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빌더, 두 번의 후회는 없다-239화 (239/307)

239화. 노병의 귀환

“아, 소리 좀 그만 질러요. 누군 천천히 하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요?”

“우리 최대 고객이잖아. 적기에 바꿔치기를 해야 해.”

“계좌가 만들어졌습니다! 입금했습니다!”

“얼른 이체하고 이미지부터 따! 엠마는 준비하고!”

“오케이! 빨리 넘겨!”

“기다려!”

마치 전쟁이라도 치르듯이 서둘러 준비했다.

타이밍 싸움이었다.

-공항 도착.

빈센트가 거칠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잔고는 확인됐어?”

“32억 달러가량 될 것 같아.”

“그럼…… 끝에 공을 하나 더 붙이는 것으로 처리하자.”

“좋아. 창 크기를 줄일게.”

-노트북 부팅.

“으아아! 그래픽 작업 중단! 일단 올려!”

빈센트의 목소리가 비명에 가까웠다.

* * *

로버트 호가 진혁에게 받은 노트북으로 이체를 하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동작을 멈췄다.

굉장히 안 좋은 현상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이춘섭이 급히 나섰다.

“무슨 문제가 있나?”

“화면이 좀 다른 것 같아서요.”

“긴장해서 그럴 거야. 우리도 방아쇠를 당길 때는 그런 기분이 들어.”

“그런가?”

무식한 놈들이라고 속으로 욕하며 로버트 호가 얼른 3억 달러를 입력하고 이체 버튼을 클릭했다. 한시라도 빨리 이 불한당 같은 놈들에게서 빠져나가고 싶어 서둘렀다.

최종적으로 비밀번호까지 입력하자 이체 결과 화면으로 넘어갔다.

“확인해 보십시오.”

“탑승 시간이 됐습니다.”

진혁이 얼른 노트북을 빼앗았다.

그러자 이춘섭이 바로 로버트 호의 어깨를 감싸 안고 탑승 게이트로 걸어가며 말했다.

“나도 완전히 잠수함을 탈 테니 당신도 조용히 지내. 잡혀도 우리는 모르는 사이야.”

“그건 걱정 마시오. 중국에서 한 발자국도 안 나올 테니까.”

로버트 호가 문 안으로 사라지자 이춘섭이 얼른 돌아서서 진혁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30억 달러를 깨끗하게 발라 먹었습니다.”

“우와!”

“약속대로 10%를 드리지요.”

“감사합니다.”

역시 진혁은 통이 컸다.

빈센트도 3억 달러를 받게 된다. 그럼 진혁은 24억 달러를 챙긴다.

로버트 호는?

‘개털 된 거지, 뭐.’

* * *

베이징 공항에서 로버트 호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던 시각, 진혁은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 외곽의 고급 주택가 건물로 들어서고 있었다.

탕분헝 전 총리는 구십이 넘은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정한 모습이었다.

특히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릴 정도로 강렬했다.

진혁이 정중히 인사를 했다.

“면담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 회장님 같은 열정적인 사업가가 한물간 늙은이를 찾아와 주니 오히려 내가 고맙지요.”

탕분헝은 다섯 차례 총리직 연임으로 23년간 장기 집권하며 말레이시아의 근대화를 이끈 ‘국부(國父)’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는 강력한 ‘토착민 우대 제도’를 펼쳐 60%가 넘는 말레이시아계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강력한 경제 개발을 추진했다.

야당에 대한 조직적인 탄압과 국가 보안법 남용, 언론 통제 등으로 ‘개발 독재자’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빈국에 머물던 말레이시아를 ‘아시아의 호랑이’로 탈바꿈시킨 일등 공신임에는 틀림없었다.

탕분헝 전 총리가 물었다.

“어쩐 일로 나를 찾아온 겁니까?”

“어르신께서는 총리 재임 기간 동방 정책을 주창하며 한국, 일본, 대만의 사례를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그랬지요. 당시 개발 독재자를 따라한다며 비난했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한국을 보십시오. 과거에는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였는데 지금은 세계 선진 국가가 됐지요.”

“맞습니다. 아세안 국가 중에 가장 먼저 선진국이 될 거라던 말레이시아가 어르신이 퇴임하자 ‘종이호랑이’라는 비아냥을 받고 있습니다. 이는 현 팡기텍 총리의 ‘화교 우대 정책’이 명백한 실패라는 걸 의미합니다.”

