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곽양, 이치
조나단은 신문의 한 면 전체를 할애한 대형 기사를 냈고, 크게 세 부분에서 김양희 장관의 주장이 허구임을 입증했다.
저유황유의 연비 문제는 GTL유로 풀 수 있다.
LNG 인프라는 이미 충분히 갖추어져 있다. 함반토타 항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한편, 스리랑카에는 세계 각국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조나단 기자가 언급한 함반토타 항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새로 지어져 깨끗한 데다가 움직이는 차량도 모두 전기차고, 완전 무인 자동화 시스템이 갖춰진 친환경, 최첨단 스마트항의 모습에 감탄하지 않은 기자들이 없었다.
권오일이 직접 그들을 안내해 GTL유와 LNG 저장 탱크와 연료 주입을 위한 벙커링 시설을 견학시켜 주었다.
크고 작은 섬들이 앞을 가로막아 답답한 싱가포르 해협에 비해 함반토타 항의 시야는 막힘이 없어 아무리 큰 선박이라도 충분히 접안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기자들의 취재기와 실제 영상을 확인한 환경 단체의 시위는 더 가열됐다.
특히 이 일을 촉발한 김양희 장관이 속한 한국으로 세계 각국의 환경 단체 관계자들이 모여들었다.
놀란 권성일 대통령은 김양희 장관을 해임하고 IMO 환경 규제를 선제적으로 지켜 나가겠다며 향후 계획을 발표했다.
“선박용 연료의 황 함유량 기준을 올해부터 매년 1%씩 낮춰 2020년에는 0.1%에 맞추겠습니다. LNG 추진선 도입을 돕기 위해 관련 사업에 1조 원의 자금을 지원하겠습니다. 기존 선박은 함반토타 항 이용을 통한 GTL유 사용을 의무화시키겠습니다.”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권성일의 조치에 한국 내 환경 단체의 시위는 누그러졌다.
하지만 불통이 다른 나라들로 튀었다.
자신의 나라도 한국과 같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환경 문제에 제일 우호적인 EU가 가장 먼저 화답해 한국과 동일한 정책을 펴겠다고 약속했다.
이어 중동의 산유국들도 저유황유 사용을 늘리기 위해 가격을 낮추고 IMO 규정을 준수하지 않는 나라에는 원유를 공급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대륙의 나라들도 연달아 유사한 대책들을 발표했다.
한국의 조선 3사와 도이에 조선에 스크러버 설치와 LNG 전환 문의가 빗발쳤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함반토타 항의 역사에 의미 있는 기록이 새겨졌다.
세계 각국에서 온 취재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스마트 무인 자동화 작업 현장에서 안벽 크레인 평균 효율성 성능 시험이 진행됐다.
영국의 ‘퀸엘리자베스 호’의 하역 작업은 정확히 0시에 시작해서 오전 9시에 완료되었다.
1,700여 개 컨테이너에 대한 하역의 효율성이 시간당 38.5개에 달해 전 세계 자동화 터미널 최고 기록을 수립했다. 평균 작업 효율보다 50% 향상된 수준이었다.
함반토타 항은 저비용, 고효율, 스마트화, 친환경 등의 성과를 이끌어 내면서 ‘함반토타 항 모델’이란 신조어까지 만들며 국제 해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축하 연설에서 진혁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기능 향상과 안전성 확보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세계 각국의 컨테이너선이 함반토타 항으로 몰려든 것은 당연했다.
* * *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진혁을 의외의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장님!”
“오랜만에 뵈어요.”
김연희였다.
길었던 머리가 다시 짧아져 있었다.
“아니, 여긴 어떻게……?”
“제가 있을 곳이 여기라 돌아왔어요. 할 일이 엄청 많다면서요?”
이영석은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에 두는 것으로 진혁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했다.
그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물어볼 것이 있어 전화했다가 이곳 사정을 언급했던 것뿐인데 바로 짐을 싸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진혁이 그녀를 회의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서울 생활은 어떻게 하시고요?”
“거긴 제가 있건 없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여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정 사장님이 뭐라고 하지 않아요?”
“그 사람은 제 뜻대로 하라고 했어요. 이곳에 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녀가 합류해 준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든든했다. 하지만 진혁은 선뜻 답을 못했다.
그 모습에 김연희가 먼저 말했다.
