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위기일발
-호텔 출발.
-A3 지점 통과.
하노이 시가지의 한 빌딩 옥상에서 무전기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히요미가 저 멀리 언덕 쪽 도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놈이 곧 도착한다.”
“문제없습니다, 대장.”
저격수 곤도가 당차게 말했다.
사정거리 3킬로미터에 이르는 독일제 DS-1은 불펍식 볼트액션 저격 총으로 명중률이 뛰어나기로 유명했다.
자체 스코프가 장착되어 편리하기도 했다.
곤도는 이 총을 사용한 이후로 한 번도 임무를 실패한 적이 없었다.
-F7 통과.
“온다.”
히요미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오자 곤도는 스코프에 눈을 대고 호흡을 멈췄다.
F7은 바로 언덕 너머 지점이었다.
방아쇠에 올려놓은 손가락에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 * *
편한 자세로 뒷좌석에 앉아 스쳐 지나가는 거리들을 구경하던 진혁이 핸드폰 소리에 전화를 받았다.
한상국이었다.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닙니다. 혹시 정 사장님 연락을 받으셨습니까?
“아니요. 무슨 일이 있답니까?”
-그건 아닌데, 며칠 전에 찾아와서 회장님께 급히 보고를 드릴 일이 있다고 했었거든요. 제 컴퓨터로 직접 자료를 첨부해서 메일까지 보냈는데. 그때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게, 몸이 영 안 좋아 보이셔서 병원에 가 보시라고까지 했습니다.
“음……. 제가 연락해 보겠습니다.”
-저도 연락해 봤는데 안 받으십니다. 아무래도, 어? 이거 뭐야. 안 돼!
갑자기 수화기 건너에서 들리는 한상국의 다급한 외침에 진혁이 놀라 소리쳤다.
“한 사장, 한 사장!”
하지만 이미 전화는 끊겼는지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급히 몸을 앞으로 하며 운전기사에게 차를 돌리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때 진혁의 눈에 저 멀리 반짝이는 뭔가가 보였다.
등줄기를 타고 싸늘하게 전기가 흘렀다. 저격 총의 스코프가 반사되면서 일으키는 빛이었다.
테러가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이 중동이었다.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그림이 있었다.
일본 여자 관광객과의 이상한 두 번의 만남. 갑작스럽게 귀국한 정호영. 그리고 이상한 행동.
한상국의 비명.
“돌려!”
진혁은 말뿐이 아니라 기사를 어깨를 잡아 한쪽으로 당겼다.
탕!
총 소리와 함께 머리에 큰 충격을 받은 진혁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 *
들판이었다.
사랑스러운 혜주가 깔깔거리며 날아다니는 민들레 꽃씨를 잡겠다며 뛰고 있었다.
지민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혁의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민이 건네준 사과 조각을 베어 물고 다시 시선을 돌린 진혁이 놀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혜주의 뒤에서 시커먼 괴물이 나타나 덮쳐오고 있었다.
“혜주야!”
진혁이 소리치며 달려갔다. 하지만 괴물이 더 가까이 있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괴물이었다.
정호영과 이름 모를 일본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 괴물이 혜주를 덮쳤다.
“안 돼!”
* * *
벌떡 일어난 진혁은 낯선 광경에 어리둥절했다.
“정신이 든 거야?”
“희준아, 여긴…….”
“진혁아, 이 자식아! 으허허엉…….”
희준이 갑자기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하얀 벽과 형광등, 알코올 냄새.
병원이었다.
그제야 진혁은 자신이 저격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전히 울먹이는 희준을 억지로 떼어 놓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기억 안 나?”
“저격당한 것까지는 기억나. 그다음은…….”
“의사가 천운이래. 운전기사가 먼저 맞는 바람에 탄환의 속도가 줄어 치명상을 피한 거래. 하지만 이곳 의료 수준으로는 머릿속에 박힌 총알을 제거하는 것까지는 어렵대. 제거 수술은 한국에서 받으라고 했어. 5일 만에 깨어난 거야.”
천운이었다. 그리고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진혁이 무언가를 떠올리고 급히 물었다.
“알라딘은? 알라딘은 어떻게 됐어? 마지막에 한 사장과 통화했었는데 다급한 소리만 들리고 끊겼었어.”
“디도스 공격이 시작됐던 때였나 보다.”
“디도스 공격?”
