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급박해진 정세
인도를 거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정국이 다시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인공 지능과의 바둑 대결로 잠시 묻혔던 사드 배치 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찬반양론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격렬하게 부딪히며 각종 게시판을 달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잊혀져 고통받는 것은 개성공단 폐쇄로 피해를 입은 입주 기업들이었다.
정부의 전향적인 대책을 촉구하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려 주목받지 못한 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외부의 혼란과는 상관없이 알라딘 그룹은 ‘동행 한마당’ 행사 준비 관계로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출근하자마자 진혁은 직원들과 함께 신사동의 가로수길을 찾았다.
사거리 코너 목 좋은 곳에 ‘리틀 지니’ 1호 매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입구에서 기다리던 한지철과 구필준이 안내를 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모던한 스타일로 깔끔하게 인테리어 된 실내는 쾌적한 느낌이 들었다.
카운터에 서 있던 직원이 가벼운 묵례로 인사만 했다.
한지철이 말했다.
“고객이 최대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쇼핑하실 수 있도록 대면을 최소화하게 교육시켰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상품 구매는 어떻게 하는 겁니까?”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번에는 구필준이 제품을 하나 집어 들고 벽 쪽으로 다가갔다. 여러 대의 터치스크린이 나란히 서 있었다.
구필준이 그중 하나를 건드려 화면이 나오게 하고 옆에 있는 스캐너 판에 제품을 올려놓았다.
“일반 바코드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 QR 코드를 만들어 붙였습니다.”
2차원 매트릭스 형태로 이루어진 바코드가 QR 코드였다.
“고객님께서 고르신 제품은…….”
음성과 함께 스크린에서는 제품에 대한 상세 설명이 나왔다.
“마음에 드는 경우 즉시 구입이 가능합니다. 알페이, 신용카드, 모두 가능합니다.”
구필준이 화면을 조작하자 결제 화면으로 넘어갔다.
“편리하게 만들어졌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잠시만요.”
자리를 이동하려는 진혁을 막고 구필준이 다시 몇 가지 조작을 하자 진혁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이건 내장 카메라로 비쳐지는 실제 모습입니다. 지금 가져오신 제품을 사용했을 때의 모습을 보여 주는 AR(증강 현실)입니다. 맞춤형 화장법 애플리케이션인데, 제품을 고른 후뿐만 아니라 고르기 전에 자신에 맞는 제품을 소개해 주는 인공 지능 기술이 적용됐습니다.”
“재미있군요.”
“앱만 다운받으면 굳이 이 기계가 아니라도 본인의 핸드폰을 통해서도 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잘 만드셨습니다.”
1층에 이어 2층까지 H&B 매장이었다.
3층은 카페로 꾸며져 있었는데 다른 곳과 달리 테이블이 없고 중간에 덩그러니 부스만 놓여 있어 썰렁하다는 느낌마저 받았다.
하지만 4차 산업 기술의 핵심 역량을 모두 투입한 스마트 공간이었다.
부스로 다가가자 이상하게 생긴 기계를 보고 구필준이 말했다.
“로봇 바리스타입니다. 사람의 팔과 같이 다관절로 이뤄져 있어 넓은 작동 범위와 자유로운 움직임으로 커피를 제조할 수 있습니다. 커피 한 잔을 제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1분 안팎일 정도로 작동 속도가 빠릅니다. 아메리카노부터 카페라떼, 카푸치노, 바닐라라떼까지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주문은 어떻게 합니까?”
“여기 있는 키오스크 패드로 하시면 됩니다. 결제 방식은 아래에서 보셨던 것과 같습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해 보겠습니다.”
주문을 마친 구필준이 진혁을 창가로 데리고 갔다. 스탠드 테이블이 길게 설치된 너머로 가로수길이 환하게 보였다.
“주문하신 커피 나왔습니다.”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돌아선 진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니봇입니다. 줄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이렇게 구경하면 알아서 가져다주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이야 한가하지만 손님이 많아지면 복잡해서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요?”
“자율 주행차 기술을 활용해 충돌의 위험성은 전혀 없습니다. 돌발 상황에 대한 실험도 모두 통과했습니다.”
