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리틀 지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회장님의 말씀대로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메이왕과의 이번 지분 맞교환은 다른 관점에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번 사태로 한중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될 겁니다. 여러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단기간에 풀리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간 중국에 의존했던 분야 곳곳에서 큰 공백이 생기게 됩니다. 그 대안으로 동서남아시아 시장이 떠오를 겁니다.”
“……!”
“메이왕 그룹은 아시아에서 입지를 단단히 굳히고 있습니다. 그들과 손잡을 수 있게 된 것은 큰 행운입니다. 이번 기회를 잘 이용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다들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중국 내 매장을 정리하는 일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H&B 사업을 시작하고 동서남아시아 사업을 확대하는 큰 프로젝트였다.
JP모건에 의뢰해서 양 사업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가 이루어졌다.
알라딘의 중국 내 매장의 전체 지분과 메이왕의 한국 지분 51%를 맞교환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더불어 알라딘 화장품에 대해서 메이왕 매장에서 판매를 맡아 준다는 조건을 포함시켜 중국 내 판매에 대한 물꼬도 터놨다.
합의서에 사인하면서 진혁과 리카렁 회장은 이번 양사의 협력을 계기로 향후 아시아 시장에서도 협력을 이어가자며 악수를 나눴다.
* * *
한국으로 돌아온 진혁 일행이 알라딘 빌딩으로 가자 먼저 와서 기다리는 이들이 있었다.
AK유통에서 프랜차이즈 사업 본부장을 맡고 있는 김상조 이사와 AM화장품의 아자데 사장.
그리고 구필준 알라딘 연구소장까지.
다들 갑자기 불려온 터라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진혁이 한국의 메이왕 매장을 인수해 H&B 사업을 시작하게 됐음을 알렸다.
“알라딘에서 마침내 멀티샵을 가지게 됐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아자데가 당장 반색했다.
여자인 데다 H&B 매장이 편의점만큼이나 곳곳에 설치된 유럽에서 생활했던 아자데라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하지만 김상조는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아직 활성화가 되지 않아 일부 젊은 여성들만 이용하는 곳이라 그에게는 낯선 곳이었다.
구필준은 경우는 더 했다.
그는 평생 H&B 매장 근처는 가 본 적도 없는 데다, 자신이 왜 이 자리에 불렸는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한지철이 그들에게 H&B 사업에 대해 간략하게 알려 줬다.
“헬스 앤 뷰티 매장은 건강과 미용 관련 용품을 판매하는 곳인데, 화장품 판매의 비중이 50%가 넘습니다. 직영과 대리점이 혼합된 형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한국의 화장품의 오프라인 판매는 로드샵이라는 단일 브랜드만 취급하는 전문 매장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브랜드에 구애 받지 않고 건강과 여성용품까지 팔리는 제품을 모두 갖춘 멀티샵으로 빠르게 전환될 겁니다. 우리가 그 시장을 먼저 선점해서 주도해 나가야 합니다.”
그제야 김상조의 눈이 반짝였다.
음식이 화장품으로 바뀌었을 뿐, 대리점을 모집하는 방식이라면 프랜차이즈 사업이었다.
진혁은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구필준을 보고 말했다.
“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기존 로드샵은 매장에 손님이 들어오면 직원이 일대일로 상품을 설명하고 권하는 고전적인 판매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는 그런 관심을 오히려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전 상품 설명을 컴퓨터로 했으면 합니다.”
“컴퓨터로요?”
“그렇습니다. 손님이 관심이 있는 제품을 가져다 바코드를 대면 상품 설명이 자동으로 나오게 하는 겁니다. 물론 그 자리에서 바로 계산을 할 수 있는 기능까지 추가하면 금상첨화고요. 계산까지 마쳤으니 굳이 직원과 부딪힐 필요도 없겠지요. 이런 기능의 구현이 가능하겠습니까?”
“그 정도는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당장 개발에 착수하겠습니다.”
구필준도 진혁이 왜 자신을 이 자리에 불렀는지 알게 되었다.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했다.
진혁이 이번에는 한지철에게 물었다.
