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마르와의 결혼식
한참 만에 진혁이 김상균에게 시선을 줬다.
“가능하시겠습니까?”
“회장님이 받아만 주신다면 목숨 걸고 지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두 분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진혁이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김상균의 처지는 안타깝지만 자신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진혁은 먼저 돌아갔다.
김세동은 김상균과 따로 할 말이 있었다.
둘만 남자 김세동이 김상균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줬다.
“이렇게 처리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서 회장님께 승낙을 받았다는 게 중요하지요. 전 괜찮습니다. 선배님 덕분에 좋은 기회를 얻게 되어 감사합니다.”
“후.”
김세동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개인적으로는 기쁜 일이었지만 김상균은 절대 이런 대접을 받으면 안 되는 후배였다.
그를 포용하지 못하는 이 나라와 국정원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다음 날.
진혁은 사무실로 찾아온 김상균에게 다시 한번 의사를 물었지만 그의 결정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설득을 포기하고 그에게 단순히 자신뿐만 아니라 알라딘 사업 전체에 보안을 맡아 줄 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수립하고 인재를 모으라고 했다.
* * *
대한민국 국기를 단 대통령 전용기가 터키의 수도 앙카라 국제공항을 떠나자 진혁은 비로소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사흘간 권성일 대통령을 따라 행사에 참석한 것도 모자라, 가시적인 성과를 원하는 투란 총리의 청에 의해 예정에 없던 오팡고 인수식까지 치러야 했다.
평소와 달리 진혁이 순순히 귀찮은 일정을 받아들인 것은 인수 금액을 3억 달러로 해 주겠다는 말 때문이었다.
4억 달러였던 것을 김선혁과 하이다르가 끈질긴 협상 끝에 3억 5천 달러까지 낮춰 놨었다.
행사를 한 번 나가는 것으로 5천만 달러를 깎아 준다면 백 번이라도 다닐 수 있었다.
한상국과 하마드에게 오팡고를 알쇼핑 터키로 전환하는 작업을 맡기고 진혁은 요르단으로 건너갔다.
요르단 왕궁은 축제 분위기였다.
이틀 후에 열리는 파이샬 왕자와 마르와의 결혼 준비가 한창이었다.
마침 샤리프 국왕 부부가 함께 있었다.
“감축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함반토타 항 소식은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 국가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서로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라이나 왕비가 물었다.
“바쁜 분이시라 내일이나 오실 수 있으려나 했는데, 이렇게 일찍 어쩐 일이세요?”
“두 분께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조금 일찍 왔습니다.”
“뭡니까?”
“이번 결혼식에 중동의 많은 나라에서 축하 사절단이 오겠지요?”
“그럴 겁니다만.”
“그때 중동 지도자들의 중지를 모아 주십시오.”
“……?”
의아해하는 샤리프 국왕에게 진혁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지금 중동의 많은 산유국들이 석유로 인한 환경 파괴의 주범으로 몰려 환경 단체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것은 아실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원가 상승을 우려해서 제대로 정제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국가들이 비난받아야 할 일입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그런 잘못된 인식을 고쳐 보려고 합니다.”
이어진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샤리프 국왕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민감한 문제입니다. 일이 잘못되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큰 역풍을 맞게 될 겁니다.”
“전 폐하의 생각과 반대입니다. 설혹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느슨했던 해상 환경오염 문제성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워 준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요. 난 서 회장님이 이 일에 나서 준 것을 세계인이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이나 왕비가 샤리프 국왕의 의견에 반하고 자신을 적극 지지하는 모습에 진혁이 오히려 난감해했다.
“그렇게 거창한 생각을 가지고 계획한 일은 아닙니다. 함반토타 항의 활성화를 위해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꼼수일 뿐입니다.”
“내가 그래서 서 회장님을 믿고 좋아하는 거예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득을 바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칭찬받아야 할 일이지요. 다만 그 이득을 남의 불행으로부터 얻느냐, 남과 함께 행복하며 얻느냐의 차이일 뿐이지요. 서 회장님은 항상 남을 행복하게 해 주잖아요. 안 그래요?”
