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중국 탈출
“선거가 쉽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제게 매각해서 업적으로 삼으시는 게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더 길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무능하다고 비판하는 상대 후보의 입을 단번에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급히 학교의 고문 변호사가 호출이 되어 알라딘 그룹과 인동 그룹 간에 약정서를 체결했다.
홀가분한 기분으로 학교를 나온 진혁은 인근에 위치한 플로테크 본사를 찾아갔다.
갑자기 찾아온 진혁을 보고 최상민이 놀라다가 얼른 사무실로 안내를 했다.
“미리 연락을 주시지요.”
“먼저 상의를 드렸어야 하는데 제가 욕심이 너무 나서요. 학교에 들렀다가 오는 길입니다.”
“……?”
“총장님과 플로테크 인수에 대한 약정서를 체결하고 왔습니다.”
진혁의 눈짓에 김상균이 방금 전에 작성한 서류를 내밀었다.
천천히 읽어 본 최상민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결국 이렇게 정리가 되는군요. 구 소장님이 회장님은 사고의 끝을 알 수 없는 분이라고 하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나 봅니다.”
“먼저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제 회장님이 든든하게 지원해 주시면 그간 하고 싶어도 못 한 것들을 원 없이 해 볼 수 있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지요. 우리를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원은 넉넉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말씀하신 슈퍼컴퓨터의 개발 기간은 절반으로 줄여 주십시오. 사장님은 하실 수 있으시지 않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최상민이 눈빛을 굳히고 말했다.
“……해 보겠습니다. 대신 한 가지 필요한 게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이오콘이 보유하고 있는 MAIO 기술을 확보해 주십시오.”
“MAIO요?”
“다중 입출력 기술입니다. MAIO는 테이터 전송 방식을 최적화시켜 두세 배 빠른 속도를 내는 게 가능합니다.”
“중요한 기술인데 쉽게 내놓을까요?”
“그건 걱정 마십시오. 이오콘 사장님과 오래전부터 슈퍼컴퓨터 공동 개발에 대한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쪽도 중소기업이라 자금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라 개발비 확보가 쉽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습니다.”
“잘됐군요. 무조건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사장님이 자리를 마련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대학교 이사회에서 결정이 되면 다시 만나기로 하고 진혁은 회사로 돌아갔다.
이오콘도 다급했던지 그날 저녁 바로 연락이 와서 만났다.
플로테크와 달리 이오콘은 개인 회사라 인수 협상이 쉽지 않았다.
최상민의 끈질긴 설득과 진혁이 세계 최고의 슈퍼컴퓨터를 함께 만들어 보자는 말에 결국 지분의 51%를 50억 원에 인수하기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인동대학 이사회의 승인이 떨어지자 진혁은 알라딘 연구소 부지 내에 별도의 건물을 지어 슈퍼컴퓨터 개발을 전담하는 조직을 만들게 했다.
* * *
한 해가 저물어 갈 때 오희준 2세가 세상에서 태어났다.
함께 축하를 해 준 뒤 진혁은 가족들을 데리고 강릉의 부모님 댁으로 건너가 휴가를 보냈다.
부모님과 배가 불러 온 지민, 잠이 덜 깨 칭얼거리는 혜주와 함께 해돋이를 보며 알라딘과 가족들의 무사 안녕을 빌고 서울로 올라왔다.
하지만 세상은 진혁의 소원과 다르게 돌아갔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이 큰 사고를 쳤다.
국제 사회의 잇단 경고에도 불구하고 4차 핵 실험을 감행했다.
이에 국내외 여론들이 강력한 규제를 촉구하면서 한반도가 뜨거운 논란에 휩싸였다.
진혁도 알라딘 그룹에서 중요 인사들을 모아 놓고 대책 회의를 열었다.
AK 고용준 사장은 물론 새로 합류한 김선혁과 한지철도 참석했다. 다른 지역은 영향이 미비하다고 판단해 부르지 않았다.
