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요시! 잡았다
“……?”
“임텍 그룹 창립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오늘밤에 강변 공원에서 K-POP 공연이 열립니다. 한번 가 보시지요.”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그렇게 합시다.”
“그럼 얼른 자리부터 알아봐야겠습니다. 티켓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거든요.”
서둘러 자리를 뜨는 선병식의 모습에 한류 열기가 대단함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난 선병식이 웃으며 돌아왔다.
“임텍 그룹에서 처음에는 자리가 없어 곤란하다고 하더니, 회장님이 가신다고 했더니 바로 VIP석으로 모시겠다며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까지 합니다.”
“감사한 일이네요.”
한류 열풍으로 가장 득을 본 것은 한국 상품을 공급하는 AA였다. 어디서건 상전 대접을 받고 있었다.
이어 진혁은 선병식에게 한국에서 시작하게 된 ‘스마트 케어팜’ 사업에 대해 들려주고 협조를 부탁했다.
“생산된 농산물의 수출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이곳에서 한국산 농산물의 수요가 급증한다는 말에 둘러보러 왔습니다.”
“농산물뿐만 아니라 다른 제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호적인 분위기입니다. 큰 물량이 아니니 가져와도 충분히 소비가 가능할 거라고 봅니다.”
선병식의 자신감에 진혁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수출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마야가 결재판을 들고 들어왔다. 좀 전에 선병식이 따로 연락을 했던 모양이었다.
말레이시아의 리사라는 싸가지 없는 히자비 스타를 대신할 예비 스타 선정에 대한 보고를 위해서였다.
티엔 사장의 설득으로 리사의 스태프들이 이쪽으로 옮겨 오기로 해서 결정을 서둘러야 했다.
마야가 인사를 하고 앉아 결재판을 펴 놓고 보고를 했다.
“일단 후보는 두 명으로 압축했습니다. 아역 스타에서 막 벗어난 배우 만가낭 양과 가수로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자우하리 양입니다.”
“만가낭 양은 순수 원주민 출신이라 지원만 충분하다면 성인 배우로도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입니다. 자우하리 양은 유럽계 혼혈로 끼와 재능을 겸비해, 최근 불고 있는 한류와 가장 적합하다는 평입니다. 회장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선병식의 질문을 받은 진혁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뭘 아나요. 여기 분들의 의견이 중요하지요.”
“그게 참 어렵습니다. 만가낭 양과 자우하리 양의 특색이 상이해 우리들 사이에도 평이 엇갈려 결정이 쉽지 않습니다.”
“슈퍼 블로거들의 의견도 마찬가지입니다. 투표까지 했는데도 반반으로 결과가 나왔어요.”
마야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진혁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둘 다 키우는 것으로 하세요.”
“둘 다요?”
“이쪽 시장 전망이 좋다고 적극적 투자하자고 하신 분은 선 회장님이십니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그런 간단한 결정을 두고 그 고민을 했다니. 마야 팀장 생각은 어때요?”
“당연히 좋아요. 둘 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까웠거든요. 고맙습니다.”
마야가 진혁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고민했던 것은 투자비 때문이었다.
연예인 하나를 키우려면 생각보다 큰 금액이 들어갔다. 그렇게 하고도 실패할 확률이 많은 투자였다.
진혁의 통 큰 결정이 기뻤다.
* * *
저녁 강변 공원에서의 열기는 국영 방송마저 취재가 나올 정도로 뜨거웠다.
아침 일찍부터 몰려온 관객들로 자리가 꽉 차 있었다.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둑 위를 빼곡히 매운 채 공연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병식의 안내로 진혁과 희준은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 잡은 VIP석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회장님.”
먼저 와 있던 인니 마렛의 안톤 사장이 벌떡 일어나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아래로 내려 봤었는데. 알라딘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방증이었다.
진혁도 정중히 인사를 했다.
“이런 좋은 행사를 마련해 주셔서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앞선 문화와 좋은 행사를 우리 국민들에게 소개할 수 있어서 저희가 더 감사하지요. 회장님이 오실 줄 알았으면 아버님이 직접 참석하셨을 텐데, 멀리서 축하해 주시러 오신 다른 분들을 접대하느라 오늘은 오시지 못했습니다. 죄송한 말씀 전해 달라며 저에게 최대한 편하게 모시라 당부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만도 충분히 감사했다는 말씀 전해 주십시오.”
