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스마트 케어팜
다음 날.
김선혁은 그렇게 술을 마셔 놓고도 AS를 맡아 현지로 부임하는 손민한을 따라 방글라데시로 떠났다.
직접 현장을 봐야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진짜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양반이었다.
태후 화장품은 AK화장품과 합병해서 알라딘 총괄 그룹 산하에 두기로 하고 한지철을 사장으로 내정했다.
기존 황진성 사장은 부사장으로 내려앉았다.
상장된 회사라 규정에 따라 이런저런 절차를 밟아야 했는데 그건 희준에게 맡겼다.
오후에 박이동의 보고를 들은 진혁은 함께 알라딘 연구소로 갔다.
갑작스런 방문에 구필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연구소 부지를 쓸 적당한 물건을 찾았답니다.”
진혁의 눈짓에 박이동이 입을 열었다.
“정부의 국토의 균형 발전 시책에 따라 지방 이전으로 옮긴 한국식품연구원 부지입니다. 이곳과 가까운 판교 신도시와 맞닿아 있고, 확장 개발할 예정인 제2테크노밸리 바로 옆입니다.”
전전 정권에서 서울 및 수도권 집중화를 막기 위해 공공기관의 지방 이전 추진 계획을 발표했었다.
그에 따라 한국식품연구원도 전북 완주로 이전해서 기존 건물 및 부지에 대한 매각 절차가 진행 중이었다.
구필준이 반색하며 말했다.
“연구원으로 쓰던 건물이니 기기만 옮겨 설치하면 되겠군요. 감사합니다. 그 부지 크기는 얼마쯤 됩니까?”
“11만 2천 평방미터입니다. 매각 예정가는 2천억 원 정도 됩니다.”
“헉……. 너무 넓습니다.”
구필준이 기겁했다.
4만 평에 이르는 넓은 땅이었다. 거기에 매입 금액도.
진혁에게 큰 부담을 주는 것 같아 얼른 말했다.
“십 분의 일만 되어도 충분합니다.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전에 미국에 출장 갔을 때 실리콘밸리에 잠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유니온 그룹의 연구소를 구경했는데, 거의 공원 수준이더군요.”
“땅이 넓은 미국이라 가능한 일입니다.”
“미국으로 나간 인재들을 그보다 못한 환경으로 돌아오라고 할 수는 없지요. 무조건 애국심을 앞세워 설득하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알라딘 건설에서 설계팀이 방문할 겁니다. 연구원들이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게 최고의 연구소를 만들어 보십시오.”
“알겠습니다만…… 그래도 넓습니다.”
“여유 공간이 있다면 인큐베이트 공간으로 활용하십시오.”
“인큐베이트 룸까지 만드시게요?”
구필준이 다시 한번 놀랐다.
“해외로 나간 연구원들을 불러들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국내에 남아 있는 연구원들을 붙잡는 일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최고의 환경에서 스마트업을 창업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줘야 합니다. 알라딘 연구소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소장님은 대한민국의 4차 산업을 이끌어 가시는 분입니다. 한국에서도 충분히 연구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구필준이 기술자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 교육부로부터 내년부터 폴리텍 대학에 4차 산업 관련 학과를 신설했다며 강의를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KAIST에서도 박사 과정을 신설한다고 했다.
그게 모두 진혁이 시작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최고의 연구소까지 만들어 준다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었다.
* * *
다음 날, 고진무와 함께 스마트 케어팜 사업에 신청한 16개 군 전체를 사업지로 결정했다.
남해와 고흥의 재배 작물은 바나나로 결정했고, 나머지 지역들은 각기 특색에 맞춰 정했다.
발표가 나갔지만 진혁의 예상대로 자신들의 재배 작물이 아니어서인지 농민들의 반발은 없었다.
퇴근하려던 진혁이 들어서는 한상국의 모습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아마존과 알라바마를 조사하며 알쇼핑의 미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자리에 앉고 한상국이 말했다.
“계획을 세움에 있어서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뭡니까?”
“알라바마는 하이뱅크라는 인터넷 은행을 자회사로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존은 결제 대행업체를 통해 우회적으로 밴더와 고객을 대상으로 대출과 결제 업무 등 각종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조만간 인터넷 은행을 설립하겠다는 계획도 발표했습니다.”
“우리도 인터넷 은행을 세우면 되잖습니까?”
“한국에서는 은산분리법으로 산업 자본이 은행업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은산분리법은 1980년대 신군부 시절 재벌 기업이 금융기관을 사금고화하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이었다.
진혁이 어이없어했다.
“아니, 다른 나라들은 변화하는 시대에 맞춰 앞다퉈 규제를 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런 고리타분한 법 때문에 서비스를 못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권성일 대통령께서 당선되시고 이에 대한 규제 완화를 약속했는데 국회에서 야당의 거부로 무산되었습니다.”
“미친……! 마침 내일 이현국 비서실장과 점심 약속이 있는데, 그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 *
다음 날,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이현국과 점심을 같이 먹었다.
“스마트 케어팜 사업이 문제없이 마무리되어서 다행입니다.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전량 수출을 약속한 데다 수입 농산물의 시장 잠식까지 막겠다는데 반대하면 안 되지요. 이번에도 막으면 절대 가만있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서 회장님이야 사업가니 그런 식의 대응이 가능하지만 청와대는 그러지 못합니다. 소수의 목소리라고 무시했다가는 일이 일파만파로 번지는 일이 허다하거든요. 그래서 대통령께서도 자주 회장님이 부럽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현국의 말에 진혁은 권성일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대통령도 쉬운 자리가 아니었다.
