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슈퍼컴퓨터
“그렇습니다. 구매 욕구를 유발할 정도로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는 결국 물량이 받쳐 줘야 합니다. 그래야 벤더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하려고 할 겁니다.”
“그건 그렇지요.”
“인도는 중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인구 대국입니다. 거기에 개발도상국이라 가격에 대단히 민감할 겁니다. 한국처럼 경제가 발달된 나라는 질을 따지기 때문에 저가에 대한 메리트가 낮습니다. 인도뿐만 아니라 인근 동남아시아에 세계 유수 기업의 제조 공장이 들어와 있으니 물류비용이 적게 든다는 장점도 있고요.”
“회장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한상국이 바로 수긍했다.
진혁도 자신 못지않게 이커머스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고, 특히나 판매 관련해서는 훨씬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급한 용건이 끝나자 한상국이 못다 한 이야기를 꺼냈다.
“회장님이 방글라데시의 르나 은행을 인수해 우회적으로 인터넷 은행업을 할 수 있게 되어 한시름 놓았습니다.”
“겨우 숨구멍만 만든 겁니다. 보다 적극적인 사업 진행을 위해서는 한국에서도 인터넷 은행이 가능해야 합니다.”
“맞습니다만 그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전히 반대 여론이 더 높습니다.”
답답했지만 어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한상국이 다른 말을 했다.
“은행 서비스까지 지원하려고 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뭡니까?”
“서버의 연산 능력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슈퍼컴퓨터의 도입을 검토해 주십시오.”
“슈퍼컴퓨터요?”
놀라는 진혁의 표정을 보고 한상국이 말했다.
“4차 산업의 출발점은 빅데이터 분석에서 시작합니다. 대용량 데이터를 처리해야 하니 컴퓨터 처리 능력의 향상은 필수입니다. 인공지능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마존과 알리바마 모두 이미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 있고, 자체적인 개발까지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렇지요.”
진혁은 놀란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며 답했다.
한상국의 말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바보처럼 놓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바로 알라딘 연구소로 갈 생각이었습니다. 슈퍼컴퓨터 도입에 대해 구 소장님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최진성 사장이 택시 업체와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반응이 상당히 좋다고 합니다.”
한상국의 이번 이야기에는 큰 감명이 없었다. 진혁은 이미 성공을 확신하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슈퍼컴퓨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장님, 소장님.”
이번에도 진혁은 구필준의 집무실로 뛰어 들어갔다. 오늘은 왠지 계속 이리저리 뛰어다니고만 있었다.
“아니, 회장님. 무슨 일이 났습니까?”
구필준의 반응도 한상국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슈퍼컴퓨터를 당장 도입해야겠습니다.”
“……이미 들어와 있는데요.”
“예?”
“슈퍼컴퓨터는 스마트 기술 개발을 위한 필수 장비입니다. 연구소 설립 때 이미 사 주셨지 않습니까?”
“……그랬군요.”
스마트 기술 연구소 설립은 정호영이 맡아서 처리했었다.
자금 집행은 고용준이 해서, 진혁은 어떤 물건이 들어오는지에 대해 알지 못했다.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그럽시다.”
구필준이 보여 준 슈퍼컴퓨터는 진혁이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일반 컴퓨터와 달리 층으로 나뉜 ‘랙’이라는 케이스에 네모난 장비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슈퍼맥스’입니다. 기존의 초고성능 CPU 시스템보다 80배 이상 빠르면서 비용은 20분의 1에 불과합니다.”
“생각했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네요. 어느 나라 제품입니까?”
“우리나라의 한 중소기업이 만든 겁니다.”
“우리나라 제품이라고요?”
“그렇습니다. 플로테크라는 회사가 납품했습니다.”
“중요한 연구를 진행하는데 좀 더 좋은 제품을 구매하지지 그러셨습니까?”
