 운영사는 부산항만공사로 결정되었음도 알렸다.

기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알라딘 그룹과 진혁의 능력은 알지만 너무 무모한 포부였다.

겨우 하루 한 척의 입항도 어려워 부두가 텅텅 비어 있는 게 함반토타 항의 냉정한 현실이었다.

한 달 컨테이너 물동량이 300만 TEU에 이르는 싱가포르항을 넘겠다는 게 믿기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이어진 만찬에서도 관련된 이야기가 거론됐다.

각국에서 온 인사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느라 정신없던 진혁이 겨우 한심을 돌릴 때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제가 바쁘신 분을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요. 저도 이 일에 일정 부분 관여된 데다가 럭키 가이가 하는 일인데 당연히 와야지요.”

NS통신의 조나단 기자였다.

중국이 이곳을 군사기지화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리는 기사를 내보내 줘 힘을 실어 준 고마운 이였다.

조나단이 주변을 둘러보고 물었다.

“이번에는 어떤 요술을 부르시려고 그러십니까?”

“그 요술로 오늘 이렇게 함반토타 항을 제가 맡아서 관리하는 것으로 됐지 않습니까?”

“저한테까지 그리 말씀하시면 서운합니다. 제가 회장님을 뵌 게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회장님은 겨우 이 정도에 만족하실 분이 아니지요.”

CIA 잭슨처럼 조나단도 진혁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진혁이 주변을 둘러보고 물었다.

“다른 기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싸늘하지요. 싱가포르항이 지척인 데다, 인도양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의 밥그릇을 빼앗은 것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회장님의 포부가 실현될 거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기자님은 어떻습니까?”

“저야 당연히 회장님의 말씀을 믿지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이번에도 기자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후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한참동안 쑥덕거렸다.

너무 많이 머리를 끄덕여서 아픈 목을 만지며 조나단이 말했다.

“세상이 뒤집어질 일입니다.”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가 회장님을 좋아하는 겁니다. 돈 버시는 것은 배 아픈데 좋은 일을 하시면서 버시니까요.”

“그래서 제 인생의 모토가 더불어 잘살아 보자입니다.”

“그럼 저도 이번에도 한 팔을 보태고 잘살아 보겠습니다. 하하하하!”

갑자기 터진 조나단의 큰 웃음소리에 주변의 기자들의 시선이 쏠렸다.

두 사람의 인연을 모르는 기자들이 없는 터라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지 얼른 달려와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조나단, 같이 좀 웃자고.”

“아무것도 아니야. 그럼 또 뵙겠습니다.”

“안녕히 돌아가십시오.”

진혁과 조나단 모두 시치미를 떼고 돌아서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몰려든 기자들이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바라보고 있었다.

* * *

다음 날, 모두가 떠나고 입항한 화물선이 한 척도 없지만 부두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운영사로 선정된 부산항만공사 직원들과 알라딘 기술연구소와 도이에 중공업 연구원들이었다.

공사 준비를 위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진혁은 항만 내 이동 차량을 모두 전기차로 배치하게 했다. 그로 인한 전기 충전소를 설치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사무실로 가자 반가운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이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지요.”

제주에 있는 오존메이드 홍준기 대표와 최용선 이사였다.

권오일 부사장을 불러 함께 회의실로 들어갔다.

진혁은 오존메이드를 부른 이유를 설명해 줬다.

“전 우리의 목표인 싱가포르항과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오존팩을 설치하려고 합니다.”

싱가포르항의 특화된 서비스 중에 하나가 냉동 컨테이너 대기소였다.

도착해 환적을 기다리는 동안 냉동 제품이 녹지 않게 온도를 유지해 주는 장소였다.

중국이 그것을 모방해서 이곳에도 해당 시설도 만들었다.

진혁의 시선을 받은 최용선이 권오일에게 대용량 오존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하, 오존 살균을 추가함으로써 냉장 보관된 제품이 상하는 것을 막으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표면적으로는 그렇습니다만, 전 그 다음까지 보고 있습니다.”

“……?”

“냉장 제품은 얼리기라도 하지만 과일과 채소는 그럴 수 없어 오히려 상하기 쉽습니다.”

“아!”

“맞습니다. 살균 컨테이너 대기소도 함께 운영할 생각입니다. 과일 수출은 이동 시간을 감안해 덜 숙성된 것을 따서 판매하는 바람에 제품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관련 화물을 운반하는 컨테이너를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당장 시행하겠습니다.”

반색하는 권오일이 홍준기와 최용선을 데리고 나가는 모습에 진혁은 가슴속 한편을 누르고 있던 짐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제주에서 오존메이드를 찾아가 대용량 오존팩을 개발하면 자신이 해외에 판매해 주겠다고 큰소리쳤었다.

그동안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는데, 이번 일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됐다.

물론 그때 해외 판권은 자신이 가진다는 조건이었기에 진혁에게도 남는 거래였다.

이런 계획을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은 스마트 케어팜 사업을 구상하면서 과일과 야채를 안정적으로 수출할 방법을 고민해서였다.

남들은 이득도 안 되는 일이라며 나서지 않지만, 아니었다.

이렇게 다른 쪽에 도움을 되고 있었다.

* * *

다음으로 진혁이 만난 이는 노무라 도이에 중공업 사장과 일본인치고 체격이 좋은 사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후쿠오 선박수리회사의 부사장을 맡고 있는 이시무라입니다.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타국 근무를 선뜻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설을 둘러보시니 어떻던가요?”

“아주 잘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관련 기계만 설치하면 당장이라도 가동이 가능합니다.”

“들으셨겠지만 한국의 기술자들도 일부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잘 어울릴 수 있게 신경 써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과거라면 모르지만 조선 기술은 현재 한국의 기술력이 더 뛰어납니다. 저희들이 더 배우겠다는 자세로 임하기로 결의했습니다.”

“맞습니다. 이미 세계가 하나로 묶여 있습니다. 한국이건 일본이건 상대는 중국입니다. 그들보다 앞서기 위해 합심해 주십시오.”

얼마간 선박 수리 회사 운영에 대해 논의하고 이시무라 부사장이 나가자 노무라 사장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로 규모가 클 줄 알았으면 도이에 조선의 유휴 인력의 일부를 이쪽으로 돌릴걸 그랬습니다.”

한국의 조선 업계와 마찬가지로 도이에 조선도 수주 실적 저하로 경영 악화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시 구조 조정에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 낌새를 느끼고 진혁이 말했다.

“다른 부분에서 원가 절감을 하더라도 더 이상의 인력 구조 조정은 하지 마십시오.”

“아는데 이미 최대한 절약하고 있어 더 이상 줄일 곳이 없습니다. 인건비 절감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실정입니다.”

“순환 휴직제를 시행하면서 최대한 인력을 붙들고 계십시오. 조만간 퇴직자들을 불러들여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 겁니다.”

노무라가 눈을 반짝였다.

“무슨 계획이 있으신 겁니까?”

“제가 도이에 중공업 전체를 인수한 가장 큰 이유는 도이에 조선 때문이었습니다.”

“로봇 기술이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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