“그 사람이 회장님께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들었어요. 저를 위한 일이라고 하지만 저 역시 용서가 안 돼요.”
“소장님.”
“회장님에 대한 배신보다 로힝야의 꿈을 망가트리려 했다는 게 화가 나요. 내 삶의 전부였는데……. 그래서 당분간 떨어져서 서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어요. 어떻든 저도 관여된 일이에요. 그 잘못을 만회할 수 있게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아니라 로힝야를 위해서 일해 주세요. 예전처럼 말입니다.”
진혁은 김연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녀만큼 로힝야를 이해하고 아끼는 이는 없었다.
진혁이 말했다.
“AS에 소장님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감사하지만 전 다른 쪽에서 일하고 싶어요.”
“……?”
“한국에서 ‘스마트 케어팜’ 사업을 위해 알라딘 복지 재단을 만드셨다는 기사를 봤어요. 이곳에 사무소를 내 주세요.”
“복지 재단에서 일하시겠다고요?”
“그룹 소속이 되면 아무래도 그룹 이익이 되는 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순수하게 로힝야만 보고 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것도 좋은 생각 같네요. 그렇게 합시다.”
알라딘 복지 재단 방글라데시 사무소의 설립이 결정됐다.
그렇게 며칠 후.
개소식에 많은 로힝야들이 찾아와서 축하를 해 주었다. 그들은 진혁보다 더 김연희의 복귀를 반겼다.
사무실을 꾸미는 것도 로힝야들이 직접 해 줬다. 사무소 직원들도 김연희를 제외하고는 모든 로힝야로 구성했다.
* * *
건설 현장과 사무소 오픈 상황을 점검하던 진혁에게 낯선 인물이 찾아왔다.
30대 초반의 동양인이었다.
“곽양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왔습니다.”
“서진혁이라고 합니다. 앉읍시다.”
자리에 앉자 곽양이 말했다.
“회장님에 대한 기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봤습니다. 알쇼핑과 알라딘 사업의 성장 과정을 통해 크게 감명 받아, 무례인 줄 알면서도 찾아뵀습니다.”
“아닙니다. 인종과 국적을 떠나 마음이 맞는 친구의 방문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제가 작년 중국에 SNS를 기반으로 하는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곽양이 자신에 대해 소개했다.
그는 공장 노동자인 부모와 함께 항저우 외곽에서 넉넉하지 못한 유년 시절을 보낸 ‘흙수저’ 출신이었다.
하지만 수재로 학부를 마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구글에 입사해 창업의 꿈을 키웠다고 했다.
“2007년 중국으로 돌아와 전자 상거래 대행업체와 게임 회사에서 7년 간 경험을 쌓았습니다. 현재 중국은 전자 상거래에서는 알리바마, 온라인게임은 린센토가 강자인데, 상호 연계성이 부족합니다. 저는 그래서 전자 상거래와 게임을 접목한 이치(一起)라는 플랫폼을 개발해 창업하게 됐습니다.”
“전자 상거래와 게임의 접목이라. 흥미로운 방식이네요.”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그 역시 전자 상거래라면 나름 박식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전혀 새로운 시도였다.
흥미가 동했다.
곽양이 그런 반응에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온라인 쇼핑몰에 처음으로 바이럴 마케팅을 도입하신 분이라 바로 알아들으실 줄 알았습니다. 저 역시 SNS를 통한 사용자들의 높은 참여도를 끌어낼 계획입니다.”
곽양의 말이 이어질수록 진혁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제시한 방식은 평범하지만 획기적이었다.
온라인의 일반적인 판매 방식은 가격이 정해진 상품을 올려놓고 회원이 다량 구매했을 때 일정 부분 할인해 주거나 쿠폰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곽양의 이치 플랫폼은 가격이 정해지지 않았다.
판매자가 제품 사양과 기준 가격만 올려놓으면 구매 의사를 표현하게 된다.
“일정 주문 수량이 되어야만 거래가 성립되어 판매가 됩니다. 그래서 사고 싶은 사람들은 한 명이라도 더 끌어모으기 위해 친구들에게 추천하게 되는 것이지요.”
“공동 구매 할인을 선 시행하는 방식이군요.”