진혁의 노골적인 말에 탕분헝 전 총리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비록 정계에 은퇴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여당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고, 팡기텍 총리를 천거한 이도 그였다.

“젊어서 그런지 말씀에 거침이 없군요. 그러다 이 나라에는 발도 디디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알라딘은 세계 여러 나라에 진출해 있습니다. 소수의 화교들에게 경제권을 장악당해 종이호랑이가 된 말레이시아라 큰 관심도 없습니다.”

“무엄하오!”

“저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경제인이 이 나라를 그 정도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어르신이 이룩하신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팡기텍 총리는 연이은 경제 실책과 스캔들로 이미 통제력을 상실했습니다. 이대로 지켜만 보실 겁니까?”

“……비리 혐의는 검찰에서 무혐의로 처리했습니다.”

“그걸 믿으십니까?”

진혁의 질문에 탕분헝이 답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팡기텍이 강압적인 방법으로 검찰을 압박해 조사를 중단시켰음을 모르지 않았다.

의혹만 있지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팡기텍은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실세 총리요. 세간의 소문만 가지고 그를 단죄할 수는 없지요.”

“제가 그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

탕분헝 전 총리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온갖 풍상을 다 겪어 이제 놀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반향을 불러올 수 있었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저에 대해 조사하셨을 테니 NS통신과의 관계도 파악하셨을 겁니다. 그쪽에 바로 넘겨 버리려다가 어르신께서 한국을 좋게 봐 주셨던 정을 생각해 먼저 찾아온 겁니다.”

“보여 줄 수 있겠소?”

“얼마든지 보십시오. 만일을 생각해 원본은 따로 보관해 두었습니다.”

진혁이 출력해 간 자료를 건네줬다.

옆에 놓인 돋보기를 끼고 자료를 검토한 탕분헝이 허탈한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팡기텍이 ‘말레이 홀딩스’를 통해 뇌물을 받아 불법 비자금을 조성하고 개인적인 치부를 했다는 증거들이 차고도 넘쳤다.

게다가 대부분이 해외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이게 언론에 퍼져 나간다면 말레이시아의 대외 신인도는 회복하기 힘든 티격을 입게 된다.

이건 무조건 막아야 했다.

탕분헝 전 총리가 억지로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다듬다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몸을 바로 했다.

진혁은 사업가였다.

단순히 자신이 친한파라 먼저 찾아왔다는 것은 지나가던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었다.

노회한 탕분헝은 진혁이 목적이 있어 자신을 찾아왔음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내게 원하는 게 뭡니까?”

“말레이시아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이 증거를 빌미로 나를 협박해 이 나라의 정계를 통제하겠다는 것이오?”

“전 사업가지 정치인이 아닙니다. 제가 정치인이 될 생각이었다면 굳이 이 나라가 아니어도 원하는 곳은 차고도 넘칩니다.”

그 점은 탕분헝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은 물론, 중동, 방글라데시 등 무슬림 국가들에서 진혁의 명성은 이미 그곳 지도자들을 넘어서고 있었다.

“특혜를 바라는 게 아닙니다.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자인 그룹의 테홍녠 회장같이 뇌물이나 바쳐서 사업하는 더러운 자가 활개 치지 않게만 해 주십시오.”

“테홍녠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자가 이곳 사업을 방해하는 바람에 조사하다가 이 증거들을 확보하게 된 겁니다.”

진혁은 그간의 사정에 대해 들려주었다.

“팡기텍 총리와 현 정부 인사들은 모두 테홍녠에게 뇌물을 받아 하수인이 되었을 테니 도움을 청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카오에 피신해 있던 로버트 호를 붙잡아 이 자료를 확보한 겁니다.”

“그놈을 당장 만나야겠소.”

“안타깝게도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중국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럼 이 자료를 중국 정부에서도 가지고 있다는 말이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로버트가 가지고 있던 원본 자료는 우리가 삭제했습니다.”

노트북은 처음부터 악성 코드가 심어져 있어 BLC에서도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

로버트 호는 BLC가 자신과 똑같은 화면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비밀 메일에 접속해 자료를 다운 받았던 것이다.

빈센트는 돈만 가져간 게 아니라 메일마저 삭제해 버렸다.

진혁이 말을 이었다.

