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어게인 회귀
끌려가던 희준이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 주차장은 저쪽이야.”
“여기까지 왔는데 케이블카는 타 봐야지.”
다시 발걸음을 돌려 건물로 들어갔는데, 아까 들이닥친 중국 단체 관광객들 때문인지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이 많았다.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와 좀처럼 줄지 않은 대기 줄에 진혁은 빠르게 지쳐 갔다.
핏기 하나 없는 파리한 안색에 희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 얼굴이 너무 안 좋다.”
“걱정 마. 버틸 만해.”
일부러 태연스럽게 말했지만 진혁도 자신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고 돌아설 수는 없었다.
진혁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전에 먹었던 독약을 구하지 못했다.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럴 시간마저 없었다.
어떻게든 그때 상황을 재현해야 했다.
지난번처럼 30년까지 돌아가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한 달 전으로만 돌아가도 상관없었다.
잠시 진혁의 모습을 노려보던 희준이 고난을 자처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앞줄의 중국인들을 상대로 양보를 받아내며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선뜻 양보해 주는 이들도 있었지만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이 더 많았다.
그럴 때마다 희준은 몇 번이고 고개가 땅에 닿을 정도로 숙였다.
희준의 절박한 행동과 진혁의 병색이 완연한 모습에 겨우겨우 양보를 받아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그래도 케이블카를 탈 때까지는 한 시간이나 걸렸다.
얼마나 허리를 굽혔는지 땀을 비 오듯이 흘리는 희준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진혁이 말했다.
“고맙고 미안하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안 돼서 미안하다. 그때 너 대신 내가 약속 장소에 나갔어야 했는데.”
“쓸데없는 소리 마. 지현 씨와 배 속의 아기만 생각해. 그게 네가 제일 먼저 걱정할 일이야.”
진혁이 일부러 차갑게 말하고 도착한 케이블카에 탔다.
자신이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모른다.
아니, 실패할 확률이 더 높았다.
사실 자신도 지금 하는 짓이 미친 짓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판이었다.
그래도 해 봐야 했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해야 했다.
지민이, 혜주, 어머니, 아버지, 희준이, 알라딘 식구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케이블카가 출발하자 진혁은 양손을 주머니 속에 넣어 오늘 산 마법 펜던트를 꼭 움켜쥐었다.
팔찌는 오른손, 귀걸이와 반지는 왼손에 있었다.
같이 탄 중국 관광객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놀라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진혁과 희준은 침묵만 지켰다.
두 사람 모두 이게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운무 구간에 들어서자 진혁이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신이 있다면 제발 한 달만, 딱 한 달 전으로만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진혁은 손가락으로 마법 펜던트 표면을 빠르게 문질렀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대로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진혁의 손놀림이 점차 거칠어졌다.
하지만 여전히 변화는 없었다.
운무가 옅어지는 느낌에 진혁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안 돼. 제발. 제바알. 윽…….”
간절히 빌던 진혁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너무 거칠게 손을 놀리다 보니 귀걸이의 날카로운 핀에 손가락이 찔리고 말았다.
피가 흘러내려 귀걸이에 박혀 있던 사파이어를 적셨다.
“진혁아,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운무 저편에서 다급히 소리치는 희준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진혁은 정신을 잃었다.
* * *
눈을 뜬 진혁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왜소한 동양인 청년의 얼굴이었다.
가슴에 올라타서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청년이 눈을 뜬 진혁을 보고 놀라 물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긴…….”
주변을 둘러본 진혁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지난번 회귀했을 때는 과거의 한국으로 돌아가 있었는데.
유럽에 온 듯한 이국적인 풍경의 성들과 동남아 청년…….
‘결국…….’
얼른 가슴에 내려온 청년이 말했다.
“여긴 바나힐 산 정상의 테마 파크입니다. 케이블카 안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계셔서 놀랐습니다.”
청년은 아르바이트 학생이었다.
힘없이 일어난 진혁은 정신 나간 표정으로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고 그곳을 나섰다.
자신의 계획은 실패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었다.
정처 없이 걷던 진혁이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소리쳤다.
“희준이는? 희준아.”
함께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온 희준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두리던거리던 진혁의 눈에 케이블카 건물 입구 위에 걸린 전자시계의 날짜가 들어왔다.
10월 17일.
“……!”
실패한 것이 아니다.
과거로 돌아왔다. 한 달 전이 아니라 보름 전으로.
지난번 같이 장소 이동은 없었지만 시간은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야호!”
진혁은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올리고 크게 소리쳤다.
머리에 감고 있던 붕대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옷도 화려한 등산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기뻐하던 진혁의 표정이 다급하게 바뀌었다.
보름 전이면 놈들의 공격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말이었다.
대비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진혁은 서둘러서 케이블 탑승장으로 달려가며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소장님, 접니다.”
-어쩐 일이십니까?
“일전에 말씀하신 실리콘 벨리에 창업한 화이트 해커 제자에게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대기해 달라고 하십시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막무가내로 그러는 것은 좀…….
“무조건 그렇게 하라고 하세요. 본인뿐만 아니라 팀 전체를 불러들이라고 하세요. 그에 따른 비용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하세요.”
-…….
“알라딘의 존망이 달려 있단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평소와 다르게 흥분한 채 소리까지 지르는 진혁의 행동에 구필준이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서둘렀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알라딘의 서버를 열어 주고 철저히 살펴보라고 하십시오.”
-예?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철저히, 아주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펜타곤의 서버를 뚫을 때의 마음으로 샅샅이 조사하라고 하세요.”
-…….