“알겠소. 왕비의 생각대로 서 회장을 계획을 돕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왕비님께도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세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할게요.”
언제나 자신을 믿어 주고 지지해 주는 라이나 왕비의 한결같은 모습에 진혁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독일 총리님을 만나 주십시오.”
“그분은 왜요?”
“환경에 대해서 가장 진취적인 사고를 가진 곳이 EU입니다. 현재 독일이 EU 의장국입니다.”
“잘됐군요. 그쪽에는 제가 인연이 있으니 결혼식이 끝나면 다녀올게요. 좋은 생각을 가진 지도자들도 많으니 서 회장은 소신껏 뜻을 펼쳐 보세요.”
라이나 왕비는 마지막까지 진혁에게 힘을 실어 줬다.
샤리프 국왕이 나간 뒤에는 전속 디자이너인 마리아를 불러 이야기를 나눴다.
“티엔 사장님으로 보고를 받았습니다. 좋은 디자인을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버려질 작품이었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역시나 까칠한 답변이었다.
이미 예상했던 반응이라 상관 않고 목적을 밝혔다.
“이번에 터키에서 온라인 쇼핑몰을 인수했습니다. 유럽의 무슬림 인구가 상당하더군요.”
“맞아요. 이미 2,500만 명을 넘어섰어요. 시리아 사태 등으로 이민자들이 꾸준히 늘고 있어서 2050년이 되면 유럽 전체 인구의 10%가 될 거라는 보고서까지 발표됐어요.”
이번 답은 라이나 왕비가 했다.
“지금 당장 유럽에 진출할 여력은 안 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라는 생각에, 중동과 유럽을 잇는 관문인 터키를 통한 의류 수출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쁜 생각이 아니네요. 그런데 이미 디자인을 넘겨 드렸는데 그 이야기를 제게 하는 이유가 뭔가요?”
“고급 제품도 함께 제작, 유통해 볼 생각입니다. 아직은 이민 초기라 구매력이 약하지만 그 사회에 정착하고 여유가 생기면 더 좋은 제품을 찾게 될 겁니다. 마리아 씨같이 이미 경제적인 여유를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고요.”
“그런 디자인도 그냥 넘겨 달라는 건가요?”
“그럴 리가요. 전 노동은 신성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힘들게 만든 창작물인데 그냥 달라는 것은 경우가 아니지요. 고급 제품에 대한 디자인 비용은 별도로 지불하겠습니다. 그리고 관련해서 패션쇼를 여시겠다면 그 부분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좋은 제안이네요. 다른 디자이너들과 함께 고민해 볼게요.”
엄청난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아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참 재미없는 여자였다.
진혁이 오랜만에 마르와와 둘이서만 시간을 가졌다.
세상의 모든 신부는 예쁘다는 말이 맞듯이 마르와의 얼굴은 활짝 펴 있었다.
“행복하냐는 말을 물을 필요도 없을 만큼 아주 입이 귀에 걸렸다.”
“너무 너무 행복해요. 회장님을 만난게 제 인생의 최대 행운이었어요. 감사드려요.”
“나도 너를 만난 게 큰 행복이고 기쁨이다. 기대 이상으로 잘해 줘서 기쁘고 고맙다.”
더욱 활짝 웃음을 머금는 마르와의 모습에 진혁이 괜히 핀잔을 했다.
“내일 결혼식에서는 절대 그렇게 웃지 마라.”
“……?”
“식장에서 신부가 자꾸 웃으면 딸 낳는대.”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그리고 딸이 어때서요. 나도 왕비님처럼 딸만 낳을 건데요.”
아무리 마르와가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한국인들 사이에만 통용되는 속설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 * *
결혼식 당일.
진혁은 오랜만에 반가운 이들을 만났다.
두바이의 AM 식구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느낌이 덜했지만, 이집트에서 날아온 핫산과 카심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진혁이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그들을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미스터 서, 그러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아주 잊은 줄 알았습니다.”
바로 카심이 툴툴거렸다.
“그럴 리가요. 바라캇 선장에게 잘 계시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이야기만 들으면 뭐 해. 코빼기도 보기 힘든걸.”
“그래서 이번에는 결혼식이 끝나면 이집트에 갈까 합니다.”
