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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38화 (238/307)

238화. 털어먹기

잠시 절망하던 진혁이 이내 허리를 곧추세우며 자세를 바로 했다.

절망하고 도망치는 것은 한번으로 족하다. 그때 라이꾸두 회장에게 말한 것처럼 당당히 맞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냉정해야 했다.

방금 전 흥분한 자신을 막아 준 김상균의 처신에 고마움이 느껴졌다.

“호텔로 가서 쉬어야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이런 급박한 상황에 쉬겠다는 진혁을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선병식이 억지로 답했다.

호텔로 간 진혁은 일부러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팽팽히 당겨진 긴장의 끈을 끊는 데는 그만한 게 없었다.

하지만 머리를 어지럽히는 생각과 걱정들로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그래도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가족을 챙기며 중동을 다녀온 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급히 온 터라 피곤이 쌓여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진혁이 샤워를 하고 나오자 김상균과 선병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밤을 샌 듯 눈이 까칠한 얼굴에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물었다.

“보고하세요.”

“테홍녠은 지린성 출신의 1세대 화교로, 맨손으로 말레이시아로 건너와 신발 공장 노동자로 일하다가 고무 사업을 시작하며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지난 탕분헝 총리 시절 반화교 정책에도 불구하고 테홍녠만이 승승장구했습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하에 가스까지 사업 영역을 넓혀 개인 자산만도 150억 달러의 거부가 됐습니다.”

“공략할 방법은 찾았습니까?”

“그게…… 쉽지 않습니다. 현 팡기텍 총리와도 사이가 좋아 호텔업과 부동산까지 진출해 승승장구하고 있습니다. 동남아 주요 도시는 물론 중국 대륙에도 진출해 호텔 체인 사업을 벌이면서 말레이시아 재계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음…….”

푹 자고 일어나 밝았던 진혁의 표정이 침울하게 변했다. 말레이시아는 테홍녠의 세상이란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상균이 펼쳐 놓은 노트북을 보며 보고를 이었다.

“올 초에 팡기텍 총리가 비리 스캔들에 몰려 위기에 처한 적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잠시만요. 비리 스캔들이라고요?”

“국영 투자 기업인 말레이 홀딩스의 자금 일부가 비자금으로 조성됐다는 의혹입니다.”

“제가 좀 보지요.”

진혁이 노트북을 빼앗듯이 가져와 살폈다.

“탄핵 시위까지 있었지만 얼마 전 열린 지방 선거에서 압승하며 유야무야됐습니다.”

김상균이 말을 무시하고 자료를 꼼꼼히 살폈다.

채권 발행과 무기 도입 과정에서 수십억 달러를 뇌물로 건네받았다는 의혹이었다.

시위가 벌어지자 팡기텍 총리는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진압하고, 조사 책임자인 검찰국장은 물론 반부패 위원장까지 교체하며 강압적인 방법으로 불만의 목소리를 눌러 버렸다.

“서슬 퍼런 진압과 검찰의 수사 종결발표로 의혹은 흐지부지되었고, 선거 압승으로 이제는 잊힌 일이 되었습니다.”

김상균의 말이 이어졌지만 진혁의 머릿속으로 밀려드는 기억으로 듣지 못했다.

지난 삶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국제뉴스 기사 제목들이 떠올랐다.

노 총리의 귀환.

전임 총리 비자금 재조사 지시.

말레이 홀딩스 비자금 총책.

중국으로 도피.

진혁이 입이 갑자기 열렸다.

“놈을 잡아야 합니다.”

“……?”

“비자금을 관리하는 놈이 있습니다. 팡기텍 총리의 양아들일 겁니다.”

진혁이 기억을 짜내 한 말에 김상균이 얼른 노트북을 가져다가 자료를 뒤졌다.

“찾았습니다. 로버트 호. 미국계 중국인으로 UCLA에서 MBA…….”

“놈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세요. 당장.”

진혁의 지시가 채 끝나기도 전에 김상균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도 이제 진혁의 스타일에 적응하고 있었다.

얼마 후 김상균의 핸드폰이 울렸다.

“마카오에 있답니다.”

“당장 갑시다.”

“준비하겠습니다.”

김상균이 급히 일어나 나가자 진혁이 선병식을 보고 말했다.

“우리는 놈을 잡으러 가겠습니다. 선 회장님은 남아서 계속 배송망 확보 방법을 찾아보세요.”

“알겠습니다만…….”

