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터키 진출
“일할 장정이 없는 가구를 우선으로 일회에 10달러, 최대 100달러까지만 지원해 주셨으면 합니다.”
“겨우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부족하지요. 하지만 너무 넉넉하면 오히려 자립 의지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도시가 만들어지면 꼭 힘든 일이 아니라도 장사를 해서 먹고 살 수는 있을 겁니다. 그때까지만 도와주시면 나머지는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그렇게 시행해 보고 부족하면 늘리기로 하지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원받은 금액은 대출로 하십시오. 빚이라고 생각해야 무조건 지원받겠다는 심리를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담보도 받으시고요.”
이어지는 시에라의 말에 진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들 급히 빠져나오느라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다면서요?”
“맞습니다. 하지만 미얀마에는 분명 우리의 재산이 남아 있습니다. 물건은 군인들이 다 가져갔겠지만 땅은 어쩌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물론 그걸 미얀마 정부가 인정해 줄지, 또 그걸 팔아서 대출금을 갚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우리가 떳떳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음…….”
“회장님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주고 계신지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아무런 대가도 없이 받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렇게라도 해 주셔야 지원받는 이들도 미안함이 덜하고 못 받는 이들에게도 당당할 것 같습니다. 마수다 씨만 해도 미얀마에 넓은 땅을 소유하신 분입니다. 이곳으로 오지만 않으셨다면 돌아가실 때까지 남에게 고개를 숙일 일은 없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시에라의 말에 로힝야족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느낌에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가지 말을 더하고 시에라가 돌아가자 이영석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필요한 물품을 들여오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되는데, 토지를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것은 아무래도 그쪽 전문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럼 그런 사람을 구해 보세요.”
“이건 사람만 구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간단한 것 같지만 토지에 대한 감정 평가도 이루어져야 하고, 또 그에 따른 검증에 이자율까지. 아이고, 차라리 대부업체를 차리는 게 낫겠습니다.”
손민한이 거들고 나서서 말하다 보니 일이 자꾸 커지는 느낌에 오히려 앓는 소리를 했다.
그 말에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이 부장님은 당장 이 나라의 은행들을 조사해 주십시오.”
“은행요?”
“규모가 작고 영세하면서 실적 악화에 시달리는 은행을 찾아 주세요. 모든 일은 뒤로 미루고 그것부터 처리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진혁이 서두르는 모습에 이영석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얼른 움직였다.
진혁이 이렇게 서두르는 것을 보니 또 뭔가 큰일을 벌이려는 모양이었다.
샤물과 아노아르까지 달려들어 방글라데시의 모든 은행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 * *
며칠 후 진혁은 다카로 건너간 진혁은 총리실로 바로 갔다.
나즈마 총리는 여전히 무표정인 얼굴이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간 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도 자주 보다 보니 이제 미세한 변화로 기분을 맞출 수 있게 됐다.
“카순 대통령과는 말씀 잘 나누셨습니까?”
“우리 둘 모두 서 회장님에 대한 기대가 크다는 데 공감했어요. FTA를 체결은 했지만 결국 상호 이득이 되어야지 효과가 있어요.”
“제가 양쪽을 다니며 열심히 하겠습니다.”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진혁의 모습에 나즈마 총리가 흡족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조만간 외국 나들이 갈 생각이에요. 인도에 가서 만길라 총리와 FTA 체결식을 하고 나서 한국도 방문하기로 했어요.”
“한국을요?”
“권성일 대통령이 초청했어요. FTA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한강의 기적’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수락했어요.”
“잘하셨습니다. 백번 말로 듣는 것보다 직접 눈으로 보시는 게 훨씬 낫습니다.”
얼마간 건설 진척 상황 등 환담을 더 나누던 진혁이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이곳 은행을 하나 인수할까 하는데 허락해 주십시오.”
“은행을요?”
“르나 은행이라고, 소액 대출 전문 은행입니다. 본점은 다카에 있고, 치타공 등 각주에 여섯 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들어 본 것도 같네요. 그런데 은행업까지 하시게요?”