“지금쯤 로버트 호도 메일이 삭제된 것을 알 겁니다. 결적인 증거들이 사라졌으니 함부로 입을 놀리지는 못할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이구려. 화교는 결속력이 대단한 놈들입니다. 팡기텍에게 그렇게 화교를 견제해야 한다고 주의를 줬건만. 쯔쯔쯧.”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게 며칠만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주시오.”

“GTH리테일이 거래 중단을 통보한 날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 전에 결론을 내지요. 기다려 주시오.”

“……알겠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 기다리겠습니다.”

“먼저 나를 찾아와 줘서 고맙소.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소.”

“이 나라의 경제 발전을 위해 계속 일할 수 있었으면 싶습니다. 매력적인 나라입니다.”

진혁은 그 정도로만 이야기하고 나왔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다음은 탕분헝 전 총리가 하기 나름이었다.

그 결과에 따라 함께 침몰하든지 함께 나아가든지 결정이 난다.

그날 진혁이 그곳을 나오자마자 바로 공항으로 가서 한국행 비행기를 탄 것은 김상균의 반강압적인 권유 때문이었다.

예상과 달리 탕분헝이 팡기텍과 거래해 버린다면 자신은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진혁은 김선혁에게 그동안의 일을 들려주었다.

더불어 탕분헝이 자신의 예상과 다른 결론을 내렸을 때를 대비해 말레이시아 시장에서 철수할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 뒤 진혁은 가족들과 중단했던 휴가를 즐겼다.

* * *

출근한 진혁은 알라딘 연구소를 방문해 그간의 성과에 대해 보고를 받고 구필준 소장과 차를 마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구필준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며칠 전에 빈센트가 전화했는데 회장님 덕분에 아주 좋은 일이 있었답니다.”

“……!”

진혁의 인상이 바로 굳어졌다.

이번 일은 비밀 작전이라고 그렇게 당부했는데.

하지만 이어지는 구필준의 말에 그 표정은 바로 사라졌다.

“BLC가 신청한 ‘대응형 플랫폼’의 특허 신청이 받아들여졌답니다.”

“대응형 플랫폼요?”

“블록체인에 악성 코드가 감지될 경우 화이트 해커가 이를 막을 수 있는 대응 코드 정보를 제공하고 보상을 받는 시스템입니다.”

“아, 해킹 챌린지 대회에서 해커에게 당하면서 익힌 기술을 응용한 것이군요. 머리 좋네.”

BLC는 이후에도 두 번 더 해커에게 패했다.

결국 세 번째에는 성공해 더 이상의 굴욕은 없었지만, 받기로 했던 200만 달러가 50만 달러로 줄어드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에 빈센트가 이를 갈더니 그때 경험을 살려 다른 쪽으로 머리를 굴린 모양이었다.

구필준의 말이 이어졌다.

“특허 출원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여기저기서 공동 사업 진행 제의가 들어온답니다. 회장님이 제시한 미션을 수행하면서 아이디어를 얻었다며, 대신 감사를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좋은 일이네요.”

진혁은 괜히 빈센트를 의심했다며 자책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김선혁이었다.

바로 받았다.

-마침내 터졌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진혁은 서둘러 회사로 돌아갔다.

말레이시아에 무슨 변화가 생겼다.

탕분헝 전 총리, 부총리로 전격 정계 복귀.

말레이 국왕, 이례적으로 신임 부총리에게 축전.

세계 언론이 속보로 내보낸 제목들이었다.

갑작스런 노정객, 탕분헝의 등장이 향후 말레이시아 정국에 미칠 영양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TV를 끄고 김선혁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냐?”

“이 내용만으로는 예상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정계에 복귀하게 됐으니 나쁜 뉴스는 아닌 것 같습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특히 국왕이 탕분헝을 인정했다는 것은 사전에 어떤 교감이 있었다는 방증이지.”

“좀 더 기다려 보죠.”

“그러자.”

두 사람 모두 성급한 판단을 유보했지만 기대를 갖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정국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다음 날 바로 알 수 있었다.

팡기텍 총리, 전격 사임 발표! 말레이 정권 탕분헝 부총리에게.

탕분헝 총리 권한 대행, 말레이 홀딩스 사건 재조사 지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이어 터져 나오는 말레이시아의 빅 이벤트로 세계 언론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중에서 제일 놀란 곳은 중국 정부였다.

0