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화. 정호영의 변심
“도이에 조선의 LNG 선박 기술은 세계 최고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게 빛을 볼 날이 곧 올 겁니다.”
도이에 조선은 에너지 시장이 변할 것이라 생각해 차세대 연료인 LNG 선박 기술에 집중 투자했었다.
그래서 다른 업체에 비해 LNG 관련 기술이 앞서 있었다.
하지만 세계 경기의 동반 하락이 발목을 잡고 말았다.
실적 부진에 시달리는 대형 선사들이 신규 선박의 수주는 물론 기존 선박의 개선 작업도 미루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고 했습니다. 조금만 인내하고 버티십시오.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 겁니다. 전 다른 일이 있어서 나가 보겠습니다.”
뜬 구름 잡는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나가는 진혁의 모습에 노무라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며칠간 함반토타 항 운영 준비 작업을 지켜보던 진혁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시각, NS통신에서 조나단 기자가 작성한 의미 있는 기사를 게재했다.
심각한 해상 오염.
이산화탄소 배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육상 교통수단은 친환경 연료로 속속 대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반면, 해상 운송은 무관심 속에 여전히 환경을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질책성 기사였다.
하지만 중요 이슈가 아니라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 * *
알라딘 빌딩 5층에 마련된 알라딘 복지 재단은 인테리어 공사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도 바쁘게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동행 사무실에서 이곳으로 옮긴 고진무는 직원들과 함께 ‘스마트 케어팜’ 신청 지역을 대상으로 면접과 실사 작업을 병행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민도 나와 업무를 보고 있었다.
무리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일한다는 약속을 받았다.
* * *
진혁이 한국에서 바쁘게 지내는 사이 정호영은 방글라데시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피부가 까맣게 타고 집에 돌아와 옷을 벗으면 소금이 떨어질 정도로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자신의 일생 중에 가장 뿌듯하고 행복한 순간들이었다.
한국은 물론 외국 기업에 로힝야들까지 한마음이 되어 신도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모두 지휘하고 통제하는 게 자신이었다.
일부에서는 진혁이 외부 사업에만 몰두하느라 이곳을 잊은 게 아니냐 하는 우려를 나타냈지만, 정호영은 그런 사실이 오히려 기뻤다.
진혁이 진심으로 자신을 믿고 있다는 반증이라 생각했다.
사업적인 성과보다 더 행복한 것은 김연희와의 사랑이었다.
과거의 결혼 생활은 사업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정략적으로 결정된 결혼이라 사랑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서로 무관심하고 각자의 삶에 관하지 않으니 남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연희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인간 정호영의 모습 그대로 봐 준 최초이자 유일한 여자였다.
로힝야 아이들을 가르치는 바쁜 와중에도 항상 고생한다고 격려해 주고 챙겨 줬다.
주변의 수군거림을 알면서도 결혼은 신도시 건설이 끝난 다음에 새집에 입주한 로힝야들의 축복을 받으며 하겠다며 미룰 정도로 사려심이 깊은 여자였다.
가게에서 꽃을 사 들고 차로 걸어가는 정호영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 것은 당연했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이었다.
집에서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열정적인 밤을 떠올리며 차에 탄 정호영이 시동 버튼을 힘차게 눌렀다.
“읍.”
시동 걸리는 소리 사이로 정호영의 다급한 신음 소리가 끼어들었다.
뒷좌석에 숨어 있던 정체불명의 인물이 거즈로 정호영의 입을 막았다.
싸한 냄새와 함께 정호영은 정신을 잃었다.
소파에서 정신을 차린 정호영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벌떡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납치당했던 사실을 떠올랐다.
방글라데시에서 보기 드물게 화려하게 꾸며진 실내였다.
맞은편 소파에는 무표정의 동양인 사내가 앉아 있었다.
“웬 놈이냐?”
“본토에서 직접 구해 온 귀한 보이차입니다. 맛을 보시지요.”
“…….”
“대화만 나누고 곱게 보내 드릴 겁니다. 피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늘은 가능하면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군요.”
전혀 흔들림 없이 차를 따르는 사내의 행동에 정호영은 한기를 느꼈다.
거침없이 중국어를 사용하는 것도 그렇고, 주변을 지키는 다른 사내들의 모습까지.
전문가들이었다.
