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화. 혼돈의 시간
“마이클 창에게 중국 쪽 투자 금액을 늘리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더불어 실리콘밸리 쪽도 유망 스마트업에 대한 투자를 시작하게 하시고요.”
닛뽄 그룹 선물 투자 이익으로 자금은 충분했다.
진혁의 거침없는 지시에 야맘 사장은 놀라면서도 대답하기 바빴다.
야맘과 통화를 끝내고 일어나려던 진혁이 갑자기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스미스에게도 전화를 걸어 줘야 했다.
“닛뽄 그룹에 투자한 것을 정리했습니다.”
-이제 오르는 겁니까?
“그러기에는 너무 망가졌지요. 그렇다고 더 떨어지지도 않을 겁니다만, 계속 자금을 묶어 둘 이유가 없어서 정리한 겁니다.”
-우리도 회장님과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만간 미국에 들릴 일이 있는데, 그때 편하게 뵙지요.”
-연락기다리겠습니다.
스미스가 공손히 말하고 끊었다.
정확한 규모는 모르지만 그 역시 큰 수익을 냈을 것이다.
뿌듯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놓고 식은 커피를 마시고 일어난 진혁이 화들짝 놀랐다.
바로 뒷자리에 김세동이 있었다.
“언제부터 거기에 앉아 계셨던 겁니까?”
“오 서방이 쇼다 대신을 데리고 들어올 때 따라 들어왔네.”
“……!”
대통령 특별 보조관인 김세동이 인접국 중요 인사의 얼굴을 알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쇼다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대체 자네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것인가?”
“사업적인 일입니다. 아버님은 모른 척해 주십시오.”
“단순히 사업적인 일에 내각 대신이 직접 찾아와 무릎을 꿇는 일은 없네. 김 차장은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시치미를 떼더군. 자네와의 의리 때문에 함구하는 것 같은데, 그놈은 보고할 의무가 있는 자리에 앉아 있어. 나중에 개입된 사실이 밝혀지면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네.”
“……말씀드리겠습니다.”
김세동의 설득에 진혁이 마음을 굳히고 맞은편에 앉았다.
어차피 이쯤에서는 밝혀도 무방했다.
그리고 김상균이 다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진혁은 그간의 일을 최대한 간단하게 개략적으로만 들려줬다. 그것만으로도 김세동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닛뽄 그룹은 일본의 자존심이네. 정부에 일언반구도 없이 그들과 전쟁을 벌이는 게 말이 되는가?”
“저들이 먼저 공격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말씀드렸으면 정부에서 막아 줬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으음…….”
“오히려 부담만 드렸을 겁니다. 그래서 제 선에서 처리한 것입니다. 기업 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만,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나서서 항의하면 우리 정부에서도 대응할 수밖에 없어.”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쇼다 대신이 이곳이 아닌 청와대를 찾아갔겠지요.”
맞는 말이었다.
진혁에게 와서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저항을 포기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김세동의 얼굴은 여전히 펴지지 않았다.
“자네가 쇼다 대신에게 요구한 내용도 들었네. 어느 것 하나 외교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더군. 우리 정부에서도 이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 해. 아무래도 돌아가서 보고를 드려야 할 것 같네.”
“김 차장님을 만나 함께 들어가십시오. 제가 전화드려 놓겠습니다.”
“알겠네. 대통령께 따로 전할 말은 없는가?”
“이번 기회에 일본과의 해묵은 과제를 푸시면 될 겁니다. 거대 중국은 우리의 힘만으로 상대할 수 없습니다. 일본과 함께 공동 전선을 구축해야 할 겁니다. 그렇게 전해 주십시오.”
“그리 전하지. 고생했네.”
김세동이 일어나 진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떠났다. 이유가 어떻든 한국 정부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날 김세동은 급히 한국으로 돌아갔다.
* * *
다음 날, 일본 총리가 직접 담화문을 발표했다.
닛뽄 그룹에 대한 조사 결과 세금 포탈, 외화 밀반입 등 중대한 범죄 사실이 드러나 이에다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을 구속 수사할 것임을 밝혔다.
