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같지만 다른 결말
당장 받아들여도 모자랄 판에 천진홍은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었다.
정인영과 이혼한 자신이 불쌍해서 돕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진혁이 그런 낌새를 느끼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전 사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냉정한 사람입니다.”
“인영 씨에게 여러 번 들었습니다.”
“인연은 인연이고, 사업은 사업입니다. 천 사장님이 그걸 구분 못 하시는 분이라면 방금 전 제안은 철회하겠습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천진홍은 진혁이 순수하게 사업적인 이유에서 JHC와 협력을 원하는 것을 느끼고 얼른 사과를 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전 사업에서는 냉정합니다. 알라딘은 투자를 결정하면 당당히 의견을 개진할 겁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JHC 운영 방식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인정하냐 마냐는 저나 천 사장님이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시장이 평가합니다. 성장이 정체되고 순위가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게 지금 같은 운영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방증입니다.”
“…….”
“기존 업체의 방식을 답습만 하면 절대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알라딘은 새로운 방식으로 투자를 할 겁니다.”
천진홍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래서 순순히 인정하고 조언을 구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알라딘의 투자금은 현지 출신의 신인을 발굴하는 데 써 주십시오.”
“이곳에 지사를 내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한국의 아이돌 그룹과 이곳 가수들의 호응도가 크게 차이가 나더군요. 이곳 신인 가수들을 한국의 K-POP 스타로 키우시라는 겁니다. 아이돌 그룹의 인원은 적게는 5명 정도에서 많게는 10명까지 되더군요. 그중에 일정 부분은 현지인으로 채웠으면 합니다.”
“……!”
“한류 열풍은 K-POP 스타를 동경하고 부러워하는 마음의 표출입니다. 현지 출신이라면 관객들의 감정 이입이 쉽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한국에서도 외국인이라는 이색적인 배경이 흥미를 유발할 수도 있고요.”
“좋은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적극적으로 검토해서 계획을 잡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일은 여기 오 사장이 맡아서 할 겁니다. 두 사람이 합심해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첫 투자 대상은 오늘 무대에 올라왔던 자우하리 양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큰 줄기는 잡혔고, 공연 중이라 구체적인 이야기는 천진홍과 희준 둘이 상의하라고 하고 그곳을 나왔다.
뒤따라오던 희준이 한 소리 했다.
“이런 계획이 있었으면 미리 이야기라도 해 주지.”
“여기서 결정한 거야.”
사실이었다.
공연을 보면서 자신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때쯤부터 K-POP 경연 대회가 전 세계에서 열리면서 현지의 교포나 친한파 외국인이 브라운관에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예정에 없던 천진홍과의 사업 협력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는 희준은 갑자기 떠안은 사업에 골치 아파했다.
“사업적인 부분은 천 사장보다 정인영 실장과 상의하는 게 낫지 않겠어?”
“두 사람은 지금은 남이야.”
“뭐?”
“이혼했대.”
“왜?”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자리에 앉자.”
자리로 돌아오고도 희준은 공연은 놔두고 눈을 반짝이며 생각에 잠겼다.
진혁에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을 게 뻔했다.
하지만 걱정 안 했다.
한지철이 있었다.
가십거리라면 사족을 못 쓰는 희준은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호기심으로 가득 찼다.
* * *
인도네시아를 떠나 말레이시아에 막 도착했을 때 비밀 폰으로 전화가 왔다.
한상국도 비밀 폰을 사용했다.
-정 사장이 다녀갔습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USB를 이용했습니다.
“정 사장은 김상균 차장님이 맡기로 했으니 한 사장님은 우리 쪽 일만 신경 쓰시면 됩니다. 이상은 없겠지요?”
-걱정 마십시오. 모든 준비가 끝난 데다가 BLC에서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고생하십시오.”
전화를 끊은 진혁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길 바랐는데…….
모든 게 예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 *
지난 기억에 이미 했던 일이라 예정보다 일이 일찍 끝나 싱가포르에 들러 파노나의 티엔 사장을 만났다.