“불특정 다수의 컴퓨터가 알쇼핑 서버를 공격했어.”
“그런데?”
“…….”
희준을 답을 하지 못했다. 아니, 눈길도 마주치지 못했다.
진혁이 굳은 얼굴로 다시 물었다.
“못 막았냐?”
“못 막은 정도가 아니라 서버의 대부분이 파괴당했어.”
“개자식들. 내가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반드시 복수한다.”
“…….”
“지금은 상황은 어떤데? 백업 데이터로 정상 가동 된 거지?”
이번에도 답을 못하고 시선을 피하는 희준의 모습에 결국 진혁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터졌다.
“야, 이 자식아! 상황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거 아니야?”
“의사가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어. 그러니 흥분하면 안 돼.”
“알았어. 빨리 이야기나 해.”
“서버만 파괴된 게 아니야. 회원 정보가 통째로 유출됐어.”
“뭐?”
“성난 회원들이 세계 곳곳에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고 있어. 검찰이 들이닥쳐 알라딘의 모든 재산을 동결하고, 경찰은 조사를 핑계로 복구는커녕 사무실에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한대. 알라딘 서버는 망가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공격이었다.
철저하게 당했다.
진혁이 침묵하자 다시 희준이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우리 어쩌냐? 네가 깨어나면 바로 조사해야 한다며 밖에서 경찰들이 지키고 있어.”
“혜주는?”
“지민 씨가 일부러 인터넷이고 TV 선이고 다 끊어 버렸대. 처음에는 칭얼거리다 지금은 잠잠하대. 네 걱정을 많이 한다더라. 얼른 조사받고 한국으로 돌아가서 수술받자.”
“그건 안 돼.”
진혁은 냉정하게 머리를 저었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희준이 기겁하며 말렸다.
“의사가 무조건 안정을 취하라고 했어. 무리하게 움직이다 머릿속 총알이 뇌 세포를 손상시키기라도 하면 평생 불구로 살지도 모른다고 했단 말이야.”
“가서 수술받고 나아지면 편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던?”
“……!”
희준이 그제야 진혁의 생각을 알아챘다.
한국에서 가면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알쇼핑 서버 파괴에 따른 피해는 새 발의 피였다.
고객 정보가 일부도 아닌 전부가 유출되는 바람에, 손해 배상 금액은 역사 이래 최고 금액이 될 거라는 게 일반적인 평이었다.
세계 최대 가스전 지분을 가진 진혁도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희준이 물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든 해 봐야지. 어떻게든…….”
진혁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은 맞지만 대책이 없었다.
몸은 망가졌고 모든 것을 잃었다.
결국 진혁은 침대에 무너지듯 다시 누웠다.
희준이 다시 눈물이 글썽이며 그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봤다. 눈을 감은 진혁의 눈가에도 이슬이 맺혔다.
딸에게 못다 해 준 것이 한이 되어 어렵게 과거로 돌아왔다.
목숨을 여러 번 걸어가면서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한순간의 안일함이 모든 것을 망가트려 버렸다.
자신이 망가진 것보다 남아 있을 지민과 혜주에게 너무도 미안했다.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돌아오지 말 것을.
맺혀 있던 눈물이 흐르는 느낌에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 돌아누웠다.
그때 목에 걸려 있는 이물질이 느껴졌다.
베송이 얀느를 위해 만든 마법 펜던트 중 하나!
갑자기 진혁이 눈을 번쩍 뜨면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여기서 나가야겠다.”
“뭐? 그건 안 돼. 움직이면 위험하다고 했단 말이야.”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죽기는 마찬가지야. 그 전에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다.”
“하지만…….”
“내가 국내 영업부로 옮긴다고 했을 때 네가 그랬잖아. 할 때까지는 해 봐야 하는 것 아니냐고. 포기는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다고.”
“…….”
“이번에도 해낼 거야. 가족을 위해서도 반드시. 희준아, 한 번만 더 도와주라.”
진혁의 간절한 눈빛이 통했는지 희준이 마음을 바꿨다.
“알았어. 그런데 바깥에 베트남 경찰이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나가려고?”
“네가 잠깐만 그들을 막아 줘. 난 창문을 통해 빠져나갈게. 밖에서 만나 같이 움직이자.”
“알았어.”
두 사람은 먼저 침대 시트를 찢어 밧줄부터 만들었다.
다행히 3층밖에 안 됐다.