“아버님이 일정이 괜찮으시면 내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하실 말씀도 있으시다면서요.”
“이런, 죄송합니다. 제가 내일 오후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중요한 약속이 잡혀서요. 사업적으로 하실 말씀이 있으면 여기 선 회장님과 나누시면 될 겁니다. 나중에 오면 편하게 한번 뵙겠다고 전해 주십시오.”
진혁이 그 정도에서 적당히 인사를 마쳤다.
예전 같으면 약속을 미루는 한이 있더라도 쿤초로 회장을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가 만나서 대접해야 할 사람은 선병식이었다.
선병식도 그런 진혁의 의중을 알고 어깨를 활짝 폈다.
진혁은 단순히 자리만 맡긴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곳을 자신의 영역으로 인정해 주고 있었다.
아이돌 그룹이 나오면서 공연이 시작되자 장내는 귀가 찢어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다들 시선을 무대에 두고 있었지만 진혁은 관중들을 관찰했다.
야광봉을 흔드는 것은 물론, 노래 가사들도 정확히 따라 부르고 있었다. 일부는 일어나 안무를 했는데 정확히 동작이 일치했다.
그러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가 느껴졌다.
더불어 선병식이 한류 열풍에 대해 한 말이 과언이 아니었음도 느껴졌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중간 중간 이곳 현지 가수들이 K-POP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저 아이가 자우하리입니다.”
선병식의 귓속말에 진혁의 시선이 무대로 향했다.
이곳 사람들과 달리 훤칠한 키에 볼륨 있는 몸매였다.
한국 노래를 부르는데 발음은 물론 감정 이입도 정확했다. 노래 가사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청중들의 반응은 한국의 아이돌 스타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 * *
알라딘 빌딩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한상국이 예상치 못한 정호영의 방문에 놀라 일어나며 물었다.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회장님께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요.”
“어……. 회장님은 동남아 시장 조사차 가셨는데요.”
“이런.”
정호영이 일부러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놈들은 반드시 한상국의 PC에 USB를 꽂으라고 했다.
한상국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급한 일 같은데 전화라도 해 보시지요?”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핸드폰을 꺼낸 정호영이 갑자기 생각한 듯 주머니를 뒤져 USB를 꺼내 들고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자료를 보면서 보고를 드려야 하는데…….”
“제 PC를 쓰십시오. 마침 켜져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서둘러 한상국의 자리에 앉은 정호영이 떨리는 손길로 USB를 컴퓨터 본체의 포트로 가져갔다.
이걸 꼽는 순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다.
무사히 넘어갔으면 하는 마음과 알라딘 보안망이 불법 소프트웨어를 막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반반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출근하면서 모닝 키스를 해 준 김연희를 떠올리며 정호영이 이를 악물고 마침내 USB를 꽂았다.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휴우.”
한숨을 내쉴 때 한상국이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예?”
“이마에 땀이…….”
손을 가져가 보자 흥건한 물기가 느껴졌다.
얼른 책상 위에 있는 티슈를 꺼내 닦으며 변명을 했다.
“방글라데시에서부터 몸살기가 좀 있었는데 그래서 그런 모양입니다.”
“병원부터 가 보시지요.”
“아무래도 그래야겠습니다. 자료부터 보내고 보고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정호영이 이메일을 열어 미리 작성해 둔 방글라데시 공사 현황 자료를 진혁에게 보냈다.
정호영이 일어나 한상국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다 한 가족이잖습니까? 일도 좋지만 몸부터 챙기셔야지요. 회장님이 아시면 저까지 혼납니다. 직원들을 가족같이 더 아끼시는 분이잖습니까.”
“……다음에 또 들리겠습니다.”
정호영은 한상국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 얼른 인사하고 서둘러 나왔다.
‘한 가족’이란 말이 아프게 다가왔다.
혼자 남은 한상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호영은 재벌가 후계자로 자라 항상 냉정하면서도 정확히 행동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나사가 빠진 듯 허둥대고 있었다.
자리로 돌아온 한상국은 하던 일을 계속 하다가 알라딘 서버에 접속했다.