“멀티샵으로 가면 다른 회사 제품도 공급받아야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중소기업들은 환영하겠지만 대기업은 자사 로드샵 때문에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너무 무리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입니다. 우선은 중소기업들을 적극 공략해 주세요. 가능하다면 독점 계약이나 지분 투자로 우리에게 우선 납품할 수 있도록 유도하세요.”
“알겠습니다.”
진혁이 이어 아자데에게 말했다.
“아자데 사장님은 외국 브랜드의 제품 공급을 도와주시고, 더불어 한국의 유망 중소기업 제품에 대한 조언도 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세계 화장품 시장의 흐름에 대해 제일 잘 아는 이가 아자데였다.
진혁이 모두를 둘러보고 말했다.
“전 알라딘의 H&B 매장을 단순히 화장품이나 여성용품을 파는 판매장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친구를 기다리거나 집에 가는 길에 들러 실속 있으면서도 편안하고 재미있게 구매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생각입니다. 1층은 매장, 2층은 커피숍의 컨셉도 좋고요. 알쇼핑, 알라딘 페이와 연계해 포인트와 결제도 가능하게 하고, 첨단 스마트 기술을 구경할 수 있는 체험장의 개념을 도입해 보고도 싶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무인화 운영까지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진혁의 이어지는 말에 다들 몽롱한 시선으로 변했다. SF 영화에서나 나옴직한 꿈같은 이야기였다.
다만, 구필준만이 초롱초롱한 시선을 하고 있었다.
이제야 진혁이 세운 계획의 실체가 보였다.
자신 같은 4차 산업 기술자들이 꿈꾸는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진혁이 다시 김상조를 보고 말했다.
“대중 관계의 경색으로 교역량과 관광객이 줄면 대체 시장으로 동서남아시아가 급부상할 겁니다. 그간 정체됐던 관광객 유치와 ‘알라딘과의 할랄 여행’ 사업의 활성화도 같이 고민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김상조의 목소리에 활기가 넘쳤다.
이어진 회의에서 각자의 역할에 대해 논의하고 앞으로 계획도 수립했다.
* * *
며칠 후 진혁은 기자들을 불러 모아 메이왕의 지분을 인수해 ‘리틀 지니’라는 브랜드로 H&B 사업에 진출하게 됐음을 밝혔다.
진혁이 ‘리틀 지니’라는 이름을 내놓자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알라딘에 나오는 램프 요정 ‘지니’에 주 타깃인 젊은 세대를 의미하는 ‘리틀’의 합성어였다.
평소라면 뜨거운 관심이 쏟아졌겠지만 북한 핵 실험과 사드라는 메가톤급 이슈에 묻혀 버렸다.
그러건 말건 진혁은 ‘리틀 지니’ 사업에 매달렸다.
알라딘 H&B 사장이 된 김상조는 기존 로드샵 가맹점주들을 상대로 멀티샵 전환을 알리고 참여를 유도했다.
한지철도 다른 업체들을 상대로 리틀 지니 매장에 납품 의사를 타진했다.
예상대로 자체 판매망이 미약한 중소기업들은 적극 환영했지만 대기업들은 난색을 표했다.
한지철은 진혁의 조언대로 중소업체에 집중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침내 그 결과를 보고 받는 날이었다.
한지철이 아자데와 함께 들어왔다.
왠지 흥분한 얼굴이었다.
“우리나라에 좋은 제품을 만드는 업체가 이렇게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한지철이 말했다.
태후 화장품 시절 제일 스트레스를 받은 게 바로 신제품 개발이었다. 소비자들은 만족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원했다.
시간과 돈을 투자해 어렵게 만든 제품도 성공을 보장하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히트 제품이 나오기라도 하면 경쟁 업체에서 바로 비슷한 제품을 내놓는 바람에 오래가지 못했다.
그 마음을 읽고 진혁이 말했다.
“혼자 독식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함께 가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알라딘 그룹의 기업 이념을 ‘동행과 상생’으로 정한 겁니다.”
“제가 알라딘의 합류를 결정한 것도 그런 회장님의 방침에 끌렸기 때문이었어요. 모든 사업과 마찬가지도 화장품도 소비자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아이디어, 신규 브랜드를 론칭하고 직영점을 낼 수 있는 탄탄한 자금력, 가맹점을 운영할 수 있는 네트워크가 기본적으로 요구돼요. 어느 한 주체가 그것을 다 갖출 수는 없어요.”
