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청와대의 욕심
진혁이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여러분들의 노고로 알쇼핑이 그만큼 성장했다는 방증입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됩니다. 다만, 덩치가 커진 만큼 스스로 변화하지 못하면 도태됩니다. AS 설립을 기점으로 알라딘은 제2의 도약을 하게 될 겁니다. 아마존과 알리바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때까지 서로 믿고 의지하며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회장님.”
일제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김선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라딘이 지역별 책임 경쟁 체제를 시행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하지만 기우였다. 진혁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다. 다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까지 얻었다는 방증이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 * *
홍콩 리카렁 회장의 저택을 나서는 진혁의 표정은 홀가분해 보였다.
하이다르 회장의 예상대로 협상은 쉽지 않았지만, 대용량 무채혈 혈당 측정기 덱스론의 개발 소식을 알리자 바로 두 손을 들었다.
개인용 덱스톨의 파급력을 직접 확인한 터라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동안 하이다르 회장도 잘해 주고 있었다.
애가 닳은 오팡고가 먼저 전화를 해와, 예상 가격보다 낮은 3억 5천만 달러에 넘기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고 했다.
이제 건너가서 마무리만 지으면 된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김세동이었다.
“아버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터키인가?
“홍콩인데 지금 그쪽으로 넘어가려고 하는 중입니다.”
-당장 터키의 작업을 중지시키고 한국으로 들어오게.
“…….”
-중요한 일이네.
“알겠습니다.”
김세동이 자신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다는 게 의아했지만,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갈리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인수 작업을 대기하라고 한 뒤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번에도 국정원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김상균이 아니었다.
“김 차장님은 바쁘신가 봅니다.”
“그게…… 외국에 출장 가셨습니다. 오늘은 제가 청와대까지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국정원 직원이 뭔가 말을 아끼는 모습에 진혁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이내 잊었다.
김상균이 꼭 나와야 할 이유도 없는 데다, 청와대가 왜 자신을 급하게 불렀는지 고민하기에도 벅찼다.
김세동을 따라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자 이현국 비서실장과 무언가 상의하던 권성일 대통령이 반갑게 맞아 줬다.
“어서 오십시오. 서 회장님 덕분에 스리랑카에 가서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나즈마 총리도 조만간 방문하시기로 했습니다.”
자리에 앉고는 이미 지난 스리랑카의 일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으며 본론을 꺼내지 않는 모습에 짜증이 밀려올 때쯤 이현국 실장이 본론을 꺼냈다.
“대통령께서 며칠 후 서유럽 순방길을 떠나시는데 첫 방문지가 터키입니다. 한-터키 FTA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실 예정인데, 안타깝게도 국민들은 순방에 따른 가시적인 성과에만 집착합니다.”
“……!”
“외교라는 게 서로 주고받는 것이라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도 뭔가를 내줘야 하는데, 그게 마땅치 않았습니다.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단장님의 움직임이 포착했습니다.”
진혁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결국은 대통령이 터키에 내놓을 선물을 자신이 벌이는 사업으로 때우겠다는 말이었다.
머리에서 김이 났지만 대통령 앞이라 겨우 참았다.
권성일이 말했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벌이실 일 아닙니까? 그 시기만 잠시 늦추는 것뿐입니다. 대신 회장님이 펼치시는 사업에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마침 필요한 게 있습니다.”
진혁의 말에 말을 한 권성일은 물론 이현국과 김세동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의상 한 말이었는데 설마 이렇게 바로 요구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약속한 터라 이제 와서 없던 일도 할 수도 없었다.
“말해 보십시오.”
“제가 제주도에서 겨울 야채 산지 가격 폭락을 막으면서 동행 사업을 시작한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때 큰 도움을 줬던 업체가 오존메이드라고, 오존을 이용한 신기술 살균기를 만든 회사였습니다. 이번 함반토타 항에 대량 납품을 하기로 했는데 생산비가 부족한 모양입니다.”
“…….”
