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김선혁을 얻다
“……?”
“그렇게 다 포기하고 떠나면 끝입니까? 자고로 사내라면 최소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책임지고 감옥에 가겠다는 겁니다. 그 이상 제가 어떻게 책임을 집니까?”
“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 소장님은요?”
“……!”
“내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당신을 믿고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당신과 함께하기로 한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 믿음을 배신한 죄는 감옥에 간다고 없어지는 게 아닙니다.”
정호영은 말을 하지 답을 하지 못했다. 일부러 지었던 편한 표정도 어느새 사라지고 잔뜩 일그러져있었다.
진혁은 자신의 기대대로 위기를 모면함은 물론 놈들을 더 크게 혼내 줬다.
하지만 김연희는 아니었다.
그녀를 구해 주긴 했지만 결말은 이별이었다.
진혁이 일어났다.
“AS의 모든 지위를 거두고 인연을 끊는 것으로 더 이상 책임은 묻지 않겠습니다.”
“회장님.”
“당신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 아닙니다. 김 소장님 때문입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책임을 회피하지는 마십시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진혁이 다시 한번 냉정히 말하고 병실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에는 국정원 직원이 데리고 온 김연희가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호영 씨…….”
김연희는 진혁의 사과는 받지 않고 바로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진혁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안타까운 결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손에서 떠났다.
두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진혁은 오랜만에 태후 빌딩으로 갔다.
미리 면담 약속을 해서인지 정인영이 직접 로비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계세요.”
“갑시다.”
잔뜩 굳은 진혁의 모습에 정인영은 감히 용건을 묻지 못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정진호 회장도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제 서진혁은 자신보다 훨씬 더 높은 위치까지 성장해 있었다.
그 마음은 자리에 앉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정진호는 상석을 놔둔 채 정인영과 함께 맞은편에 앉았다.
진혁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정 사장님은 조만간 돌아오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정진호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세계에 뻗어 있는 알라딘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태후는 한국에서는 1, 2위를 다투는 기업이었다.
정호영이 국정원에 잡혀 있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다만 그 이유가 알라딘 그룹 내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킨 것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최근 일본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 소식에 혹시나 이전처럼 진혁의 일을 방해하다가 문제가 생긴 게 아닌가 걱정만 하고 있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오늘 회장님을 뵙자고 한 것은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말씀하십시오.”
“닛뽄자동차가 망하기 전에 기술 이전을 받았습니다. 전기차는 물론 자율 주행차에 대한 기술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정진호는 물론 정인영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극비 기술이라 절대 이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였다면 헛소리라 치부하겠지만 상대는 진혁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진호의 눈이 번들거렸다.
태후 자동차도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차세대 자동차 기술 개발에 매진했지만 결과는 지지부진한 상황이었다.
태후 자동차가 문제가 아니라 기초 과학 분야 국내 기술자가 턱없이 부족하니 당연한 결과였다.
미국과 일본에 1년 가까이 뒤처져 있었는데 그 공백을 단숨에 만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고마운 마음에 저절로 허리가 숙여지는 것을 억지로 막으며 정진호가 물었다.
“알라딘이라면 직접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서 진행하셔도 될 텐데요?”
“그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역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세월의 기업들은 문어발식 확장으로 덩치를 키우는 게 승자가 되는 길이었다면,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기술과 전문성이 없으면 사상누각입니다.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태후를 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료는 얼마 정도 생각하시는지요?”
“전 돈 대신 다른 것을 받고 싶습니다.”
“예?”
“태후 화장품을 넘겨주십시오.”
“화장품을요?”
정인영이 놀라 물었다.
의외의 제안이었다.
태후 화장품은 지금 그룹 내에서 계륵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실적 부진으로 적자만 쌓여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없는 게, 차기 회장이 유력한 정인영이 직접 분사해서 설립한 회사라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인영이 물었다.
“지금 태후 화장품이 어떤 상황인 줄은 알고 계세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수하시겠다고요?”