“그건 아닙니다. 로힝야 때문에 그렇습니다.”
진혁은 이번에 남부에서 겪은 일에 대해 들려주었다.
나즈마 총리가 바로 이해했다.
“서 회장님의 로힝야 사랑은 끝이 없군요.”
“꼭 로힝야를 위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남부 경제 특구가 완성되고 기업들이 입주하면 국내외로의 금융 거래가 늘어날 수밖에 없을 테니 미리 은행을 확보하려는 겁니다.”
“역시 사업가라 안목이 다르시네요. 좋아요. 우리나라에도 좋은 일이니 긍정적으로 검토할게요.”
진혁은 총리실은 나와 남부로 돌아갔다.
* * *
며칠 후, 진혁은 다시 다카로 와야 했다.
르나 은행 인수가 결정되었다.
나즈마 총리가 직접 독려하며 일처리를 서둘러 준 덕분이었다.
총 자산 8천만 달러, 총 자본 3천만 달러의 르나 은행이 알라딘 그룹의 품으로 들어왔다.
알라딘 홀딩스의 야맘 사장을 불러 인수 작업을 마무리하고 남부로 돌아가려던 진혁은 한 통의 전화를 받고 행선지를 바꿨다.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 후 호텔로 가자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있던 김선혁도 이곳에 와 있었다.
서로 소개 겸 인사를 하고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먼저 이야기를 시작한 이는 갈리였다.
“터키의 인구는 7,500만 정도로 90%가 무슬림입니다. 유럽 대륙에 속해 있지만 인구나 문화적으로는 중동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평균 연령이 젊어 모바일 산업의 성장과 함께 온라인 유통 시장은 더욱 성장할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어 하마드가 각종 통계 자료를 나타내는 화면을 띄워 가며 터키의 온라인 유통 시장 전반에 대해 보고를 했다.
“딜로이트스와 오팡고가 시장에 매물로 나온 것을 확인했습니다. 딜로이트스는 유통업계 대기업인 딜리버리 히어로와 인수에 대한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하는데, 오팡고에 대해서는 특별한 소문을 듣지 못했습니다.”
진혁은 티엔 사장의 조언을 받아들여 하이다르에 연락해 터키 시장의 진출을 염두에 두고 조사를 부탁했었다.
마침 적당한 매물이 나왔다고 해서 급히 모였다.
시선을 받은 하마드가 다른 화면을 띄우고 보고했다.
“오팡고는 프랑스 오샹 그룹이 지사 형태로 설립했는데, 세계 유명 브랜드를 70~80% 할인해서 파는 회원제 사이트입니다.”
“현재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은 딜로이트스는 5억 달러, 오팡고는 4억 달러가량 됩니다. 알쇼핑에는 딜로이트스보다는 오팡고가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마지막으로 갈리의 결론을 듣고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던 김선혁이 물었다.
“갑자기 두 개씩이나 매물로 나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연달아 EU 가입이 다시 좌절된 게 직접적인 원인이고, 쿠데타 설까지 겹쳐서 철수하기로 결정한 듯합니다.”
터키는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보니 비민주적인 요소가 많았다. 거기에 10년 주기로 쿠데타가 일어날 정도로 정권이 불안했다.
이런 이유로 EU가 가입 신청을 연이어 거부하고 있었다.
김선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건 국제 정세에 대해 조금이라도 밝은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라 새로울 게 없습니다. 결국 모기업의 경영난으로 이곳 사업을 우선 매각하려는 것 같군요. 그걸 잘 이용하면 우리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모 그룹의 재정 상황에 대해 조사하겠습니다.”
김선혁의 냉철한 분석에 하이다르는 물론 다른 이들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진혁이 다시 한번 김선혁의 영입을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갈리가 우려의 말을 꺼냈다.
“터키가 무슬림 시장이긴 하지만 위치상 지중해 건너편 유럽의 끝자락에 있다는 게 우려가 됩니다.”