이현국이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해외에서 벌인 일로 큰 도움을 받고 있어 대통령께서도 고마워하고 계십니다.”
“제 사업에 필요해서 벌인 일입니다. 너무 마음에 두시지 말라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뵙자고 한 것은…… 최근 내수 경기의 침체가 심상치 않습니다. 외국의 사업도 중요하시겠지만 국내에 대한 투자도 적극적으로 검토해 주십사 부탁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최대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이현국의 말에 진혁은 잘됐다는 생각에 얼른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투자하려고 했는데 규제 때문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어떤 규제입니까? 대통령께서는 규제개혁을 천명하고 계시니 가장 먼저 풀어 드리겠습니다.”
“인터넷 은행입니다.”
“……!”
“아마존이나 알리바마 모두 이미 인터넷 은행을 가지고 있거나 계획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은산분리법 때문에…….”
“압니다만 은산분리법 개정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진혁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현국이 굳은 얼굴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진혁도 물러설 수 없기에 말을 이었다.
“야당이 반대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건 정치적으로 풀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야당이 문제가 아닙니다. 시민 단체들도 반대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편해지고 혜택이 돌아가는 일인데 왜 막는답니까?”
“인터넷 은행보다 재벌 개혁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간 재벌이 한 형태를 보면 틀린 주장이 아니지요. 그래서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재벌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경제 주체였다.
외국 역시 대기업이 존재하지만 그들은 핵심 사업에 집중하고 전문 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은 대규모 기업 집단으로 특정 개인, 집안에 의해 지배된다.
통치 방식, 가족 간의 재산 싸움, 문어발식 기업 확장, 부패 등 봉건적 기업 운영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모든 정권이 집권 초기에는 재벌 개혁을 외쳤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들이 한국 경제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현국이 말을 이었다.
“저 역시 시민 단체와 같은 생각입니다. 서 회장님 같은 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재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인터넷 은행을 전면 허용하면 재벌의 사금고화될 가능성이 더 큽니다.”
“…….”
“우려감에 말씀드리지만 대통령께 따로 언급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아무리 서 회장님의 부탁이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부담감만 드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결국 진혁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 대통령의 고뇌를 걱정해 놓고는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결국 찜찜한 기분으로 회사로 돌아온 진혁은 한상국을 불러 이현국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무래도 당장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시지는 마시고요. 지금 방법이 없다는 것이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방법은 제가 찾아볼 테니, 사장님은 우리도 인터넷 은행을 가진다는 전제하에 계획을 세워 보세요.”
“……알겠습니다.”
힘없이 대답하며 일러나는 한상국의 모습에 진혁이 미안한 마음에 말했다.
“오늘 저녁에 특별한 약속이 없으시면 같이 술이나 한잔 합시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선약이……. 혹시 다른 사람이 함께 참석해도 괜찮겠습니까?”
“누군데요?”
“벤처 회사를 운영하는 후배인데 우리 쪽 일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회장님이 들으셔도 좋은 이야기일 겁니다.”
“그쪽만 괜찮다면 전 상관없습니다.”
“알겠습니다. 회장님도 참석하는 것으로 약속을 잡겠습니다.”
한상국이 물러났다.
일을 보던 진혁도 시간이 되자 밖으로 나와 두 사람을 강남역 인근에서 만났다.
“반갑습니다. 서진혁입니다.”
“최진성입니다. 회장님을 꼭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너무 과한 칭찬이십니다.”
“아닙니다. 저희같이 4차 산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회장님이 희망의 등불입니다. 알라딘 연구소를 세우시고 적극적으로 인재를 육성하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예약한 일식집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눴다.
최진성은 차량 공유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한 업체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4차 산업과 온라인 쇼핑몰 시장의 변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상당히 진취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한상국이 왜 같이 만나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긴장이 풀렸는지 최진성이 가슴속의 이야기를 털어놨다.
“공유 경제는 이미 피할 수 없는 세계적 흐름입니다. 세계 공유 경제 시장 규모는 2025년에는 3,350억 달러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성장 가능성이 크군요.”
“맞습니다. 차량 공유 서비스를 하는 미국과 중국의 업체 매출이 매년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안 된답니다.”
“그것도 규제로 금지된 겁니까?”
“그건 아닌데 택시 업계가 운송법 위반이라며 고발하는 바람에 서비스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얼마나 억울한지 최진성은 눈가가 벌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렵게 개발했는데 서비스가 막히자 회사는 동력을 잃어 버렸다.
“구조 조정밖에 방법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직원들을 정리해야 했습니다.”
“……안타깝네요.”
“제가 망하고 안 망하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들 뛰어난 인재들인데 꽃도 피워 보지 못하고 쓸쓸히 떠나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최진성의 울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정부의 규제와 4차 산업 관련 지원정책의 미비에 대한 성토를 늘어놨다.
급기야 한국 사회의 기술 천시 문화까지 거론되자 한상국이 입을 막았다.
“회장님 앞이다. 그만해라.”
“선배님!”
“그만하라고 했다!”
한상국의 호통에 최진성이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드는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나갔나 봅니다.”
“아닙니다.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정부의 규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당장은 아니라도 최 사장님이나 우리 같은 사람이 끝임 없이 의견을 개진한다면 언젠가는 개선되겠지요. 힘내십시오.”
진혁은 그 정도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자신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였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 진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