“최악의 경우 우리 직원들이 직접 들고 뛰는 한이 있더라도 사업을 멈추는 건 안 됩니다. 한번 신뢰를 잃어버린 고객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진혁의 지시에 선병식이 나약해졌던 마음을 다잡았다.

* * *

마카오는 카지노로 대변되는 환락의 도시였다.

포르투칼 식민지였다가 홍콩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반환되어 특별 행정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호텔방을 잡고 기다리자 찾아온 이가 있었다.

일본에서 건너온 이춘섭이었다.

김상균은 한국에서 알라딘 시큐리티 직원들을 부르자고 했지만 진혁이 막았다. 시간이 촉박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실패했을 때 알라딘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래서 선택된 게 이춘섭이었다.

김상균이 소개해 준 이라 서로 안면이 있었다.

반가울 텐데도 상황이 급박해 눈인사만 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확인됐습니까?”

“겨우 찾아냈습니다. 말레이 여권 대신 조세 회피지인 케이만 제도 여권을 사용하는 바람에 찾는 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택한 것도 말레이시아와 범죄인 인도 협정이 체결되지 않아서인 것 같습니다. 아주 용의주도한 놈입니다.”

“급하게 출발하셨을 텐데 많이 파악하셨습니다.”

“야쿠자 쪽 도움을 받았습니다. 마카오는 세계 졸부들이 모여드는 곳이라 각국의 조직들이 모두 들어와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한국의 주먹들도 상당수 들어와 있는 것으로 압니다.”

“회장님이 알라딘과의 개입을 피하라 하셔서 너에게 부탁한 것이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런 일은 저 같은 놈에게 맡기시는 게 최선입니다. 제가 아주 탈탈 털어내겠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이춘섭이 인사를 하고 나갔다.

공항에서 바로 왔기 때문에 이곳 야쿠자 조직을 만나 보다 자세한 정보를 얻어 와야 했다.

김상균이 말했다.

“우리도 이런 일에 대비해 해외 외곽 조직을 확대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알라딘이 성장할수록 더 강한 상대가 나타날 겁니다. 그때를 대비해 준비해 주십시오. 자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낌없이 지원해 준다는데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시간도 되기 전에 돌아온 이춘섭이 보고를 했다.

“아주 지저분한 놈입니다. 큰돈이 생기자 흥청망청 쓰고 다닌답니다. 이곳과 홍콩을 오가며 초호화판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영화 사업을 하겠다며 할리우드로 가 여자 연예인들에게 고가 선물을 안기며 난봉질도 했더군요. 이곳에서도 돈을 물 쓰듯이 쓰니 카지노에서 VVIP 대접을 받으며 매일 여자를 바꾼답니다.”

“더러운 놈.”

“현재 MGM 카지노에서 경비를 맡고 있는 것까지 확인했습니다.”

“잡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이곳은 돈이 곧 법입니다. 더 큰 돈을 제시하면 부모도 팔아먹는 곳입니다.”

“돈은 걱정 마시고 빠른 시일 내에 잡게만 해 주십시오.”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실 것 같아서 이미 이야기를 해 놨습니다.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이춘섭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그날 밤이 다 가기도 전에 연락을 받고 시내 외곽으로 갔다.

공사 중인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험상궂게 생긴 일단의 사내들이 서 있다가 한 곳으로 안내했다.

오면서 세운 계획대로 이춘섭이 중간에 서고 김상균과 서진혁이 좌우에서 호위하듯 따랐다.

짓다 만 방 중앙에 사진에서 본 로버트 호가 의자에 묶인 채 있었다.

잡혀 오면서 반항하다 맞았는지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고 얼굴 여기저기 부풀어 올라 있었다.

갑자기 등장한 양복 입은 사내들의 모습에 로버트 호가 바로 으르렁거렸다.

“네놈이 이 일의 주모자구나.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총리께서 보내서 온 거다.”

“……!”

이춘섭의 말에 로버트 호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전혀 예상 밖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로버트 호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그런 지시를 내렸을 리 없다!”

“총리께서는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면서, 자신의 믿음을 배신한 놈은 더 이상 자식이 아니라고 하셨다. 네놈이 비자금의 상당 부분을 난봉질에 쓴 것도 알고 계신다.”

“……!”

“네 목숨은 상관없으니 남은 돈은 전부 회수해 오라고 하셨다.”

로버트 호의 눈이 급격하게 흔들리는 모습에 이춘섭이 옆에 서 있는 김상균에게 지시했다.