아울러 최근 경색된 한일 관계를 이유로 한국 정부에 전향적인 제안을 했다.
위안부와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한 양국간 재협상을 제안하고, 자신의 임기 중에는 독도 영유권 주장을 하지 않고 신사 참배도 미루겠다고 했다.
이에 일본 언론과 극위 단체에서 맹비난을 했지만 총리실은 어떠한 논평도 내놓지 않았다.
그에 반해 한국 언론과 국민들은 환영 일색이었다.
권성일 대통령도 즉각 기자 회견을 열어 일본 정부의 진일보한 태도에 환영을 나타내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눈치를 보며 모른 척했던 ‘소녀상’ 건립에 대해 적극 지지할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일본 국민의 충격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다윗이 골리앗을 삼키다!’
일본 신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머리글이었다.
도이에 중공업 인수 실패로 극심한 내홍을 겪으며 일본 자동차 업계 5위로 추락한 다에쓰 자동차가 업계 1위의 닛뽄 자동차를 인수한 것에 다들 의아해하며 놀랐다.
그날 이에다 회장이 입원해 있던 병실에서는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일본 경제를 받치고 있던 기둥의 허망한 말로였다.
* * *
휴가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진혁이 첫 출근을 했는데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국정원 김상균 차장이었다.
진혁이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여러 가지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회장님이 먼저 풀어 주셔서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그럼 다 잘된 일인데 아침 일찍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정 사장님 때문입니다.”
진혁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작전 시작과 동시에 김상균이 정호영의 신변을 확보하기로 되어 있었다. 지금쯤 국정원에 붙잡혀 있을 것이다.
진혁이 싸늘하게 말했다.
“원칙대로 하세요. 증거는 충분하잖습니까.”
“그게…… 상황이 좀 묘합니다.”
“태후 그룹의 눈치를 보시겠다는 겁니까?”
진혁의 싸늘한 호통에 김상균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지금은 재벌 눈치를 보던 이전 정권과는 다릅니다. 거기에 아무리 태후라도 회장님 뜻을 거스르는 것은 있을 수 없지요.”
“그럼 뭐가 문제입니까?”
“직원들이 호텔방을 덮쳤을 때 정 사장이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더군요. 자살하려던 모양이었습니다.”
“자살요?”
“즉시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처치를 받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이게 현장에 놓여 있던 유서입니다.”
김상균이 내미는 종이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결국 집어 들었다.
초반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적혀 있었다.
나머지 절반은 진혁과 김연희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채워져 있었다.
군데군데 얼룩이 져 있는 게 눈물 자국 같았다.
“빌어먹을.”
결국 진혁은 욕설을 내뱉으며 유서를 내려놓았다.
백번 양보해서 최소한 자신을 찾아와 상의는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놈들이 김연희를 잡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혁에게 김상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 직원들이 김 소장님도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깔이 보통이 아니시더군요. 면회를 막았더니 이제는 회장님을 뵙겠다며 고집을 부려서 난감한 상황입니다.”
“…….”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생각할 시간을 하루만 더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김상균이 돌아가자 진혁은 인터폰으로 커피 한 잔을 더 부탁했다. 소태를 씹은 것 이상으로 입 안이 썼다.
김연희 소장은 자신의 약속만 믿고 사표까지 내고 혼자서 로힝야를 2년도 넘게 지켜 준 고마운 이였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AS는 정호영이 있었기에 만든 조직이었다. 이영석이 있지만 아직은 그룹을 관리할 역량은 되지 못했다.
그를 대신할 인물이 마땅치 않았다.
진혁의 고민은 구필준 소장의 등장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구필준의 얼굴은 활짝 펴져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회장님.”
“오히려 소장님이 고생하셨지요. BLC를 끌어들인 것은 신의 한 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미국은 실리주의입니다. 제 소개가 있었다지만 빈센트가 회장님을 선택한 겁니다. 이번 일을 겪고 회장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알았는지, 미뤘던 투자도 받아들이겠답니다.”
5억 달러에 지분의 45%를 넘기는 조건을 제안했었다.
“잘됐군요. 데이터 분석은 끝났습니까?”