“예전에 정호영 사장님도 그렇게 말씀을 하셨지요. 우리 연구원들도 처음에는 같은 생각이었으니 당연한 우려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들 놀라워하면서 성능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대단하군요. 우리나라에서 슈퍼컴퓨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진혁의 감탄에 구필준이 웃으며 말했다.
“마침 새 연구소에 들어갈 슈퍼컴퓨터 관련해서 플로테크 사장님이 오시기로 했는데, 함께 만나 보시겠습니까?”
“저 같은 비전문가가 들으면 뭘 알겠습니까. 괜히 민폐만 끼치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혁은 괜히 연구소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다가 최상민 사장을 함께 만났다.
“회장님에 대한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4차 산업 기술 개발을 시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에 사장님같이 뛰어난 분이 알려지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군요. 아무튼 이런 뛰어난 제품을 개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서로 인사가 끝나자 구필준이 얼른 설명했다.
“최 사장님과 플로테크는 HPC(고성능 PC) 전문 사이트 넥스트 플랫폼에 의해 주목할 만한 전 세계 HPC 스타트업 아홉 개 업체에 선정되었습니다. 해외 미디어 평가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과찬입니다.”
말과는 달리 최상민의 얼굴에는 전혀 어색함이 없었다. 그만큼 자신의 기술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해외에서 그렇게 인정받는 업체인데 제가 처음 듣는 게 좀 의외입니다.”
“근거 없는 국산 중소기업 제품에 대한 불신 때문이지요. 이번 알라딘 연구소 납품으로 그런 불신이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무조건 외국산만 선호하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일면이었다.
“이번에 설치할 제품도 기존 것과 같은 겁니까?”
“아닙니다. 새로 개발한 ‘뉴맥스’ 모델로 들어올 겁니다. 최신 GPU 20대와 네 개 100Gbps 인터커넥션 어댑터를 장착해 월등한 계산 성능과 강력한 네트워크 기능을 확보했습니다.”
“기존보다 성능이 얼마나 뛰어난 겁니까?”
“처리 속도가 5배 이상 빨라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감히 상상이 안 되네요.”
놀라는 진혁에게 최상민이 다시 입을 이었다.
“뉴맥스의 장점은 병렬연결의 우수성이 뛰어나다는 겁니다. 스위칭 기술을 조금만 보강하면 시스템 규모를 천 대 이상으로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백 대를 연동시키는 것만으로도 126페타플롭스의 성능을 구현할 수 있다는데, 이는 세계 1위에 해당하는 겁니다.”
“좋습니다. 알라딘 연구소에는 플로테크가 가진 모든 기술을 동원해 최고의 슈퍼컴을 세워 주십시오. 돈 걱정은 마시고요.”
진혁의 거침없는 결정에 구필준이 최상민에게 거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사전에 진혁이 가격과는 상관없이 최고의 시스템을 원할 거라고 했었다.
이후 슈퍼컴퓨터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것으로 부족해 퇴근하고 인근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진혁은 최상민의 열정과 기술력이 마음에 들었고, 최상민은 진혁의 기술적 가치를 이해하고 아낌없이 투자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저녁에 술까지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진혁이 물었다.
“아까 연구소에서 세계 1위 슈퍼컴을 만들 수 있다고 하셨는데, 시간은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적절한 지원만 이루어진다면 1년 안에 당장 1페타플롭스인 슈퍼컴을 30억 원에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
진혁의 눈이 커졌다. 엄청난 제안이었다.
최상민의 열변이 이어졌다.
“컴퓨팅 인프라 없이 4차 산업 혁명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더욱 정교한 시뮬레이션 연산이 요구되는데, 이를 간과하면 결국 도태되고 말겁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스마트 기술 연구소를 설립한 겁니다.”
“솔직히 여기 계신 구 소장님이 너무도 부럽습니다. 한국에 회장님 같으신 분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신기술 개발 여건은 너무도 열악합니다.”
최상민은 답답한 마음에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얼마간 더 마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혁이 정중히 인사를 했다.