* * *
“요시! 잡았다.”
알라딘 빌딩 인근의 호텔방에서 한 일본인이 주먹을 불끈 주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앞에 놓인 노트북의 화면에는 한상국의 컴퓨터 화면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마침내 알서버에 직접 접속할 수 있는 마스터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그는 즉시 히요미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 * *
5일 후, 베트남 하노이행 비행기 좌석에 앉은 희준의 입에서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 죽겠네.”
지난 사흘간은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인도네시아를 떠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필리핀, 태국을 거쳤다. 거의 하루에 한 나라씩 방문했으니 녹초가 될 만도 했다.
“자식이. 겨우 이 정도에 엄살은.”
“아, 몰라. 난 더 이상 못 해.”
“베트남이 마지막이야. 여기서는 며칠 머물면서 천천히 시장 조사나 하자.”
진혁도 지쳐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은 ‘스마트 케어팜’ 수출을 꼭 둘러봐야 할 국가였다. 그래서 일부러 다른 국가들의 방문 일정을 최소화했다.
내일 낮에 라이꾸두 회장이 소개해준 현지 유통 체인을 운영하는 화교 기업가를 만나는 것으로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난다.
사전에 전화로 상당 부분 합의가 이루어진 터라 걱정할 일도 없었다.
피곤에 곤히 자던 두 사람은 스튜어디스가 깨우는 바람에 일어나 허겁지겁 기내식을 먹었다.
배가 부르니 피곤이 더 밀려왔다.
희준이 일어나며 말했다.
“화장실에 다녀올게.”
“난 잘게.”
눈을 감고 얼마 후 막 잠이 들려는 순간 누군가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희준이었다.
“일어나 봐. 대박 사건이야.”
“야이씨.”
잠에서 깨어난 진혁의 화를 내는 것도 무시하고 희준이 흥분한 얼굴로 떠들었다.
“새끈이가 앞에 타고 있어.”
“새끈이?”
“백화점에서 임신 기념 목걸이 살 때 봤던, 새끈하게 생긴 일본 애 있잖아?”
“아, 잠깐 스치면서 본 얼굴을 기억하냐? 너도 참 대단하다.”
“예쁘잖아. 이거 조짐이 아주 좋은데? 이번 베트남 여행은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
희준이 언제 앓은 소리를 했냐는 듯이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그러건 말건 진혁은 밀려오는 피곤에 눈을 감았지만 이전과 달리 바로 잠들지 못했다.
신경을 거슬리는 게 있었다.
‘이상한데. 처음 보는 외국인을 연달아 두 번 만나는 게 흔한 일인가? 그것도 외국에서.’
하지만 그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피곤은 몸은 물론 머리도 쉬게 했다.
바로 코를 골았다.
베트남에 도착해 희준이 불을 켜고 새끈이를 찾았지만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괜히 진혁에게 화풀이를 했다.
“에이씨, 네가 늦장부리는 바람에 놓쳤잖아.”
“잠이 안 깨지는 것을 어쩌라구.”
억지로 희준을 달래 택시에 태워 호텔로 향했다.
그런 그들을 뒤따르는 차가 있었다.
뒷좌석에 앉은 히요미가 쥐고 있는 핸드폰에 대고 말했다.
“이곳에서 놈의 숨통을 끊겠습니다.”
* * *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서둘러 씻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만큼 피곤했다.
그리고 찾아온 다음 날 아침, 늦게 일어난 두 사람은 귀찮아서 룸서비스를 시켜먹었다.
씻고 나온 진혁이 아직도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희준을 보고 물었다.
“새끈이 찾으러 간다며?”
“새끈이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냥 쉴 거야.”
“그러든지.”
오늘 만남은 진혁 혼자 가기로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진혁이 몸단장을 하고 나가려는 모습에 희준이 미안한 마음에 입을 뗐다.
“나도 따라가야 하는 건데.”
“됐어. 이미 전화로 합의가 됐다고 했잖아. 쉬고 있어. 얼른 끝내고 간만에 찐하게 한잔하자.”
“좋지.”
혼자 내려온 진혁이 현관으로 나가자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구경하기 쉽지 않은 고급 승용차였다.
“서진혁 회장님?”
“그렇습니다.”
“어서 타십시오. 저희 사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