“어떤 점에서 말입니까?”
“인접국은 다른 문화권이라 더 이상의 시장 확대가 어렵다는 겁니다. 거기에 선박을 이용한 운송을 해야 해서 운송비 부담이 너무 큽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하는 게 미래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쪽은 그쪽대로 진행할 겁니다. 터키는 방글라데시에서 벌이는 프로젝트와 연관이 되어 진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AM은 부담을 느끼시지 않아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갈리가 물러나자 진혁이 한상국을 보고 물었다.
“딜리버리 히어로가 오팡고가 아닌 딜로이트스와 인수 협상을 벌이는 이유는 조사됐습니까?”
“최근 오팡고 사이트에서 할인 판매한 명품 제품과 화장품의 일부가 중국산 짝퉁이라는 소비자들의 항의에 환불하고 무마한 이력이 확인됐습니다. 외부에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회원 간 SNS를 통해 그 사실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딜리버리 히어로도 이런 사실을 알고 오팡고를 배제시킨 것 같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라 다들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국의 한상국이 이 자리에 참석한 게 의외였는데 이유가 있었다.
“터키 시장 진출에 대한 AK 의견은 어떻습니까?”
“저희 쪽도 AM과 같이 오팡고가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중국산 짝퉁 판매로 문제가 있다면서요?”
“그게 오히려 우리에게는 득입니다. 알쇼핑은 라이나 왕비님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화장품을 판매하고 있고, AM 그룹은 이집트 대사원이 그 주인입니다. 터키는 6・25 참전국으로 ‘형제의 나라’로 인식되어 상호 친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슬림 국가라 알쇼핑과도 궁합이 맞습니다.”
“오팡고 인수 후의 전략도 세웠습니까?”
진혁이 질문에 한상국이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바로 답을 내놓았다.
“현재 터키의 이커머스 시장은 태동 단계로 온라인 쇼핑몰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알쇼핑은 오픈 마켓 형태로 바로 진입하는 게 차별화에 유리합니다. 현재 납품 업체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상태라 이에 대한 지원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최대 도시 이스탄불을 제외하고는 배송 체계가 갖춰지지 않아 당일 배송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스탄불은 유럽과 근접한 북쪽 끝에 치우쳐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은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지만 도시화 속도가 더뎠다.
진혁이 물었다.
“대책은 있습니까?”
“한 가지 방안은 세웠습니다만 회장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뭡니까?”
진혁의 질문에 한상국이 생각지 못했던 대책을 내놨다.
“이스탄불을 비롯한 주요 6대 도시에 메이왕 매장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홍콩 메이왕 그룹의 리카렁 회장과 담판을 지은 적이 있었다.
한국을 제외, 메이왕이 진출한 아시아 국가에 대한 무채혈 혈당 측정기 덱스톨의 독점 공급권을 주는 대신 화장품과 의약품을 판매해 주기로 한 인연이 있었다.
하이다르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나도 리카렁 회장을 좀 아는데, 메이왕을 이용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오.”
“그 문제는 제게 맡기고 회장님은 김선혁 고문님과 함께 인수 협상을 맡아 주십시오. 협상 파트너는 딜로이트스입니다.”
“오팡고가 아니고요?”
하이다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과 전혀 다른 지시였다.
“목표는 오팡고지만 바로 달려들어 가격을 높일 이유는 없지요.”
“하하하. 무슨 말인 줄 알겠습니다. 오팡고의 애간장을 태워서 인수 가격을 최대한 낮추겠습니다.”
하이다르는 바로 알아들었다. 이번 역시 성동격서의 전법이었다.
진혁이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제부터 신 시장 개척은 전략적으로 접근할 겁니다. 지금까지 각 지역에서 경험한 것을 합쳐 최상의 계획을 세워 최단 기간 내에 안정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자리가 마련된 겁니다.”
진혁이 미래에 대해 언급하자 모두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또 어떤 계획을 내놓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