피곤하다고 해서 희준은 호텔에서 쉬게 했다.
“요즘 파노나는 어떻습니까?”
“선 회장님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고 알쇼핑의 물품들이 입점되면서 매출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직원들 모두 회장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답을 하면서도 티엔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전보다 좋아졌을 뿐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익이 나면 누구나 이 일에 뛰어들 겁니다. 자포라에서 완전 독립하고 공격적인 홍보를 한다면 금방 좋아질 겁니다. 미래를 보고 시작한 일이니 지금의 현실에 너무 부담을 느끼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현실적인 문제는 직원들에게 맡겨 두시고 사장님은 미래를 대비하셔야 합니다. 그게 경영자가 할 일입니다.”
“그래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티엔 사장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바로 답했다.
“마리아 씨가 보내 준 디자인을 검토했는데 너무 좋은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제품화만 시킬 수 있다면 고객들이 좋아할 겁니다.”
“제품화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방글라데시 공단이 완성되면 얼마든지 만들어 낼 겁니다.”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마리아 씨가 디자인한 제품은 유럽인들의 취향이라 이곳에서는 판매에 한계가 있을 것 같습니다.”
“대안이 있습니까?”
“파노나를 인수했듯이 터키의 쇼핑몰 인수를 검토해 주십시오.”
“터키요?”
“터키는 중동에서 유럽으로 가는 관문입니다. 유럽으로 팔리는 히잡의 50%가 터키에서 거래되고 있습니다.”
“좋은 정보군요. 터키 시장 진출에 대해 검토해 보겠습니다.”
진혁은 답을 하며 이곳에 들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사업가는 멈춰 있으면 안 된다.
* * *
다음 날 진혁은 마지막 목적지인 베트남으로 향했다.
하노이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안.
기내식을 먹고 화장실에 다녀온 희준이 호들갑을 떨었다.
“대박이다, 대박.”
“왜?”
“새끈이가 앞에 타고 있어.”
“백화점에 만난 일본 관광객 여자애?”
“이 자식 봐라. 잠깐 스치면서 본 애를 기억하네.”
야릇한 눈으로 바라보는 희준의 시선에 진혁은 아차 했다. 모른 척 연기하는 게 귀찮아서 먼저 이야기했더니 오해를 불렀다.
약점을 잡은 희준이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그러는 거 아니다. 천벌 받아, 인마.”
“먼저 관심을 보인 건 너거든?”
“됐다. 잠이나 잘란다.”
희준은 진짜 관심을 끊었는지 이내 잠에 빠져들어 코까지 골았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걸어갔다.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손만 씻고 화장실을 나온 진혁이 지나가는 스튜어디스에게 귓속말을 하고 준비한 돈을 찔러 넣어 줬다.
다른 좌석에 앉았다가는 제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혼자 앉아 있는 여자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다며 양해를 구했다.
스튜어디스가 뻐드렁니를 드러내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이 걸어오는 모습에 히요미는 얼른 시선을 돌리고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러나 옆자리에 누군가 앉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던 히요미의 눈이 커졌다. 자리로 돌아갔어야 할 진혁이 옆에 앉아 있었다.
“우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이상하네. 낯이 익은데……. 아, 전 서진혁이라고 합니다. 사업가입니다.”
“……히요미입니다. 법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쪽 일은 재미있습니까?”
“…….”
“재미없으신가 보군요. 타인의 인생을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단죄한다는 게 즐거운 일은 아니지요. 대화 즐거웠습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뵙지요.”
일어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진혁의 행동에 히요미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 * *
하노이 호텔에 도착해서 방에서 기다린 지 얼마 후 이춘섭이 들어왔다. 희준과도 안면이 있었다.
진혁이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말씀대로 준비를 마쳤습니다. 전문가 팀을 섭외하느라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다친 사람 없이 안전해야 합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될 듯합니다. 영화 쪽 일이지만 경험 많은 베테랑들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얼마간 더 내일의 일에 대해 상의하고 이춘섭이 돌아갔을 때는 밤이 되어 있었다.