“기술력도 확실하고 발주까지 받은 건실한 업체이니 정부에서 당연히 도와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많이도 필요 없습니다. 제품 생산을 위한 자재비 정도만 있으면 됩니다. 참, 터키 온라인 사이트 인수 예정가는 3억 5천만 달러입니다. 그 돈으로 차를 사면 수십만 대를 사…….”
“……알겠습니다. 자금이 지원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오존메이드의 홍 대표님이 감사하게 생각하시고 기술 개발에 더 열심히 매진하실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진혁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의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진혁은 끄떡도 않고 자신의 말을 했다. 나즈마 총리에게 당하면서 배운 게 있었다.
“제가 이번에 방글라데시에서 은행을 하나 인수했습니다.”
“은행업까지 진출하시려고요?”
“아닙니다. 나즈마 총리의 부탁도 있고 로힝야도 대출을 받고 싶다고 해서 아주 작은 은행을 하나 인수했습니다.”
“그러시군요.”
“막상 인수하고 보니 알라딘 건설을 포함한 많은 한국 기업들이 진출해 있고 진출할 예정이지 않겠습니까. 한국과의 금융 거래가 늘어날 것 같아서 아예 서울에 지점을 설치할까 합니다.”
“아, 한국 지점을 세우시겠다는 거네요?”
“맞습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조만간 나즈마 총리가 방한해서 FTA가 체결되면 양국 간 교역은 더 늘어날 겁니다. 적극 도와드려야지요. 실장께서 챙겨 주세요.”
“……알겠습니다.”
이현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권성일과는 달리, 이현국은 진혁이 인터넷 은행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내의 여러 복잡한 여건으로 좌절되자 이런 꼼수를 들고 올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역시 모른 척하기로 했다. 절차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혹여라도 나중에 문제가 되더라도 몰랐다고 발뺌을 할 수 있으니 묻지 않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원하는 것을 다 얻고 뿌듯한 표정을 짓던 진혁이 이어진 이현국의 말에 바로 인상이 구겨졌다.
“이번 순방길에 서 단장님도 같이 동행하셔야 합니다.”
“제가 왜요?”
“회장님이 예전에 언급하셨듯이 ‘농어촌 지원단’도 엄연히 정부 조직에 속해 있습니다. 단장님도 장관급으로 대우를 받고 계시고요.”
“끙,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진혁이 앓는 소리를 내며 받아들여야 했다.
잠시 앞으로 일정에 대해 듣고 일어나자 밖에까지 따라온 이현국이 사과의 말을 했다.
“정경 분리를 천명하신 대통령께서 이러는 것은 그만큼 서 회장님을 허물없이 대하신다는 방증 아니겠습니까. 좋게 생각해 주십시오.”
“대통령께서 저를 허물없이 생각하신다니 저도 기쁩니다. 요즘 산업은행이 우수 벤처 기업에는 기술 신용 보증 없이 저리로 대출해 주는 지원 제도를 운영한다고 하던데…….”
“끙,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이현국이 앓는 소리를 냈다.
이로써 오존메이드의 대출이 저리의 산업은행 벤처 지원 자금으로 결정됐다.
지켜보던 김세동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혁이 평소 사업에서만은 냉정하다고 하더니 거짓말이 아니었다. 아주 뽕을 뽑아 먹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대통령의 서유럽 순방에 동행하게 되는 바람에 일정이 꼬여 버렸다.
고민하던 진혁은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한국에서 머물면서 혜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 * *
강릉 부모님에 다녀온 날 저녁, 진혁은 광명의 한 일식집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소에 외식을 별로 안 하는 김세동이 집을 놔두고 이곳으로 오라고 한 게 의아했다.
예약된 방으로 들어서자 김세동뿐만 아니라 김상균도 함께 있었다.
“어? 차장님은 외국에 출장 가셨다면서요?”
“……어제 들어왔습니다.”
김상균이 한 타임 늦게 답했다.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주변 이야기를 하던 김세동이 식사가 끝나자 말을 꺼냈다.
“서 서방에게 부탁할 일이 하나 있네.”