“동남아시아는 물론 서남아시아의 사업을 크게 확대할 생각입니다. 한류 열풍의 최대 수혜 품목 중에 하나가 화장품입니다. 충분히 그만한 값어치는 하게 될 겁니다.”
정인영의 시선을 받은 정진호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크게 반길 일이었다.
정진호가 막 승낙을 하려는 순간 진혁이 먼저 입을 뗐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후 화장품과 자동차 신기술은 가치 차이가 너무 납니다.”
“……따로 원하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있습니다만 물건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
“김선혁 부사장님을 알라딘으로 옮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정진호의 눈이 커졌다. 설마 진혁이 김선혁을 원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됐다.
진혁의 가치를 처음부터 알아봐 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 때문인지 진혁도 김선혁이 나선 일에는 양보를 해 줬다.
정진호는 물론 정인영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들 역시 김선혁은 놓치기 싫은 인재였다. 하지만 자동차 신기술만큼은 아니었다.
거기에 정호영이 돌아온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서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설득하지요.”
“양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체적으로 얼마간 더 논의하고 양측 변호사와 실무자들이 만나 법적인 절차를 진행하기로 하고 일어났다.
엘리베이터까지 따라 나온 정인영이 말했다.
“저 이혼했어요.”
“그러셨군요.”
“언제 시간 내주세요. 식사 대접을 하고 싶어요.”
“시간 봐서 연락드리지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진혁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를 따로 볼 일은 없었다.
* * *
알라딘 빌딩으로 가서 고진무를 불렀다. 스마트 케어팜 사업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진행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인구 5만 미만에 동행 센터가 없는 곳들은 모두 신청했습니다. 그중 주민 동의까지 받은 곳은 총 열여섯 곳입니다. 그중에서 선별을 해서…….”
“선별은 필요 없습니다. 원하는 곳은 모두 진행하세요.”
“헉……. 그럼 자금이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돈 걱정은 마시고 추진하세요.”
닛뽄 그룹의 옵션 거래로 투자금은 충분했다.
고진무의 얼굴이 활짝 핀 것은 당연했다. 다들 어렵다 보니 탈락한 곳들의 상실감이 걱정이 되었었다.
“신청한 곳들 현황을 봅시다.”
“여기 있습니다.”
내역을 확인하던 진혁이 두 곳을 찍었다.
“경남 남해와 전남 고흥은 바나나로 작물을 정합시다.”
“바나나요? 재배도 어렵지만 단가 차이 때문에 수출은 불가능합니다.”
“수출할 게 아니라 내수 시장에 판매할 겁니다.”
“아이고, 그러다가 또 농민들이 반대하면 어쩌시려고요?”
고진무가 격하게 반대했다.
스마트팜 사업이 좌초된 게 내수 시장에 쏟아져 가격을 하락시킬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이걸 또 꼬투리 잡아 이번 사업도 반대할까 우려가 됐다.
진혁이 태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국내에 바나나 재배 농가가 있습니까?”
“제주에서 일부 농가가 시범적으로만 재배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맞습니다. 전량 수입하고 있지요. 바나나의 연간 수입량은 40만 톤에 금액으로 3억 달러가 넘습니다. 재배도 안 하면서 수입 과일의 국내 시장 잠식을 막겠다는 걸 반대하는 자들은 더 이상 농민이 아닙니다. 그랬다가는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진혁의 강한 의지가 있는 데다가 바나나라면 반대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고진무는 다른 걱정을 했다.
“온난화로 평년 기온이 많이 올라갔다고 하지만 난방으로 인한 생산 단가가 높아질 겁니다. 수입 바나나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일반적으로는 그렇지요. 하지만 무농약 유기농 제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아. 맞습니다. 수입 과일이 싸지만 농약과 방부제 덩어리라는 점 때문에 소비자들이 선택하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건 가격 불문하고 프리미엄 제품을 찾는 고객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쪽을 공략하면 됩니다.”