진혁이 신기한 표정으로 쟁반에 놓여 있는 테이크아웃 잔을 집어 들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인사를 하고 돌아가는 지니봇을 보며 커피를 맛봤는데 괜찮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진혁을 데리고 구필준이 다음으로 간 곳은 벽으로 막힌 공간이었다.
“VR(가상 현실) 체험관입니다. 여기 안경을 써 보십시오.”
구필준을 건네준 안경을 받아 쓰자 허공에 터치스크린이 나타났다.
“운전, 비행, 게임 등 모든 시뮬레이션에 대한 체험이 가능합니다. 최대 열 명까지 동시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 삶에서 봤던 모습의 일부가 이곳에 구현되어 있었다.
얼마간 체험을 마친 진혁이 안경을 벗고 물었다.
“이 정도 시설을 갖추려면 비용이 상당할 것 같은데, 채산성이 맞겠습니까?”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 개발비며 제작비가 많이 들었습니다만, 매장이 늘어나고 활성화되면 가격을 많이 낮출 수 있습니다. 보통 이 정도의 매장을 운영하려면 못해도 열 명 이상은 둬야 하는데 여긴 한 명의 인원으로 충분하니 인건비가 90%가 절감됩니다. 3년이면 투자비 회수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번 답은 한지철이 했다.
“가맹점주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반반입니다. 하지만 이곳을 보면 아마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그래도 부정적인 분들은 매입해 직영으로 운영할 예정입니다.”
“어려우신 분들일 테니 최대한 설득해 보세요. 필요하다면 알라딘 은행을 통한 저리 대출도 고민해 보시고요. 더불어 함께 가는 게 알라딘의 기본 방침입니다.”
“알겠습니다.”
한지철의 대답을 들은 진혁이 위층을 바라보고 물었다.
“위에는 또 뭐가 있습니까?”
“물품 보관소입니다.”
“물품 보관소요?”
“아무래도 관광객들이 많이 찾을 것 같아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했습니다. 편하게 짐을 맡겨 놓고 관광할 수 있도록요.”
“잘하셨습니다. 당분간 리틀 지니는 수익보다는 홍보에 주력하십시오. 매장을 천 개 이상으로 늘리도록 계획을 세우세요.”
“헉. 천 개요?”
“뭘 그렇게들 놀라십니까. 금방 채워질 테니 걱정 마십시오.”
진혁의 자신감에 다들 혀를 내둘렀다. 기존 태후 화장품 직영점과 메이왕 매장을 다 합쳐야 300개에 불과했다.
진혁은 그런 반응을 싹 무시하고 물었다.
“오픈은 언제입니까?”
“이번 주말입니다. JHC 측에서 소속 연예인을 보내 주기로 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최선을 다해 준비는 하되 너무 무리하지는 마십시오. 이건 굳이 알리지 않아도 고개들이 찾아올 겁니다.”
다시 한번 확언을 한 진혁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매장을 나왔다.
* * *
월요일.
김선혁이 준비 상황을 보고했다.
“AM, AA, AS는 목표 대비 90%을 달성했다. 문제는 AK인데, 나까지 나서서 독려하는데 좀처럼 참여율이 올라가지 않는다. 현재 60% 대에 머물고 있다.”
“이유가 뭡니까?”
진혁이 고개를 팍 숙이고 있는 고용준 회장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역량을 믿지 못하는 게 제일 큽니다.”
“그래서 선주문을 넣어 준다고 했잖습니까?”
“중국 쪽 물량을 맞추느라 더 이상의 주문은 힘들다는 답변들입니다.”
“이번 축제는 한류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최대한 독려하세요.”
“……알겠습니다.”
답을 하는 고용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얼마간 더 보고를 받던 진혁은, 옆에 놓아 둔 핸드폰이 진동하자 놀란 표정으로 얼른 받았다.
“장모님이 왜 이 시간에……. 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여기 일은 걱정 말고 얼른 가 봐라. 출산할 때 옆에 없으면 평생 바가지 긁힌다.”
“회장님만 믿고 갑니다.”
진혁이 서둘러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 혜주 동생이 세상에 나오려는 모양이었다.
입이 가벼운 희준이 떠드는 바람에, 이번 출산이 예정일보다 늦어 진혁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 * *
혜성이 태어나자 진혁은 가능한 한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입에 댓 발이나 튀어나온 것은 희준이었다. 진혁의 업무 시간이 주니 대신 희준이 그 공백을 메워야 했다.