“그게 아주 대박이었습니다. 역시 일본이었습니다. 우리가 보유한 기술보다 훨씬 뛰어났습니다. 덕분에 연구원들이 아주 신이 나 있습니다. 집에 가지도 않고 분석에 매달려 있습니다.”
“장기전이 될 겁니다. 무리하면 안 됩니다. 추가 인력 확보를 서둘러 주십시오.”
“그것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전에 접촉했을 때 거부했던, 실리콘밸리에 나가 있는 한국인 출신 기술자들이 이제 와서 아직도 영입이 가능한지 문의가 옵니다.”
“그래요?”
놀라 묻는 모습에 구필준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BLC 쪽에서 이야기가 흘러나간 모양입니다. 소문이 빠른 곳이거든요.”
“좋은 일이군요.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얼마든지 영입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연구소가 포화 상태입니다.”
“벌써요?”
“도이에 중공업 R&D 연구소에서 대규모 인력을 파견했습니다. 거의 분소를 차리겠다는 의도 같습니다. 덕분에 함반토타 항 운영 시스템 분석도 예상보다 빨라질 것 같습니다. 한 달 정도 후면 가동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부 정책을 핑계로 기술 이전에 소극적이던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쉬쉬하지만 그쪽도 우리가 닛뽄 그룹의 기술을 확보한 걸 눈치챈 모양입니다. 다른 기술도 그렇지만 전기차와 자율 주행차 관련 기술에 욕심이 나는 모양입니다. 이륜차의 신 모델을 개발 중이라고 하더니 거기에 적용시킬 모양입니다.”
“좋은 일이 많았군요. 같은 알라딘 식구이니 적극적으로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답답하기도 합니다. 어렵게 획득한 자료인데 다시 일본 업체에 넘겨주고 있으니. 국내 자동차 업체들에게 아주 유용한 자료인데…….”
구필준의 말에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방금 전까지 머리를 어지럽혔던 문제들을 풀 해결책이 떠올랐다.
진혁이 말했다.
“그 문제는 제가 따로 고민해 보겠습니다. 우선 연구소는 규모를 넓힐 게 아니라 차라리 따로 건물을 마련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별도로요?”
놀라 묻는 구필준에게 진혁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보안의 중요성을 절감했습니다. 획득한 기술뿐만 아니라 앞으로 연구진이 개발한 기술까지 합쳐지면 노리는 곳들이 많을 겁니다.”
“맞습니다. 한국에서 4차 산업 관련 기술은 우리가 제일 앞서 있습니다.”
“연구진도 편하게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고 보안에도 유리한 별도의 연구소로 가는 게 맞습니다.”
진혁의 계획에 구필준이 우려를 나타냈다.
“맞는 말씀입니다만, 그런 시설은 건축하는 데만도 꽤 걸릴 텐데요?”
“그쪽 전문가가 있으니 걱정 마시고 소장님은 기술 개발과 인력 확보에만 신경 써 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회장님이 직접 맡아 주신다니 안심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구필준도 이제 완전히 진혁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 * *
진혁은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편하게 누워 TV를 보고 있던 정호영이 놀라 얼른 몸을 일으켰다.
“팔자가 아주 좋으십니다.”
“요즘 TV를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콧대 높게 굴던 일본 놈들이 연일 카메라 앞에 나와 고개를 숙이며 사과만 하고 있잖습니까.”
“퍽이나 좋으시겠습니다.”
비아냥거리는 진혁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침대 옆 의자에 앉고 진혁이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잘못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지요.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짐승만도 못한 짓을 저질렀으니까요. 목숨으로 대신하려고 했는데 그럴 복도 없는 인생인가 봅니다.”
“…….”
“저 같은 놈은 잊고 앞만 보십시오. 세계 곳곳에 회장님의 손길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 감옥에서 속죄하면서 살겠습니다.”
진혁은 정호영의 얼굴에서 나흐얀 이맘의 모습을 보았다. 세상의 물욕을 초월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내내 괴롭혔던 정호영에 대한 배신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대로 인정하고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정 사장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무책임하신 분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