정호영이 입술을 깨물고 사내가 건네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무엇 때문에 자신을 납치했는지 그 이유를 떠올렸다.
그 모습에 사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알라딘 사무실에 파일 하나만 심어 주시면 됩니다.”
“내게 스파이 짓을 하라는 말이냐? 그건 절대 못 한다.”
정호영이 강하게 버티자 사내의 눈짓에 다른 이가 노트북을 가져다가 앞에 놓고 플레이를 시켰다.
맨몸의 남녀가 난잡하게 얽힌 장면과 테이블에 흐트러져 있는 주사기들이 차례로 보였다.
그런 영상이 하나가 아니었다.
“그만, 그만!”
결국 정호영이 이성을 잃고 소리치며 노트북을 집어 옆으로 던져 버렸다.
퍽!
노트북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나뒹굴었지만 누구도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흥분한 정호영이 으르렁거리며 사내에게 말했다.
“오래전 중국에서 방황할 때 저지른 못난 행동이었다. 그런 나를 서 회장님이 용서해 주고 받아 주셨다. 그분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물론 그러시겠지. 하지만 이분은 어떠실지.”
다시 사내의 눈짓에 다른 노트북이 앞에 놓였다.
이번에 나온 화면에는 잘 차려진 식탁을 앞에 두고 앉아 촛불을 보며 행복한 표정으로 책을 보고 있는 김연희의 모습이 나타났다.
자신이 오기를 다리고 있는 실제 상황이었다.
사내가 말을 이었다.
“조사해 보니 의외로 강단이 있는 분이시더군요. 정 사장님을 이해하고 받아 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럴 환경이 안 될 겁니다.”
“……?”
“이 나라는 미개해서 그런지 곳곳에서 인신 매매범들이 득실거린다고 하더군요. 공짜로 건네준다면…….”
“개자식, 죽여 버리겠다!”
“당신에게도 그럴 기회는 없을 겁니다. 마약 사범에 대해서는 한국도 그렇지만 이곳도 처벌이 강하거든요. 감방에 들어가면 살아서 나오기는 힘들 겁니다.”
사내의 냉정한 말에 정호영의 기세가 팍 꺾이며 소파에 무너지듯 등을 기댔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올가미에 걸렸다.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라딘이 너무 잘나가지 않습니까. 그냥 어떤 일을 하는지 감시하는 것뿐입니다. 어떠한 위해도 없을 겁니다.”
사내의 꼬임이 너무도 달콤했다. 거짓말인 줄 알면서도 김연희와 지금의 행복은 너무도 소중했다.
얼마간 고민하던 정호영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라딘의 보안은 일류다. 이상한 파일이 들어오면 바로 알아차릴 거다.”
“그 정도는 우리도 알고 있어 걸리지 않게 철저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린다면 깨끗이 포기하지요. 물론 그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지는 당신이 알아서 처신할 일이지만.”
“…….”
“이 일만 처리해 주면 우리가 가진 당신에 대한 자료를 원본째로 넘겨드리지요.”
“좋다. 약속은 확실히 지켜 줘야 한다.”
결국 정호영이 자신과 타협하고 말았다. 알라딘의 보안이 막아 주기를 기대하면서.
아니면 그간 본 진혁의 능력이 어떻게든 위기를 극복할 것이라며 억지로 자신을 합리화시켰다.
그 모습에 사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자신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나머지는 일본 쪽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 * *
7층에 마련된 회장실에서 수북이 쌓여 있는 서류를 검토하던 진혁에게 고용준과 고진무가 함께 찾아왔다.
두 사람은 같은 성씨라 금방 친해져서 호형호제하며 지내고 있었다.
고용준이 보고를 했다.
“회장님의 지시로 우리나라 농수산물 수출 현황에 대해 조사를 했습니다.”
농민들이 스마트팜 사업을 반대하는 가장 큰 원인은 국내 시장에 유통되어 가격 하락을 부추길 것을 우려해서였다.
먼저 수출 실적을 보여 달라는 요구까지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농수산물 수출 지역은 일본, 중국, 미국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동남아시아로 수출이 급격이 늘고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요?”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경제 성장을 하면서 국민들의 소득 수준이 높아진 데다, 마침 불어닥친 한류 열풍으로 한국산 신선 농산물을 수요가 급증하고 있답니다. 그중에서도 베트남의 성장세가 두드러집니다.”