“풀어 주고 핸드폰을 건네줘라. 확인하고 싶을 거다.”

“예, 오야붕.”

김상균이 일본어로 답하고 상반신의 밧줄을 풀어 줬다.

손이 자유로워 주고 핸드폰까지 쥐었지만 로버트 호는 쉽게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굳히며 버튼을 누르려는 모습에 진혁이 급히 이춘섭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대로 두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이춘섭이 급한 마음을 숨기고 일부러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국의 총리라는 자가 생각보다 짜더군.”

“……?”

“수십억 달러가 넘는 돈을 회수하는데 겨우 몇십만 달러로 퉁치려고 하고 말이야.”

로버트 호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아갔다. 뭔가 돌파구가 보였다.

“나랑 거래를 할 텐가?”

“어차피 돈에 목숨 건 놈인데 뭔들 못하겠나. 솔직히 당신을 보면서 많이 부러웠거든. 누군 몇십만 달러에 목숨을 걸면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데, 당신은 머리 하나만 가지고 수십억 달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펑펑 쓰고 다니잖아.”

“얼마를 원하시오?”

“식구들이 많아서. 억 단위는 돼야 하지 않겠나?”

천연덕스럽게 답하는 이춘섭의 모습에 로버트 호가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1억 달러를 주겠소.”

“에헤. 우리 식구들 입이 얼마인데. 5억 달러.”

“여기저기 묶여 있어 3억 달러 이상은 어렵소.”

“좋아. 받아들이지.”

이춘섭이 직접 나머지 밧줄을 풀어 주는 성의까지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일어나려는 로버트 호의 어깨를 이춘섭이 지그시 눌렀다.

“한 가지 먼저 받고 싶은 게 있는데. 스모킹 건.”

로버트 호의 눈이 다시 커졌다. 어떤 범죄나 사건을 해결할 때 나오는 결정적 증거를 이르는 말이었다.

이춘섭이 어깨를 누른 손에 힘을 풀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런 일을 하도 오래 하다 보니 알게 된 건데, 당신 같은 사람들은 꼭 보험용으로 그걸 가지고 있더라고.”

“그런 건 없소.”

“당신과 거래하는 순간 총리에게 쫓기게 될 텐데, 우리도 준비는 해야지. 동지끼리 서로 도우며 사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음…….”

“원본을 달라는 게 아니야. 사본이면 충분해.”

“좋습니다. 노트북이 필요합니다.”

“여기 있습니다.”

옆에 있던 진혁이 얼른 노트북을 건네줬다.

전원을 켠 로버트 호가 주변을 둘러보고 사각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자신만 아는 비밀 메일에 접속했다.

만일을 대비해 준비한 자료를 하드에 내려 받고 바로 창을 닫은 후 넘겨줬다.

“바탕 화면에 있소.”

“잠시 보겠습니다.”

진혁이 노트북을 가지고 벽 쪽으로 가서 자료를 조사했다. 여기에 원하는 자료가 있어야만 한다.

로버트 호의 자료는 금융 전문가답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돈이 들어와 어떤 세탁 과정을 거쳐 케이만 제도의 비밀 계좌로 모였는지 상세히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다음 자료를 보던 진혁의 눈이 반짝였다.

입금 내역을 정리해 놓은 것이었는데, 차명 옆에 친절하게 실질 입금자가 적혀 있었다.

당연히 테홍녠과 자인 그룹의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거기에 말레이시아의 다른 화교 기업과 회장은 물론 여러 이름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리카렁 회장도 보였다.

진혁이 싸늘한 미소를 짓고 노트북을 닫고 돌아갔다.

“맞습니다.”

“난 거짓말은 안 하는 사람입니다.”

“어련하시려고. 가자.”

세 사람은 로버트 호를 일으켜 차에 태웠다.

* * *

그 시각, 지구 반대편 미국 실리콘 벨리의 BLC 사무실이 갑자기 분주해졌다.

-출발.

스피커에서 울리는 소리에 빈센트 사장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는 어디까지 된 거야?”

“케이만 제도의 KIM 뱅크에 계좌를 개설하는 중입니다.”

“빌어먹을! 너무 늦어. 빨리 서두르란 말이야.”

빈센트 사장의 입에서 호통이 터져 나왔다.

진혁이 보내 준 자료를 분석해 비자금 계좌가 KIM 뱅크라는 사실을 이제 막 알아낸 상태였다.

-공항 도착 5분 전.

“……오 마이 갓! 서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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