창틀에 밧줄을 걸고 진혁이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희준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헤이,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영어가 통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희준은 그러건 말건 되는 대로 지껄였다. 시간이 벌기 위해서였다.
얼마간 떠들던 희준이 배를 움켜쥐고 말했다.
“아임 헝그리. 배고파. 먹을 것.”
희준이 손가락으로 음식을 입으로 떠넘기는 시늉을 하자 그제야 경찰들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퀵클리. 빨리 올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한 희준이 느긋한 걸음으로 복도를 통과해 모퉁이를 도는 순간 빠르게 계단을 내달렸다.
병원 입구를 벗어나는 순간 위에서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들렸지만 뒤도 안 돌아보고 냅다 달렸다.
* * *
두 사람이 다낭 바니산의 주차장에 도착한 것은 다음 날 오후였다.
렌터카에서 내린 진혁은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머리에 두른 붕대를 감추기 위해 모자까지 눌러 쓰고 있었다.
희준이 물었다.
“여긴 왜 온 건데?”
“확인할 게 있어.”
적당히 대답한 진혁이 걸음을 빨리 했다.
아무리 희준이라도 밝히지 못할 비밀이었다. 게다가 그 선물 가게가 아직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전의 가게를 찾아갔지만 그곳은 다른 기념품 가게로 바뀌어 있었다.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끊기자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에 진혁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야, 안 되겠다. 다시 병원으로 가자.”
희준이 얼른 부축해 끌고 가려는 것을 진혁이 억지로 막으며 말했다.
“잠시만. 한 가지만 물어보고.”
선물 가게 종업원은 다행히 영어가 가능했다.
하지만 최근에 일하기 시작해 전에 이곳에 다른 가게가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멍하니 서 있는 진혁을 희준이 다시 잡아끌었다.
“죽더라도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자. 여기서 객사할 수는 없잖아.”
이번에는 진혁도 저항을 포기했다.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입구로 나오는데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깃발을 든 중국 단체 관광객들이 들이닥쳤다.
여기도 중국세가 득세하고 있었다.
결국 그들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잡상인들이 길가에 조잡한 선물들을 길에 펼쳐놓고 팔고 있었다.
드르르르르.
희준의 팔에 끌려가던 진혁은 갑자기 목걸이가 진동하는 느낌에 얼른 잡힌 팔을 뿌리쳤다.
“잠깐만.”
“왜 또?”
“잠깐만.”
진혁은 얼른 목걸이를 풀어 손에 쥐고 진동이 이끄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노점상 한 귀퉁이에 그토록 찾았던 기억 속의 노인이 있었다.
아니, 지금은 중년 남자였다.
진혁이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어르신!”
“뉘슈?”
중년 남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의아해 하던 진혁은 아차 싶었다. 다른 시간대로 온 거다.
중년 남자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안 진혁은 품속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혹시 이와 비슷한 물건 없습니까?”
“어? 그건 내가 가진 것과 비슷한데……?”
중년 남자가 뒤에 놓인 가방을 뒤집어 고물들을 쏟아냈다. 여기저기서 모은 것이라 온갖 장신구가 마구 뒤섞여 있었다.
진혁은 목걸이에 공명하는 제품만 골라냈다.
다이아몬드 반지, 루비 팔찌, 사파이어 귀걸이.
베송의 나머지 마법 펜던트들이었다.
그 모습에 중년 남자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허어, 정확히 사르네 제독 가문의 물건만 골라내네. 듣기로는 사르네 제독의 딸이 인형에 걸었던 것이라고 했는데.”
진혁이 골라낸 물건은 때가 타고 긁혀서 남이 보면 볼품이 없었다.
아마 중년 남자도 그래서 가짜 보석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하긴 어린아이의 인형에 걸려 있던 것이니 가짜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했다.
“전부 얼마입니까?”
“……알아서 주시구려.”
진혁이 지갑에 있는 백 달러 지폐를 집히는 대로 꺼내 중년 남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중년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맙수. 정말 고맙수.”
중년 남자의 인사를 받으며 그곳을 벗어나자 희준이 한 소리 안 할 수가 없었다.
“다 해 봤자 백 달러 한 장이면 되겠구만, 무슨 고물을 천 달러도 넘게 주고 사냐?”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거야. 가자.”
이번에는 오히려 진혁이 희준의 팔을 잡아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