“오늘 좋은 말씀 많이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우리나라 기업가들도 회장님처럼 기술 개발의 중요성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알라딘 연구소의 제품은 최고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알라딘은 세계 곳곳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을 기회로 더 좋은 일들이 있을 수 있으니 멋지게 만들어 보십시오.”
“알겠습니다.”
진혁은 최상준과 구필준의 인사를 받으며 차에 탔다.
두 사람과 멀어지자 진혁이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플로테크에 대해 낱낱이 조사해서 내일 아침에 보고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전화를 끊은 진혁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최상민에게 들은 슈퍼컴퓨터에 대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출근한 진혁에게 국정원을 나와 알라딘 시큐리티 사장이 된 김상균이 보고했다.
“플로테크는 충북에 있는 인동대학교의 기술 지주 회사의 자회사입니다.”
“그럼 플로테크의 지분은 대학이 가지고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100% 인동대학의 소유로 확인되었습니다.”
진혁은 한상국으로부터 아마존과 알리바마가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도 개발까지 한다는 말을 들은 데다, 최상민이 세계 1위의 슈퍼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는 말에 플로테크를 인수할 마음을 굳혔었다.
그래서 김상균에게 조사를 시켰다.
무언가 생각하던 진혁이 물었다.
“인동대학교는 어떤 학교입니까?”
“단과대로 있다가 1990년 종합대학교로 승격된 학교입니다. 국내 대학 순위 50권으로 1년 예산은 750억 정도이고…….”
짧은 시간인데도 김상균은 세세한 부분까지 다 알아냈다.
국정원의 정보 분석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진혁이 고민하는 사이 김상균의 보고가 이어졌다.
“……최근 총장 선출 문제로 학교가 시끄럽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잠시만요. 무슨 문제라고요?”
“총장 선거가 진행 중인 모양입니다.”
“판세는요?”
“현 총장도 후보로 나왔는데 새로운 후보에게 밀리는 모양입니다.”
“그렇단 말이지요……. 갑시다.”
말끝을 흐리던 진혁이 벌떡 일어나 말했다.
계획이 세워졌다.
인동대학교에 도착해서 총장실로 가자 노성호 총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쁘신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회장님 같으신 분이 찾아오신다는데 당연히 기다려야지요.”
유명한 것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자리에 앉고 진혁이 일단 밑밥부터 던졌다.
“요즘 지방 대학이 많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지방 인구가 주는 데다 서울권 대학만 선호하다 보니 좋은 인재를 유치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수도권 집중화가 참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동행 사업으로 농어촌 살리기를 하고는 있지만 힘에 부칩니다. 이런 좋은 대학이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지방 대학은 모두 고사할 처지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학교 재정이 어려운 것을 총장님께만 전가하니…….”
“그렇습니다. 제가 재임 기간에 산학협력단 사업을 활성화시켜 학교 재정에 도움이 될 일을 참 많이 해 놨습니다. 이제 그 과실이 막 열리려는데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에만 집착하는 세태가 참 안타깝습니다.”
계속해서 맞장구를 치는 노성호의 모습에 진혁이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제가 바로 성과가 나올 수 있는 제안을 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플로테크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플로테크를요?”
“그렇습니다. 알라딘 그룹의 사업을 위해 슈퍼컴퓨터를 도입하려는데, 이왕이면 직접 개발까지 해 보려고 합니다.”
자신의 제안에 노성호의 눈이 빠르게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진혁이 쐐기를 박았다.
“30억이 투입된 것으로 압니다. 그 열 배를 내놓겠습니다.”
“헉. 열 배요?”
“그렇습니다. 거기에 100억을 기초 기술 연구 기부금으로 기탁하겠습니다.”
노성호는 벌어진 입을 닫지 못했다. 인동대의 1년 기부금은 채 10억이 되지 않았다.
입을 딱 벌리며 놀라는 노성호에게 진혁이 아예 쐐기를 박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