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화. 메이왕과 맞교환
“전 내일 홍콩으로 떠납니다. 중국 현지 매장을 매각하기 위한 협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자네는 여전히 이번 사태를 안 좋게 보는 것 같군.”
“그렇습니다.”
“알겠네. 나도 관계자들에게 자네 생각을 다시 한번 알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 하겠네.”
“거기에 개성공단 문제는 반드시 포함시켜 주십시오.”
“개성공단!”
김세동의 눈이 번쩍 뜨였다.
북한이 결국 벼랑 끝 전술을 택한다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곳이 그곳이었다.
북한의 임금 인상 문제는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사무실에 들렀던 진혁이 신문 기사를 보고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출구 전략을 세워 두라 경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네는 대체……?”
“전 사업가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 상황을 분석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고 대책을 마련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뿐입니다.”
진혁이 미리 준비해 둔 말을 꺼내 김세동의 다음 말을 막았다.
그는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언젠가는 이런 질문을 해 올 거라 생각해 답변을 생각해 뒀었다.
김세동이 잠시 진혁을 쳐다보다가 말했다.
“알겠네. 자네 말대로 개성공단 입주 업체에게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 대비하라고 주의를 주겠네.”
“감사합니다. 들어가시지요. 춥습니다.”
함께 일어나 집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의 발걸음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 * *
다음 날, 인천 공항에서 김선혁이 한지철과 함께 중국으로 떠나자 진혁도 희준을 데리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갑작스런 진혁의 면담 요청에도 리카렁 회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무채혈 혈당 측정기로 서로 연을 맺은 후 메이왕 매장에 알라딘 화장품을 납품하며 관계를 이어오고 있었다.
파노나 인수로 알쇼핑이 홍콩에 진출하면서 도움을 받았고, 최근에는 터키 시장에 진출하면서 덱스론을 제공해 주는 조건으로 메이왕의 터키 시장 물류망을 이용하는 딜도 성사시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갑작스럽게 어쩐 일이십니까?”
“제가 이번에 인수한 한국의 태후 화장품이 중국 내 화장품 전문 매장도 갖고 있습니다. 최근 중국의 성장세가 둔화되고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실적이 정체 상태더군요. 다양한 활용 방안을 고민하다가 차라리 멀티샵으로 전환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무래도 회장님께 먼저 상의드리는 게 도리인 것 같아 찾아온 겁니다.”
“알라딘이 결국 중국 시장에도 진출하는군요.”
리카렁 회장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졌다.
멀티샵의 전환은 H&B 시장에 진출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현재 메이왕 그룹의 매출의 상당 부분이 중국 내 매장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진혁과 알라딘의 능력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리카렁 회장이었다.
지금까지는 사업 영역이 겹치지 않아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업종에 진출한다면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했다.
진혁이 잠시 시간을 두고 말을 이었다.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중국과 별로 친한 사이가 아니다 보니 가능하면 그쪽 시장은 멀리해 왔습니다. 지금도 이런 상황이 썩 내키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태후 화장품 인수를 없던 일도 할 수도 없고, 중국 내 매장을 매각하자니 마땅히 받아 줄 업체도 없고…….”
“우리가 인수하겠다면 매각할 의향은 있으신 거요?”
“회장님이 원하신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전 중국에 직접 진출할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알겠소. 검토할 시간을 조금만 주시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온 김에 이곳저곳 둘러볼 작정입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자 희준이 급히 물었다.
“우리는 연막만 치기로 한 거 아니었어?”
“화교는 그 뿌리를 중국에 두고 있어. 어차피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야. 어설프게 연기했다가는 금방 들통이 날 거야. 진짜 넘길 생각을 가지고 제대로 해야 해.”
“그렇기는 하지만 그러다가 정말로 인수하겠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럼 오히려 땡큐지. 하나보다 둘이 달려들면 매각가는 올라가게 되어 있어. 우리 매장하고 메이왕 매장은 상당 부분 겹쳐.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카렁 회장이 인수를 검토하겠다는 것은, 알라딘의 중국 진출을 막으려는 욕심 때문이야.”
“아이고, 머리야. 뭐가 이리 복잡해. 난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야겠다.”
희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치열한 머리싸움이 시작됐다.
홍콩에서는 진혁과 리카렁, 중국에서는 김선혁, 한지철과 칭광 그룹이 상대의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매각가를 유리하게 가져가려는 수 싸움을 벌였다.
그 시각 한국은 북한에 대한 제재안과 미국 측이 요구한 사드 배치 문제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중국 측이 강력한 경제 보복을 할 것이라며 연일 경고하고 있었고, 국민 중 일부도 자주 주권을 이유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광화문 광장에는 찬반 양측의 촛불 집회가 매일 열렸다.
* * *
관광의 도시 홍콩이라 둘러볼 곳은 많았다.
그러나 신이 난 희준에 비해 진혁은 표정이 좋지 못했다. 리카렁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없는 데다 중국의 협상도 쉽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다.
한가하게 관광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때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홍콩의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리카렁 회장과 저녁을 함께 했다.
세계 곳곳의 유명 식당과 관광지를 소개하는 미쉐린 가이드에 소개될 정도 유명한 레스토랑이라 가격도 비싸고 예약은 더 힘든 곳이었다.
식사 내내 세계 경기와 이런저런 신변잡기만 늘어놓는 리카렁 회장의 태도에, 진혁은 함께 나온 와인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맞장구만 쳤다.
이전 삶에서 중국인 특유의 ‘만만디’ 전법에 여러 번 당하면서 체득한 진혁의 대응법이었다.
결국 리카렁 회장도 계속해서 변죽만 울리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서 회장님은 세계의 어떤 사업가보다 우리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한중 간 상인의 거래는 양나라가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게 당연하지요.”