농산물 수출은 2007년 5천만 달러에도 미치지 못했는데 지금은 5억 달러가 넘어서고 있었다.
“베트남이 4대 수출국으로 지정될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릅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동남아시아에 다녀올 일이 있는데 그때 한번 들러 보겠습니다. 주요 수출 품목은요?”
“과일류로는 배, 사과, 포도, 딸기이고, 야채는 파프리카와 토마토입니다. 화훼는 장미와 선인장이 가장 높습니다. 특히 접목 선인장은 우리나라가 세계 1위 수출국입니다.”
“대단하군요.”
“저도 이번에 조사하면서 솔직히 놀랐습니다. 이 정도면 농민들의 국내 유통에 따른 가격 하락은 괜한 우려에 불과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확실히 보여 줍시다. 그러면 그분들도 더 이상 반대만 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진혁의 당당한 포부에 고용준이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하지만 고진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용준이 간과한 것이 있는데, 농민들의 기우는 단순한 우려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알라딘은 세계적으로 사업을 펼치면서 현지 유통망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어 그 부분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반대하며 사업을 지연시킨 농민들을 생각하니 답답했다.
두 사람에게 오늘 결정된 사항을 가지고 좀 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보라고 하고 내보낸 진혁은 시계를 보고 서둘러 퇴근했다.
그는 요즘 혜주와 놀아 주고 지민과 함께 침대에 누워 그녀의 배를 쓰다듬는 낙에 살고 있었다.
임신 초기라 얼마 무르지도 않았는데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 이놈이 발로 차네.”
“설마요.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야. 분명 찼다니까.”
강하게 주장하는 진혁의 머리에 어째 많이 봤던 장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빌어먹을 자식.’
태아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 같아 속으로만 욕을 했다.
불과 얼마 전에 놀리며 핀잔을 줬던 희준의 행동을 자신이 따라 하고 있었다.
처제를 소개시켜 주는 게 아니었는데.
* * *
‘스마트 케어팜’ 사업에 대한 방침이 어느 정도 정해지자 진혁은 미뤘던 동남아시아 일정을 잡았다. 10월 23일부터 30일까지 8일간이었다.
미적거리는 희준을 닦달해 공항으로 갔다.
티켓을 받아 출국장으로 향하던 희준이 한쪽을 보고 갑자기 소리쳤다.
“어? 저기 정 사장님 아니야?”
“방글라데시에 있을 텐데.”
“정 사장 맞다니까. 정 사장님, 정 사장님!”
희준이 소리치며 달려가는 모습에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에 들어올 거면 전화를 했을 텐데 그런 보고를 받지 못했다.
잘못본 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리자 얼마 후 희준이 돌아와 투덜거렸다.
“에이씨, 무슨 급한 일이 있다고 그렇게 불러도 모르고 그냥 가냐.”
“정 사장 맞아?”
“그렇다니까. 택시를 타고 바로 떠나는 바람에 놓쳤어. 전화라도 해 봐야겠다.”
“놔둬. 우리 쪽에 연락을 안 한 것을 보면 개인적인 일일 거야. 필요하면 연락하겠지.”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출국 게이트가 나오자 안으로 들어갔다.
* * *
진혁이 제일 먼저 들른 곳은 AA가 있는 인도네시아였다.
선병식이 차를 보내 줘 편하게 사무실로 갔다.
인사하고 자리에 앉아 그간의 실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는데 예상보다 좋았다.
당연히 진혁의 입에서 칭찬이 나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회장님이 믿고 맡겨 주신 데다 다들 열심히 해 준 덕분에 이룬 성과입니다.”
“그걸 어우른 건 선 회장님의 능력이시지요. 충분히 자부심을 가지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동남아시아의 성장세가 눈에 보일 정도로 가파릅니다. 한류의 열기도 날로 높아 가고요. 이럴 때일수록 좀 더 적극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계획을 세워 보십시오.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는 말이 있었다.
중국의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다음으로 이곳이 발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진혁이기에 흔쾌히 동조를 했다.
하지만 선병식은 전적으로 자신을 믿어 줘서 그런 것이라 착각했다.
어떻든 선병식은 속으로 그 믿음에 보답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그때 선병식이 무언가 떠올리고 얼른 말했다.
“참, 좋은 구경거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