룸서비스로 식사를 하고 나서 잠자리에 들었지만 진혁이나 희준 모두 쉽게 잠이 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음 날, 약속 시간이 되어 나가려는 진혁을 희준이 막아섰다.
“나도 따라가면 안 돼?”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잖아.”
“알아. 아는데…….”
“문제없을 거야. 그러니 걱정 말고 기다려.”
희준의 어깨를 두드리고 진혁은 방을 나왔다. 현관으로 나가자 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억 속의 인물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뭔가 다른 운전기사가 물었다.
“서진혁 회장님?”
“그렇습니다.”
“어서 타십시오.”
진혁을 태운 고급 승용차가 호텔을 빠져나갔다.
* * *
-호텔 출발.
-A3 통과.
하노이 시가지의 한 빌딩 옥상에서 무전기 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히요미가 저 멀리 언덕 쪽 도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놈이 곧 도착한다. 실수하면 안 된다.”
“문제없습니다, 대장.”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던 저격수 곤도의 당찬 말에도 히요미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비행기 안에서 느닷없이 다가온 진혁의 행동과 말이 자꾸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 무전기에서 다급한 소리가 나왔다.
-F5. 탑차가 시야를 막고 있어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
히요미가 서둘러 무전기를 잡아들고 말했다.
“당장 확인해라.”
-여전히 보이지 않습니다.
“F6 상황이 어떤가?”
-아직 도착하지……. 아, 나타났습니다. 이상 없습니다.
“휴.”
히요미의 입에서 절로 안도의 한숨소리가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려놓은 무전기에서 다시 소리가 울렸다.
-F7 통과.
“온다.”
히요미의 입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 나오자 곤도가 준비하고 있다가, 목표물이 스코프 안에 들어오자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끼이익……. 쾅!
방향을 잃은 차가 비틀거리다가 인근의 석조물을 박고 부딪혔다. 그리고 얼마 후 화염에 휩싸였다.
그 모습에 히요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놈의 죽음을 확인해야 하는데 불가능해졌다.
총을 분해해 담은 가방을 챙겨 든 곤도가 말했다.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것을 똑똑히 확인했으니 확인 안 해도 됩니다. 대장은 그 결벽증이 문제라니까.”
먼저 내려가는 곤도의 모습에 다시 한번 불타는 자동차를 바라보고 히요미도 따라 내려갔다.
곤도의 말이 맞았다.
놈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 * *
그 시간 미국 실리콘벨리의 BLC 사무실에서는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제2방화벽 손상.
AI 스피커가 내뱉는 소리에 당장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빌어먹을! 막아!”
“누군 막기 싫어서 그런 줄 알아? 이 자식들도 전문가란 말이야.”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마스터 IP 주소를 찾기 전까지는 무조건 버텨야 해.”
“나도 알아. 그러니까 제발 빨리 찾으란 말이야.”
마치 싸우듯이 떠들면서 적의 공격을 막고 위치를 역추적하고 있었다.
대단한 놈들이었다.
벌써 지구를 몇 바퀴 돌 정도로 좀비 PC만 뿌리면서 좀처럼 꼬리가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사이 방화벽이 차례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제3방화벽도 무너졌어!”
“제기랄! 빨리 방법을 찾아봐!”
“이러다 제4방화벽도 무너지겠어.”
모두들 초조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시하며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판을 두들겼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흘러가는데도 적의 꼬리가 보이지 않았다.
-제4방화벽 붕괴.
“으아아아, 어떻게 좀 해 봐!”
“이 새끼들 뭐야? 어디서 나온 놈들이지?”
“혹시 차이나? 아니……. 북한 놈들 아냐?”
“그러면 진짜 골치 아픈데…….”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는 팀원들 이마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제5방화벽 파괴.
“헐, 마지막 방화벽만 남았잖아? 오, 마이 갓!”
“빨리 해! 시간 없어!”
“조금만 더……. 조금만…….”
마지막 방화벽이 조금씩 뚫리기 시작했다.
“10초밖에 시간 없어!”
“아씨, 5초…….”
“다 뚫렸…….”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