“회장님이 이곳에서 저와 만나는 사이 실무자들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칭광 그룹과 지분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더군요. 어떻게 된 겁니까?”
이 정도 질문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리카렁 회장의 날카로운 추궁에도 진혁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답했다.
“사업가가 매각가를 높이기 위해 복수의 매수인과 협상하는 것은 흉이 아니지요. 또 만일의 경우도 가정해야 하고요. 회장님이 손해가 나는데도 저와의 의리를 생각해 중국 내 매장 지분을 높은 가격에 인수해 주실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
진혁의 절묘한 답변에 리카렁 회장의 말문이 막혔다.
자신이라도 당연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진혁이 말했다.
“한국에서 다각도로 검토해 봤는데, 우리 매장이 메이왕 매장과 겹치는 지역이 꽤 되더군요. 중복 투자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고 판단해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중국에도 협상단을 파견한 겁니다.”
“정확한 분석이십니다. 우리 측 실무자들도 같은 의견입니다. 인수해도 시너지 효과보다는 매장 중복에 따른 손실 비용이 클 거라는 우려가 담긴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당연히 그런 결론이 나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안의 필요성이 생긴 거고요.”
진혁은 솔직히 털어놨다.
리카렁은 어설픈 연기로 속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차피 이쪽은 칭광 그룹을 압박하고 버릴 패였다.
리카렁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물었다.
“북한의 핵 실험으로 인해 한국이 시끄럽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남북은 물론 미중, 한중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하다고 하더군요.”
“그렇습니다. 그래서 중국 내 매장을 서둘러 정리하려는 겁니다.”
“그런 결정은 미래의 전망을 굉장히 어둡게 보신다는 건데…….”
리카렁의 고민이 깊어졌다.
진혁은 사업가로서도 그렇지만 ‘검은 머리 짐’이라 불릴 정도로 투자가로서도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서둘러 중국 시장 철수를 결정했다면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하지만 그건 한국에 해당되는 문제였다. 그들의 떠난 빈자리가 메이왕에게는 중국 시장을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리카렁 회장이 마음을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실무자들은 우려를 나타냈지만 나는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예?”
“메이왕에서 과거 태후 화장품의 매장의 중국 내 매장 지분을 인수하지요.”
전혀 의외의 결론에 지금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해 오던 진혁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졌다.
“저야 감사한 말씀이지만 왜 손해가 나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중국만 보면 우리가 손해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한국까지 감안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한국요?”
“메이왕의 한국 내 매장이 130개나 됩니다. 그런데 한국 화장품 회사들이 직영하는 로드샵들의 공격적인 마케팅 때문에 여전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화교의 힘으로 중국 관광객을 유치하며 버티고 있는데, 그마저도 어려워진다면 우리 역시 심각하게 사업 철수를 고민해 봐야 합니다.”
한류 바람을 탄 K-뷰티의 영향으로 한국 화장품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었다.
외국인 관광객들의 쇼핑 목록 중에 제일 위에 있는 것이 화장품일 정도였다.
이에 각 회사들이 직영 로드샵을 통한 각종 할인 행사로 관광객들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자사 상품으로 가격 경쟁력을 갖춘 데다 ‘○○데이’ 하는 형식으로 거의 매일 할인 행사를 열고 있으니, 외국 기업인 데다 납품받아 판매하는 메이왕이 고전하는 것은 당연했다.
리카렁 회장이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알라딘의 중국 지분과 우리의 한국 지분을 맞교환하는 것으로 하시지요. 서로 강점을 가진 시장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회장님의 넓은 혜안에 탄복했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진혁이 진심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 제대로 배웠다.
감탄은 감탄이고, 결정이 급작스럽게 바뀌는 바람에 문제가 생겨버렸다.
중국에 있던 김선혁과 한지철을 당장 홍콩으로 건너오게 했다.
희준을 포함해서 네 명이 호텔방에 모였다.
진혁이 리카렁 회장과 합의한 내용을 들려주었다.
“잘했다. 칭광 그룹은 거의 거저먹으려고 하더라. 그들보다는 메이왕이 훨씬 낫지.”
“중국 매장만 보면 그렇지만 한국의 메이왕 매장 인수는 기존 가맹점과의 관계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태후 화장품의 로드샵은 150개가 넘었다. 그중의 90% 이상이 대리점 형태였다. 가맹점주들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다.
진혁이 말했다.
“로드샵과 멀티샵은 다른 사업 영역입니다. 가맹점주들이 원한다면 멀티샵으로의 전환을 본사에서 지원하는 방안을 제시해도 됩니다. 매각을 원한다면 우리가 인수해서 직영 체제로 운영해도 되고요. 몇 년 전부터 로드샵에 대한 한계에 대한 우려의 말들이 나왔습니다. 그때 마침 한류 바람이 불면서 중국인 단체 관광객과 다이궁(보따리상)들이 한국 화장품들을 싹쓸이 해 주는 바람에 지금까지 버텨온 겁니다.”
“회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내수 침체와 온라인 시장의 확대, 중저가 브랜드의 범람으로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관광객들을 유인할 방법은 신제품 개발인데, 그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관계로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할인 경쟁 카드를 꺼내든 건데, 제 살 갉아먹는 짓이라 매출은 증가하는데 이익은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H&B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꼭 내 상품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잘 팔리는 상품을 가져다 팔면 됩니다. 지금의 로드샵에는 그 회사 제품이 필요한 사람만 찾아왔다면, 이제는 아무나 쉽게 방문해서 쇼핑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될 겁니다. 그에 따른 유무형의 시너지 효과가 상당합니다.”
진혁의 설득에 한지철이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