“정말요?”
“그럼요. 같이 갑시다.”
카심의 얼굴이 당장 활짝 펴졌다.
그는 바라캇이 방글라데시에 간다고 했을 때 따라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이 발목을 잡아서 아쉬움만 곱씹고 있었다.
웃고 떠드는 사이 결혼식이 열릴 시간이 되었다. 다들 서둘러 결혼이 열리는 잔디광장으로 갔다.
결혼식이 끝나고 열린 만찬장에서 제일 바쁜 이는 샤리프 국왕 부부였다.
혼주로서 당연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훨씬 더 했다.
진혁이 내준 미션이 더해져서였다.
* * *
다음 날, 진혁은 약속대로 카심과 함께 이집트로 건너갔다.
샤리프 국왕만 믿고 뒷짐만 지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압델 대통령을 만나고 이어 리비아와 사우디아라비아에도 들렀다.
함반토타 항에 도착하자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 정상가동 되고 있었다.
최신식 시설을 갖춘 쾌적한 항만 환경에 비해 입항해 있는 선박은 딱 한 척뿐이었다.
당연히 실적을 보고하는 권오일 부사장의 고개는 땅에 처박힐 정도로 숙여져 있었다.
진혁이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배가 쏟아져 들어올 테니 그때를 대비하는 시간이다 생각하시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십시오.”
“알겠습니다만 이건 너무…….”
“저와 알라딘에 대한 소문을 못 들으셨습니까?”
“귀가 따갑도록 들었습니다.”
“조만간 그 소문이 사실이라는 걸 느끼시게 될 겁니다. 입에 단내가 날 테니 그때 제 욕이나 하지 마십시오.”
진혁이 큰소리쳤지만 권오일은 믿지 못했다.
다른 사업에서는 크게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항만 운영은 처음 맡아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생각했다.
대형 선사들은 이용료 할인을 위해 다년 계약을 하는 게 관행이라 쉽게 항만을 옮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어렵게 유치 약속을 받아도 기존에 이용하는 항만에서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해 계약이 무산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 권오일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진혁은 항만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격려하고 나서 방글라데시로 떠났다.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진혁은 제일 먼저 건설 현장부터 방문했다.
케이슨을 사용하고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불철주야 건설 현장에 매달린 덕분인지 소나르 지역이 빠르게 변모하고 있었다.
항만 공사는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신설된 해안 도로에는 아스팔트가 깔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는 프랑스의 TGV가 경전철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차량은 도이에 중공업에서 생산한 제품이 들어오기로 했다.
이제 이곳 현지 주민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검게 탄 손민한이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몰라볼 정도로 변했습니다.”
“알라딘 건설이 왜 해외 건설의 강자인지 알았습니다. 철저한 준비와 한 치의 착오도 없는 진행, 거기에 한인갑 사장님의 추진력이 정말 끝내줍니다.”
“대단한 분이시네요. 감사 인사라도 드리고 싶은데 어디 계십니까?”
“지금 여기에 안 계십니다. 발라캔 아파트 건설 현장에 가 계십니다.”
“아파트를 벌써 지어요?”
진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가 알기로는 아직 아파트를 지을 때가 아니었다.
“부지 정리와 인프라 구축이 끝난 곳부터 주택 건설을 하기로 했습니다. 난민 캠프의 상황이 너무 열악해서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닙니다. 이곳 일도 바쁘실 테니 계십시오. 모르는 길도 아니니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진혁은 샤물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발라캔으로 이동했다.
흉물스러웠던 난민 캠프 지역이 깨끗한 평탄 지형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쪽에 대형 화물차에서 크레인이 건축 자재들을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쪽으로 가자 한인갑 사장이 장일수 부사장을 포함한 기술자들과 도면을 놓고 무언가 상의하고 있었다.
그가 진혁의 얼굴을 보고 놀라 얼른 인사를 했다.
“오셨습니까, 회장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는 말을 듣고 격려차 왔습니다. 철근과 레미콘 수급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풉!”
뒤에 서 있던 젊은 기술자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아야 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리는 바람에 분위기가 어색해져 버렸다.
진혁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