고용준이 보고했다.
“유일한 우방인 중국 정부가 특사까지 파견해서 자제를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핵 실험을 감행한 터라, 이번에는 국제 사회의 제재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권성일 대통령도 국내외의 악화된 여론 때문에 강경한 대응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물론 그렇지만 중국 정부가 북한이 일방적으로 몰리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거네. 제재에는 동의하지만 어느 수위 이상은 반대할 게 분명해. 그럼 북한만이 아니라 중국과의 관계도 급속도로 악화될 거야.”
“그렇더라도 알라딘 그룹의 사업은 중국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김선혁의 우려에도 고용준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말하자 한지철이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그랬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태후 화장품의 중국 내 전문 매장만도 120여 개가 넘습니다. 한중 관계가 경색되면 심각한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
한지철의 지적에 다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태후 화장품이 그룹에 흡수됐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진혁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그 모습에 고용준이 말했다.
“현재 한중 간의 교역량을 생각하면 극한 대치는 너무 앞서가는 우려 같습니다. 중국이 북한을 감싸기 위해 그런 무리수까지는 두지 않을 겁니다.”
“평상시라면 그러겠지만 올해는 각국에서 대선이 열리네. 후보자들은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
“그렇기는 하지만…….”
“잠시만요.”
진혁이 머리를 감싸 쥐고 고용준의 말을 막았다.
머릿속으로 샘솟듯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었다.
북한의 핵 실험, 개성공단 폐쇄, 사드 배치, 중국의 한한령.
고용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안 좋으십니까?”
“……괜찮습니다. 고문님의 예상이 맞습니다. 이번 사태는 심각하게 변해 갈 겁니다. 당장 중국 내 사업을 철수하도록 하세요.”
“사업 철수는 그렇게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좀 더 면밀한 검토를 한 다음에…….”
“확인한 다음에 움직여서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철수하는 게 손실을 최소화하는 길입니다. 당장 준비하세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지시에 다들 놀라면서도 서둘렀다.
진혁의 예상은 언제나 옳았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 * *
알라딘 그룹이 바삐 움직이는 사이 진혁은 어렵게 면담을 허락받아 권성일 대통령을 만날 수 있었다.
권성일은 연이은 열린 대책 회의로 얼굴이 까칠해져 있었다.
“바쁘실 텐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서 회장의 면담을 거절할 수는 없지요. 역시나 북한 핵 실험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상황이 굉장히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그 점은 말씀 안 하셔도 충분히 느끼고 있습니다. 왜 이런 무모한 짓을 벌인 건지…….”
권성일은 북한의 무모한 도발에 안타까워했다.
그는 취임 이래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하지만 북한의 핵 실험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로 인해 북한을 적절히 제어하지 못했다는 야당과 국민들의 비난에 직면해 있었다.
진혁이 말했다.
“북한도 북한이지만 중국이 더 문제입니다.”
“이번에는 중국도 더 이상 북한 편을 들어주기 힘들 겁니다. 북한 제재안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받았다는 백악관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재안에 반대하지 않겠다는 것이지,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기 위한 군사적 조치까지 동의한 것은 아닙니다.”
“군사적 조치라니요?”
“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 사드 설치 말입니다. 그간 미국은 북한이 자체 개발한 장거리 미사일에 핵폭탄을 탑재해 자국 본토를 공격하는 것에 극도로 경계해 왔습니다. 이번 기회에 한반도에 사드를 배치하려고 할 겁니다.”
“……!”
“중국도 그 영향권에 들어가니 무조건 반대할 겁니다. 한중 관계가 악화되면 우리나라 경제가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
“설마 그 지경까지 가겠습니까?”
권성일이 오히려 물었다.
한중 간 연간 교역량은 318조 원으로 일 년 예산과 맞먹을 정도고, 중국인 관광객이 800만 명에 이를 정도로 한국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중국과의 관계 악화는 무조건 피해야 할 일이었다.