“제가 지금 한국으로 가니까, 만약 뭐라도 발견하면 그에 대한 대책도 생각해 보라고 하십시오. 제대로 조사하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할 거라는 말도 하고요.”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진혁은 택시를 타고 곧장 공항으로 달려갔다.
‘시간이 없어. 놈들의 교묘한 공격을 막으려면 일분일초도 아껴야 해.’
* * *
인천 공항에 도착해 출국장을 나서자 희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너 인마, 잠깐 바람 쐬러 간다고 해놓고 베트남은 언제 간 거야?”
“희준아!”
진혁이 거칠게 끌어안았다.
끝까지 함께해 주고, 힘들어하는 자신을 위해 수십 번도 더 고개를 숙여준 고마운 친구였다.
하지만 그건 진혁의 맘이었고, 희준은 아니었다.
“이 자식이 뭘 잘못 먹었나.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나 임자 있는 몸이라고. 아, 좀 떨어져.”
밀어내려고 했지만 진혁은 힘이 그 보다 더 셌다.
주변의 관광객들이 두 사람의 희한한 모습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결국 보안 요원이 다가왔다.
“공공장소에서 지나친 애정 행위는 삼가 주십시오.”
희준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운전하면서 희준이 투덜거렸다.
“내가 너 때문에 이제 쪽팔려서 해외에도 못 나가겠다.”
“반가우면 그럴 수도 있지.”
“아무리 반가워도 남자들끼리는 말로 하거든.”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과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이렇게 웃으며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아, 좋다!”
창문을 활짝 열고 크게 소리치는 진혁의 모습에 희준의 얼굴이 다시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 자식, 오늘 왜 이래?’
그러나 알라딘 빌딩에 도착한 진혁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희준이 물었다.
“무슨 일이기에 은밀히 모이게 한 거야?”
“올라가서 이야기하자.”
평소와 다른 묵직한 목소리에 희준이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소회의실로 가자 네 명이 모여 있었다.
AK 고용준 회장, 알쇼핑의 한상국 사장, 알라딘 연구소의 구필준 소장. 그리고 국정원의 김상균 차장까지.
그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한쪽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에 실리콘 벨리가 연결되어 있었다.
구필준이 소개했다.
“BLC의 빈센트 사장과 팀원들입니다.”
“서진혁입니다. 갑작스런 요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돈만 두둑이 주시면 됩니다.
실리주의 미국에서 자란 빈센트라 거리낌 없이 속마음을 내비쳤다.
노골적이 반응에 다들 눈살을 찌푸렸지만 진혁은 오히려 그게 편했다.
“이 일만 성공하면 평생 운영비 걱정 없게끔 지원해 드리지요.”
-휘익! 화끈한데?
빈센트 사장 뒤에 있는 팀원들이 환호했다.
진혁이 몸을 돌리고 말했다.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이곳 보완은 완벽합니까?”
“만일을 몰라 이 층 전체를 비웠습니다. 통신도 실리콘밸리와의 연결을 제외하고는 모두 끊었습니다. 안심하셔도 됩니다.”
한상국의 답변을 듣고 진혁이 모두들 차례로 둘러보고 말했다.
“지금부터 여기서 나눈 대화는 철저히 비밀로 해야 합니다. 만약 누설되기라도 한다면 이곳에 있는 분들 모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진혁의 말에 모두들 입을 다물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진짜로 놀랄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며칠 후, 누군가가 우리 알라딘 서버에 디도스 공격을 가하고 바이러스를 심으려 할 겁니다. 그리 되면 서버가 파괴되고 회원 정보가 모두 유출될 겁니다.”
모두들 경악해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맙소사!”
“그게 정말입니까?”
“어디서 얻은 정보입니까?”
진혁은 손을 들어 사람들의 질문을 막고 화면을 쳐다보았다.
“빈센트, 저희 서버는 조사해 보셨습니까?”
-예, 회장님. 현재 알라딘 서버의 방화벽은 나름 튼튼하게 구축된 것 같지만, 세계적인 전문가에게는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적의 공격에 취약합니다.
빈센트의 거침없는 표현에 한상국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한상국은 이커머스 전문가지 보안 전문 분야가 아니었다.
진혁이 그 점이 우려되어 대비책을 세우게 했지만 너무 늦었다.
말이 나온 김에 빈센트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앞으로 어떤 식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루빨리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해야 합니다. 블록체인은 보안과 신뢰를 위해 탈중앙화된 분산 전자 원장으로 관리됩니다. 데이터가 노드에 나눠 저장되어 있어 디도스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데이터 유출이 일어나도 최소화시킬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알라딘 보안망 개선 작업을 BLC에 맡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답을 하는 빈센트의 뒤로 팀원들이 두 팔을 들고 만세를 부르는 모습이 비쳤다
고용준이 말했다.
“그럼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 같군요.”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적도 평범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겁니다.
빈센트의 답변에 진혁이 몇 마디 덧붙였다.
“만약 바이러스에 트로이목마가 심어져 있다면? 막을 수 있습니까?”
-바이러스에 트로이목마를 심는 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알라딘 서버는 독립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어 범용 인터넷망을 이용한 침투가 불가능합니다.
“만약…… 내부 공모자가 있다면?”
-그러면야 당연히 가능하죠. 내부에 공모자가 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밖에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고용준이 말했다.
“그럼 내부 공모자만 잡으면 되겠군요.”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끝내선 남는 게 없지요.”
“그럼……?”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이고, 저들이 부인하면 우린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시면?”
“함정을 파고 기다려서 잡아야지요. 저들이 절대 부인할 수 없게끔.”
“그러다 방화벽이 뚫리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진혁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계획을 철저히 세워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