“맞습니다. 이제 소비자들은 브랜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격과 질, 가성비를 최우선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로 이번 조사는 굉장히 유익했습니다.”
한지철의 뿌듯한 표정을 보며 진혁이 물었다.
“그래서 성과는 좀 있었습니까?”
“많은 업체에서 우리의 제의를 적극적으로 반겼습니다. 심지어는 당장 계약하자는 업체도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 반응이 좋던가요?”
“그게 다 모두 회장님 때문입니다.”
“저 때문이라고요?”
“솔직히 그동안 대기업들이 ODM 업체를 상대로 이런저런 갑질이 좀 심했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은 동행 사업을 포함해 여러 가지 일을 벌이면서 어려운 이웃들과 상생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습니까? 거기에 4차 산업 벤처 기업에 대한 투자도 적극적으로 하시는 것이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좋은 평을 듣고 있다니 기분은 좋았다.
한지철이 조사 결과와 함께 가지고 온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놓는 모습에 진혁이 물었다.
“그건 뭡니까?”
“아주 재미난 제품인 것 같아서 샘플로 얻어 왔습니다. LED 마스크 팩이라는 겁니다.”
“신기하네요.”
호기심이 느껴져 이리저리 만져 봤다. 얼굴에 붙이는 일반 마스크 팩과는 달리 가면같이 생긴 외관에 안에는 LED가 붙어 있었다.
아자데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120개의 LED 칩이 근적외선과 자외선을 발산시켜 피부의 탄력성과 수분율을 상승시키고 피부 결을 향상시키는 제품이에요. 일부 클리닉에서만 VVIP 고객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도 가능하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어요. 한국이 화장품 강국인 이유를 알게 됐어요.”
“클리닉에서 케어 받으려면 비싼 비용과 별도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반면, 이 제품을 구입하면 가정에서 일상생활을 하다가 15분만 투자하면 되니 분명히 크게 히트칠 겁니다.”
“이 정도면 상당히 고가일 것 같은데요?”
“물론 일반 제품에 비해서 비싸지만, 대량 주문을 하면 가격은 최대한 맞춰 주겠다고 했습니다.”
“회장님도 중동에 얼마나 많은 졸부가 있는지 잘 아시잖아요. 아마 없어서 못 팔 겁니다.”
“조건은요?”
“지분 투자는 받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도 해외 판매권은 우리에게 넘길 의향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조건 잡으세요.”
진혁이 결정에 두 사람 모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후 한지철이 조사한 업체에 대한 보고를 했는데, 하나같이 뛰어난 제품을 보유하고 있었다.
지분 투자 가능한 곳과 독점 공급 계약이 가능한 곳, 단순 납품만 원하는 곳들이 자세히 표기됐다.
진혁이 빠르게 훑어보고 말했다.
“이대로 진행하십시오.”
“아니, 회장님. 좀 더 자세히…….”
“알라딘 그룹은 책임 경영 체제입니다. AK화장품은 한 사장님이 주인입니다. 생산은 황진선 부사장님께 맡기고 한 사장님은 제품군 확충에 주력해 주세요.”
“거봐요. 내가 캡틴이 분명 이렇게 말할 거라고 했잖아요. 오늘 술은 한 사장님이 사는 겁니다.”
두 사람은 진혁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를 가지고 내기를 한 것 같았다.
잠시 웃음이 지나가고 나서 아자데가 진혁에게 말했다.
“다른 업체는 그 정도로 계약을 맺으면 될 것 같은데, 마스크 팩 제조사 중 하나는 인수했으면 해요.”
“특별히 마스크 팩에 욕심내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글로벌 마스크 팩 시장 규모가 매년 급격히 상승해 작년에는 50억 달러를 넘어섰어요. 2020년에는 100억 달러 시장이 될 거라는 전망이 있어요. 중국이 그중 절반을 차지하고 있어요.”
“혹시 마음에 드는 업체가 있었습니까?”
진혁의 물음에 아자데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