“생협에서 판매하면 될 것 같습니다. 스마트팜이 아무리 생산 능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겨우 두 곳에서 나오는 물량이면 충분히 커버가 될 것 같습니다. 회장님 덕분에 좋은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고진무는 친환경 생태농 출신이라 생협 쪽으로 인연이 깊어 금방 이해를 했다.
진혁은 동남아시아를 돌 때 한국으로 보내지는 바나나 컨테이너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이렇게 활용했다.
* * *
그날 저녁 진혁은 희준과 함께 강남의 일식집으로 들어갔다.
AK유통 무역 본부장을 맡고 있는 손민한이 기다리고 있다가 얼른 다가왔다.
“먼저 와 계십니다.”
“가시지요.”
예약된 방으로 들어가자 김선혁과 한지철이 앉아 있었다. 음식은 미리 세팅이 되어 있었다.
한지철은 엉거주춤 일어난 반면 김선혁은 앉은 채로 차가운 눈으로 바라만 봤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건 말건 진혁이 수더분하게 인사하고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다들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진혁이 술병을 들자 김선혁이 막았다.
“사업 이야기부터 마무리 짓자.”
“그건 이미 정 회장님과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자동차 신기술을 이전해 주는 대신에 태후 화장품을 받기로요.”
“거기에 왜 내가 포함된 거냐?”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다.
“방글라데시의 경제 특구 건설만 해도 작은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 전 서남아시아의 사업도 크게 확대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시작한 스마트 케어팜 사업도 반대한 농민들에게 보란 듯이 성공시켜 보이고 싶습니다. 말은 달려야 그 가치가 있다는 부사장님의 말씀을 아직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런데 제 몸은 하나밖에 안 됩니다.”
“나보고 정 사장 대신 AS를 맡아 달라는 말이냐?”
“AS는 여기 손 본부장님이 맡아 주시기로 했습니다. 부사장님은 알라딘 총괄 그룹의 고문으로 전체 사업을 조율해 주십시오. 뛰는 것은 여기 있는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모두가 부사장님께 일을 배운 후배들입니다. 옳은 길로 가는지 지켜보시면서 조언해 주십사 모셨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야기가 되지 않았는데도 진혁만이 아니라 모두가 한마음으로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김선혁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상사원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세계를 누비며 사업을 펼치는 꿈을 꾼다.
김선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무모하리만치 그 꿈을 실현하려고 발버둥 치던 진혁을 더 아끼고 지원해 줬던 것이다.
이번에 정진호가 알라딘으로 옮겨 갔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을 때 섭섭하면서 한편으로는 홀가분했다.
자신을 오랜 세월 옥죄고 있던 사슬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이들도 장성했고, 풍족하진 않지만 남에게 도움을 받지 않고 생활할 정도의 노후 자금도 마련했다.
이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김선혁이 마음을 정하고 말했다.
“네가 아무리 회장이라고 해도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그걸 기대하고 모신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알라딘 그룹들의 일에도 냉정한 비판을 해 주십시오. 제가 따로 지시는 내려놓겠습니다.”
그 이후로도 김선혁은 몇 가지 요구조건을 걸었지만 진혁은 그때마다 주저 없이 받아들였다.
그가 자신을 위해서가 AS를 위해서 하는 말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좋다. 네 제안을 받아들이마. 불러 줘서 고맙다.”
“감사합니다. 잘 모시겠습니다.”
짝짝짝.
두 사람이 악수하는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이 일제히 환영의 박수를 보냈다.
그중에서도 손민한이 가장 열심히 쳤다.
이후 술자리는 당연히 화기애애했다.
태후 상사원 시절부터 자신을 아끼고 도와 준 고마운 이들이었다.
진혁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서로 알고 지낸 사이다 보니 어색할 것도 없었다.
이제 모두 태후라는 둥지를 떠나 알라딘이란 한 울타리에 모였다.
마침내 제대로 된 진용이 갖추어졌다. 이제 알리바마건 아마존이건 제대로 한판 붙어볼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