“맞습니다. 그를 통해 회원들이 목표치에 도달해 딜이 이루어졌을 때의 쾌감을 느끼게 되지요. 물론 낮은 가격에 대한 만족도는 덤이고요. 판매자들 역시 대량 주문 거래가 성립된 후라 재고 부담 없이 안정적으로 제품 생산만 할 수 있고요.”
“대단하시네요.”
진혁의 솔직한 표현에 곽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회장님과 달리 마이클 창 씨는 제 사업 모델이 가능성이 없어 투자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이렇게 직접 찾아온 겁니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창 씨는 중국의 경제 성장으로 더 이상 저가 제품은 매력이 없다고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실제 알리바마나 린센토의 주 서비스 지역이 상하이, 베이징 같은 대도시이고요. 하지만 대륙은 넓습니다. 아직도 개발이 안 된 소도시와 시골이 더 많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품질보다 가격에 민감합니다. 전 그쪽을 주 타깃으로 잡을 생각입니다.”
“음…….”
“미국과 유럽의 여러 벤처 캐피탈사로부터 투자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회장님을 찾아오겠다고 결심한 것은, 한국에서 동행 사업을 이끌었다는 기사를 보고 나서였습니다. 회장님이 시골의 가능성을 간파하고 계시는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곽양의 마지막 말에 진혁은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투자하겠습니다.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천만 달러가 필요해 미국 측과 협의했는데 800만 달러에 지분의 15%를 요구해 왔습니다.”
“도둑놈들이군요. 제가 1,500만 달러를 투자하지요.”
“죄송합니다만 지분을 더 이상 팔 생각은 없습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함께 고생하는 직원들과 공유할 겁니다.”
“지분은 그대로 주셔도 됩니다. 대신 곽 사장님의 아이디어를 알쇼핑에서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정도 말씀드렸으니 알라딘에서 자체 개발이 가능하지 않습니까?”
의아해하는 곽양에게 진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기술은 시간이 지나면 쌓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디어는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만한 대가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고개까지 숙여 보이는 진혁의 모습에 곽양이 오히려 당황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고, 진혁은 바로 변호사를 불러 곽양과 계약서를 체결했다.
곽양은 진혁의 큰 뜻에 감명받아 비밀 유지를 조건으로 이치 플랫폼의 소스를 제공해 주겠다고 했다.
* * *
한편, 한국의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한상국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를 보고 놀라 급히 일어났다.
“아니, 회장님. 무슨 일입니까?”
진혁이 헐레벌떡 들어왔다.
“대박. 아주 대박입니다.”
이영석이 구입한 의약품과 생필품이 각 가정에 전달되는 것만 보고 서둘러 돌아온 진혁은 곽양과의 계약 사실을 들려줬다.
“선 공동 구매 할인이라니. 신선한 방식이네요.”
“맞습니다. 이건 아주 기발한 발상입니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한 가지 우려가 있습니다.”
“말씀해 보십시오.”
“단가 인하에만 집착하다면 품질 저하나 짝퉁이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인기 있는 가전제품의 모델 번호를 달리하고 옵션 품목을 빼거나 저가 부품을 사용해 온라인이나 용산 전자 상가 등지에 팔았다가 소비자들로 비난을 들은 일들이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활활 타오르던 진혁의 기분이 빠르게 식었다. 너무 좋게만 보다 보니 그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을 놓쳤다.
한상국이 말했다.
“우려감이 공존한다는 것이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적절한 방지책만 마련된다면 썩 괜찮습니다.”
“어떤 대책이 있을까요?”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알쇼핑의 결제방식은 ‘에스크로’입니다. 소비자가 상품을 받아 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데 15일의 여유 기간이 있습니다. 그 기간 내에 문제가 되는 상품은 대부분 걸러질 겁니다.”
“그렇겠군요.”
“거기에 더해 선 공동 구매 프로모션 참여 업체는 일정 기간 판매를 해서 신용이 검증된 업체 위주로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야 짝퉁 제품으로 한탕하고 튀려는 벤더들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역시 한상국은 가장 치열하다는 한국 시장에서 잔뼈가 굳은 이커머스 전문가다웠다. 그가 내놓은 대책은 적절했다.
진혁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한 사장님의 생각대로 하시고 전 이번 프로모션의 첫 적용지를 굿딜로 했으면 합니다.”
“굿딜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