“말씀하십시오.”
“이놈 좀 데려다 쓰게.”
“예?”
“상균이가 이번에 옷을 벗기로 했다네.”
“왜요?”
진혁의 입에서 당장 의문이 튀어나왔다. 아직 정년퇴직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정부 조직이라는 게 그래. 하위직은 그나마 낫지만 고위직일수록 후배에 밀리면 옷을 벗는 게 관례야.”
진혁도 군인이나 경찰, 검찰 쪽에서 그런 관행이 있다는 것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김상균은 그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진혁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내일 당장 청와대로 들어가 이현국 비서실장님을 만나 뵙겠습니다.”
진혁이 아는 한 김상균은 누구보다도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높고 국정원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이건 뭔가 잘못된 인사였다.
김세동이 덩달아 얼굴을 굳혔다.
“언제든 대통령을 독대할 수 있다고 청와대의 인사에까지 개입하겠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도 자네와 같은 마음이야. 하지만 외부 세력에 의한 인사 전횡에 대해 성토하는 우리가 똑같은 짓을 저지르면 안 되네.”
“압니다만…….”
“대통령께서도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일 거야. 그분 나름대로 말 못 할 사정이 있으시겠지. 나나 상균이나 나라의 녹을 먹고 있으니 그 명에 따라야 할 의무가 있네.”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진혁이 더 이상 반발하지 못했다. 거기에 김상균은 죄인이라도 된 양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김세동은 일말의 미안함을 가졌다.
이런 장면을 연출한 것은 김상균이 세운 계획이었다.
진혁은 억지로 누르면 튀는 성격이었다. 곧이곧대로 이야기했다가는 받아들이지 않을 공산이 크다며 스스로 비굴한 모습을 연출하겠다고 했다.
진혁의 반발을 무마시킨 김세동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서 서방이 차지하는 위치가 이 나라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네.”
“과한 말씀입니다. 전 일개 사업가일 뿐입니다.”
“정경 분리를 표방하며 경제인들은 거의 만나지 않으시는 대통령이시네. 그런 분이 수시로 부르는 것은 그만큼 자네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방증이네.”
“그거야 제가 이런저런 일에 관여해서 그런 것 아닙니까.”
“맞아. 하지만 그 일들이 모두 이 나라에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
이번에도 진혁이 반박하지 못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사실인 것은 맞았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방글라데시나 여러 나라에서도 자네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것은 알 거네. 그런데 이번 일에서 보듯이 자네의 주변은 너무 허술해. 요행히 위기를 넘겼지만 언젠가는 크게 문제가 될 거네.”
“저도 그런 점에 우려가 되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합니다.”
진혁 역시 보안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닛뽄 그룹의 사이버 공격은 마법 펜던트가 없었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자신은 물론 알라딘도 세상에 사라졌을 것이다.
실리콘벨리의 BLC가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계약 관계일 뿐이었다.
비록 블록체인 기술을 도입해 보안성을 강화하고 있다지만 한계가 있었다. 즉각적인 위협에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자신과 알라딘의 운명을 계속해서 운에 맡기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김세동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을 상균이에게 맡기게.”
“차장님께요?”
놀란 진혁에게 김세동이 말했다.
“국정원은 현존하는 모든 위협으로부터 나라와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네. 정보 분석은 기본이고 폭탄, 사이버 테러, 독극물, 암살 공격까지. 국내의 그 어떤 조직보다 대처능력이 뛰어날 거네. 상균이를 받아들여 각 분야의 퇴직자를 모아 팀을 꾸리게 하게.”
“…….”
“자네뿐 아니라 이번에 확장하기로 한 스마트 기술 연구소도 마찬가지이네. 비록 민간 기관이지만 우리나라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질 핵심 기술과 연구원들을 모아 놓은 곳이 될 거야. 세계의 모든 기업들이 그곳을 노릴 것은 자명하네. 대비를 단단히 해야 해.”
거듭된 설득에도 진혁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김세동과 김상균은 입에 침이 말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