물론 자발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럼 네가 회장하든지?”
진혁은 단 한마디로 항의를 묵살해 버렸다.
오늘도 일찍 퇴근해 혜성을 데리고 놀던 진혁이 핸드폰에 찍힌 번호를 보고 얼른 받았다.
중국의 곽양 사장이었다.
“곽 사장님이 어쩐 일이십니까?”
-큰 행사를 계획하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알라딘을 세상에 알릴 때가 된 것 같아서 준비했습니다.”
-그 일에 이치도 동참하게 해 주십시오.
“이치도요?”
진혁이 되물었다.
아무리 색채를 지우려고 노력한다지만 이번 행사는 무슬림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알리바마의 독신절에 대항하는 행사인 데다 최근 경색된 대외 관계를 고려해 중국 시장은 배제했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무슬림 인구가 천만 명이 넘습니다.
“아, 신장 자치구!”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달라이 라마가 있는 티벳만큼이나 독립 의지가 강해 중국 내 화약고 같은 존재였다.
모두가 중국 공산당의 종교 탄압 때문이었다.
스스로를 위구르스탄 또는 동투르키스탄이라 부르는 무슬림인들로, 중국의 인종 차별 정책에 맞서 투쟁하고 있었다.
곽양의 말이 이어졌다.
-그쪽 소비자들이 라이나 왕비님의 트위터에 올라온 글을 보고 연락해 줘서 알게 되었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낙후된 지역이라 가격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다른 지역들로 마찬가지고요. 할인율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의외의 매출이 오를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담당자가 전화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진혁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는 매출을 걱정한 게 아니었다.
자신이 신장 위그루와 관계되면 중국 정부가 곽양에게 어떤 위해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이 들었다.
하지만 곽양은 매출만 바라보고 있었다.
* * *
한국 기업들의 참여율이 저조한 것을 제외하고 모든 준비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 의외의 변수가 터졌다.
북한은 노동 신문을 통해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이 대성공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국방부는 발사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공중 폭발이 일어나 실패라며 반박했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에게는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북한이 강도 높은 국제 사회의 비난에도 연달아 도발하는 것에 격분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극한 대치 정국으로 치닫다가는 정말 전쟁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불안해했다.
그런 불안감 때문인지 국가 안보를 위해 하루 빨리 사드를 배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급격하게 높아졌다.
반대로 우려의 목소리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여론이 한쪽으로 쏠리자 결국 권성일 대통령은 미국과 사드 배치에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당장 환영의 뜻을 내비쳤지만 중국은 아니었다.
공언한 대로 경제 보복이 단행됐다.
자국민의 한국 관광을 막고, 강도 높은 검역으로 한국 제품의 수입을 억제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에게는 세무 조사라는 칼을 들이댔다.
요우커와 중국 수출에 목을 매고 있던 한국 기업들 사이에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다.
한편,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AK가 딱 그런 경우였다.
“새한 그룹이 참여하겠다고 합니다.”
“나성 화장품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최대 판매 시장인 중국 판매가 막혀버리자 기업들은 알라딘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제품, 할인율 최소 50%, 선주문은 없습니다. 그 조건을 수락하는 곳만 받아 주십시오.”
진혁은 냉정하게 결정했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가는 지불하게 해야 했다.
* * *
AK가 몰려드는 입점 신청으로 정신없을 때 진혁은 청와대로 들어갔다.
권성일의 얼굴은 더 까칠해져 있었다.
“결국 서 회장이 우려하신 대로 흘러갑니다. 서 회장님도 내가 너무 성급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미 지난 일입니다. 눈앞에 닥친 일을 해결하는 것만도 벅찹니다.”
“맞습니다. 이미 시위는 화살을 떠났습니다. 결정을 되돌릴 수 없으니 피해를 최소화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서 회장님이 준비한 ‘동행 한마당’의 성공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상황입니다. 기업과 국민들에게 중국 외에도 다른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알라딘 식구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진혁이 적당히 답했다. 어설프게 확신을 줬다가는 코가 꿰일 수 있었다.
권성일의 시선을 받은 이현국이 입을 열었다.
마침내 본론이 나올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