진혁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악의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두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서 회장님의 조언을 새겨 두겠습니다.”
권성일도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혁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걱정할 정도라면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반증이었다.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권성일에게 다음 회의가 있어 일어나 나올 수밖에 없었다.
김세동을 찾아갔지만 그 역시 회의에 참석하러 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청와대를 나서는 진혁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한국 정부는 결국 미국의 강력한 압력에 굴복하고 사드 설치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로 인해 중국과의 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눈이라도 오려는지 하늘마저도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알라딘 빌딩으로 돌아오자 김선혁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한지철이 얼른 보고를 했다.
“중국 내 매장은 동업자인 칭광 그룹에 매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간 여러 번 우리 측 지분을 추가 매입해 자신들이 운영하겠다는 뜻을 밝혀 왔습니다.”
“그럼 그쪽에 지분 전부를 넘기는 것으로 하고 전략을 짜 보십시오.”
“알겠습니다만, 문제는 우리가 너무 급하게 매달렸다가는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힘들다는 겁니다. 게다가 불확실한 전망만 가지고 중국 시장에서 전면 철수한다면 주주들의 반발도 클 겁니다.”
잠시 생각하던 진혁이 말했다.
“중국 시장을 포기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지금까지 로드샵을 통한 오프라인에 집중했던 것을 온라인 시장으로 전환하겠다는 겁니다. 알쇼핑과 합쳤으니 설득력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기존 오프라인 영업의 손실은 메이왕 그룹에 납품하는 것으로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메이왕 그룹과의 협력은 좋은 생각이다. 그들에게 지분을 넘길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면 협상에도 유리할 것 같다.”
“좋습니다. 그럼 저는 홍콩으로 건너가서 리카렁 회장을 만나 분위기를 조성해 보겠습니다. 칭광 그룹이 안 되면 메이왕에라도 넘겨야 합니다. 고문님은 한 사장님과 중국으로 건너가서 매각 협상을 진행해 주십시오.”
“그러마.”
“매각가보다는 시기를 서두르는 게 중요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에게 불리합니다.”
다시 한번 서둘러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한 후 각자 바쁘게 움직였다.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
밤늦은 시간에 퇴근한 김세동은 아파트에 도착해 차를 주차시키고 내렸다.
지친 표정으로 집으로 향하는 그에게 진혁이 다가갔다.
“늦으셨습니다.”
“회의가 길어져서. 추운데 왜 나와 있어?”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인근의 벤치에 가서 앉았다.
김세동이 먼저 말했다.
“자네가 청와대에 왔다 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너무 걱정 말게. 북한 문제는 항상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야 해결될 문제야.”
“이번은 쉽지 않을 겁니다.”
“자네가 사드 배치에 대해 우려했다는 말은 들었네. 미국과 함께 중국 정부 설득에 주력하기로 했어. 중국도 이번에는 북한의 도발에 상당히 격양된 사태야. 그들이 북한을 설득해 더 이상의 핵 실험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기로 했네. 극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거야.”
진혁은 암담함을 느꼈다.
김세동도 상황을 너무 안일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을 가지고 강하게 주장만 할 수도 없었다.
믿게 하려면 자신의 비밀을 밝혀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진혁이 말했다.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보다는 자국의 이해에 따라 행동할 겁니다. 한국은 중간에 끼어 양쪽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형국이고요. 문제는 북한이 어떤 결정을 하느냐입니다.”
“우리도 같은 판단이네. 하지만 북한은 결국 중국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을 거야. 정치, 경제적으로 완전히 예속된 상태거든.”
“압니다. 하지만 북한은 항상 위기에 물렸을 때 벼랑 끝 전술로 대응해 왔음을 잊지 마십시오. 북한 정권은 핵 포기는 정권을 내놓으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서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게 설혹 중국과의 관계에 악역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음…….”
그제야 김세동도 사태가 만만치 않다는 것이 느껴졌는지 반박하지 못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